"신부님, 저 밥 먹었습니다"

 

 

밥 먹은 죄

“신부님, 저.... 밥 먹었습니다.”
“어째서 밥 먹은 게 죄가 된다고 고백하시지요?”
“신부님, 어젯밤 텔레비젼 뉴스에서 아프리카 어디에서 아이들이 굶어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깡마르고 초췌하고 절망에 잠겨 숨 넘어가는 것을 보고도 저는 밥을 먹었습니다. 그걸 보고서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는 말입니다, 신부님!”
(빌 휴브시(성찬성역), 「정말 알고 계십니까?」 (바오로딸 1993) 173-177면 참조)

우리 평신도들은 교회법에 따라서 일 년에 적어도 한 번(한국교회에서는 두 번) 의무적으로 고백성사를 행하고 그것을 “판공성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수도자와 성직자들, 우리가 보기에는 죄를 짓자고 마음먹어도 죄지을 기회가 도무지 없는 사람들은 매주 고백성사를 행한다. 나 같은 사람은 “죄”라고 하면 부정 타는 때꼽 정도로 생각해선지 반 년 만에 한번 행하는 고백에서도 주일 미사참례 빠진 것하고 6.9계명을 어긴 죄 외에는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굳이 판공성사나마 행하는 이유마저 보약 같은 성체를 모시는데 괜히 꺼림칙하고, 영성체 안 해서 집사람 눈 밖에 나거나 옆 사람들에게 의심사기가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신앙이 성숙할수록 사람의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교회는 나한테 가르친다. 내 처자식에서 친척들에게로, 어려운 이웃과 한 겨레에게로 팔이 뻗는다면 저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내란에 시달리고 아이들이 굶어죽어도 내 이웃이 당하는 것처럼 안쓰럽고 삼팔선 넘어 북한 아이들이 굶어도 내 자식 굶는 것처럼 괴로워지겠지. 그 불행이 모조리 내 탓 같고 내 욕심 때문 같아지리라. 그래서 양심이 세심해지고 전 세계의 불의와 고난에 민감해지리라. 그제야 성직자 수도자들이 매주 고백성사를 행하는 까닭을 알 듯하고, 만약 첫머리의 고백자처럼 나도 섬세한 양심을 품는 경지에 이른다면 날마다 고백성사를 행하고서도 부족하리라.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제들이 고백소에 앉아있다면 우리는 성사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형제님, 십계명을 어긴 죄 말고도 예를 들어, 아프리카나 북한에서 수백만 아이들이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형제님이 걔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성찰해 보시겠습니까?”

 

“저도 양심은 있고 고것들이 가엾어서 ‘주님, 저 불쌍한 것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어떻게 돈을 보낼 수도 없고 해서...”


“그래도 가까운 북한의 어린이들이라면 도울 수는 있었지요?”


“방법을 알아야 말이죠.”


“본당에서나 교구에서 국수 한 끼 나누기 운동을 해 왔고,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에서도 모금운동을 하고 있지 않던가요? 사회단체들도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하구요.”


“그건 압니다만 우리가 식량을 보내면 죄다 인민군 군량미로 쓴다지 않습니까? 조선일보 같은 데에 다 나오는 얘깁니다, 신부님. 또 북한 돕기를 하는 단체라는 것들은 모조리 좌익들이라구요... 이북에서는 정말 백성들이 굶다굶다 못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김정일 공산당을 때려 부수게 만들어야지, 괜히 식량을 원조했다가 공산독재정권만 연장시키면 어떡합니까?”

 

 “형제님, 저는 반공사상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굶주리는 자를 우리가 못 본체하면, 굶어죽는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머나먼 아프리카 흑인인지 상관 않고 주님이 우리 죄를 물으시리라는 엄숙한 말씀,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심판의 말씀을 일깨워드릴 뿐입니다....”


“신부님,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하신 말씀이지 꼭 그렇게 심판 하실라구요....”

 

“형제님, 사제인 저도 제발 형제님의 말씀대로였으면 하고 기대해봅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주님이 저 말씀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여간 낭패가 아니거든요. 저는 그게 두렵답니다.”


(“이 따위 얘기로 속 끓이게 만들지 않아서 천주교가 점잖고 좋았었는데...” 아마도 이 교우는 자기가 여태까지 누리던 영혼의 평안을 흔들어 놓는 그 사제의 고백실에는 다시는 안 나타날 것이다. )

결혼이면계약서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는 결혼이면계약서라는 것이 있다고들 한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동거하며 경제적으로 공유하겠다. 그렇지만 나의 이러이러한 생활과 활동과 취향은 터치하지 말라. 나도 당신의 그러저러한 영역은 터치하지 않겠다. 당신이 이 선을 넘어서면 우리 결혼의 파탄을 의미한다.”는 내용을 결혼 전에 문서화한다는 얘기다. 영악한 세태다.


성당의 주일미사 강론과 고백실의 대화야말로 신앙인의 영성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 같다. 아무리 첨예하고 날카로운 정치사회적 사건(예를 들어 작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나 지난 대림절 한국 주교단의 자기고백 같은)이 발생하더라도 주일미사 강론이나 신자들의 기도, 프레시디움 훈화, 피정강론에 그런 사건이 언급되는 일이 전혀 없다면 신앙인들은 그 사건들이 신앙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교회 안팎에서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요!"라는 말이 보통 "신앙과는 무관하오!"라는 의미를 띤다. 예컨대 선거도 투표도 각자가 알아서, 각자의 출신지와 정치적 구미에 따라서 할 일이지 신앙에 입각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않는다. 설혹 신앙의 안목을 갖고 투표하자는 성직자의 발언이 나오면 왜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느냐고 반발한다.


솔직히 내 신심생활은 내 개인의 구원을 위주로 하고 있다. 이런 영성은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당에 가서 보내는 성스러운 시간이야 교회 가르침을 따르겠지만 성당 밖에서 보내는 사회생활이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성속이원론 말이다(“성사나 주이소. 나머지는 지가 알아서 할 낍니다, 신부님!"). 병원에 가서야 하는 수없이 의사의 손에 내 몸을 맡기듯이, 천당 가는 길이야 성직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터이므로 성직자들도 신도들을 다스리기가 한결 용이하리라. 그래서 성사를 위주로 하는 종교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는 상주로, 나주로, 수류로 몰려가고 사적환시를 받았다는 기도회나 방언과 치유로 소문난 성령 기도로 쏠리는지 모른다.


주일미사와 교무금과 판공성사라는 최소한도로 세례서원을 다했다 여기고, “나머지는 터치하지 마셔요, 하느님!“하고 으름장 놓으며 살아가는 내 모습에서 저 영악한 신세대 젊은이들을 보는 듯하다. “중산층의 교회”의 신도답게, 나는 하느님께 세례이면계약서를 들이밀고서 입교한지 모르겠다.

[대구교구 주보 "빛" 원고 2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