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매듭지으면서 내리는 사랑의 계명, 우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첫째가는 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누굴까?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에 탄복하는 율법학자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내 귀에 남는다.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뒤집어 들으면, 아직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말씀 같아서다.

그럼 벌써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누굴까? 교회사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장 거창한 작품(「신국론」: 필자가 번역 주석 중)을 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 나라의 소속 여부를 한 마디로 “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으로 정하였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 두 도성을 가른다."(「창세기 축자해석」)

성인이 말하는 사회적인 사랑은 공동선의 사랑, 화해와 일치와 정의를 도모하는 사랑이다. 사사로운 사랑은 끼리끼리의 사랑이요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루어지는 동아리 사랑이다. 영호남 사이의 지역감정이나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하느님의 눈에 역겨운, 우리 민족의 가장 가공할 사사로운 사랑이리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우리가 자처하면서도 지역감정이라는 사사로운 사랑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살피고 싶으면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지난달의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한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주님 앞에서) 짚어봄직하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였을 적에 김영삼 대통령이 조문을 가서 정상회담을 했고 남북화해의 물꼬를 텄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하여 노벨평화상을 우리네 김영삼 대통령이 수상하였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데 하필....

팔은 저절로 안으로 굽는다. 필자는 십자가를 우러러 볼 적마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안으로 안으로만 굽는 두 팔을 활짝 벌려서 십자가에 못으로 박아서 사사로운 사랑으로 아예 못 굽게 만들어 버리신 주님의 결단과 모범이 거기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북화해와 통일, 영호남의 화해와 일치가 단지 정치문제가 아니고 나의 구원을 좌우하는 신앙문제이기도 하다면, 지역감정을 이기려는 나의 잔잔한 노력을 보시고 주님이 “당신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는 말씀이나마 들려주시면 좋겠다.

[부산주보: "뱃고동" 2000.11.5: 연중 31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