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보: 가르침 1988.5.12-7.3  7회 연재물]

 

'주님의 여종 ' 이야기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차례:

1. "주님의 여종"의 이야기

2. "주님의 여종"의 이야기(2)

3. "은총이 가득한" 여인

4.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5.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6. "마리아 선언서"

7. 성모 성년의 의의

 

 

1. "주님의 여종"의 이야기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용감하기는 하지만 불안에 떨고 있는 20세기의 인류에게 동정 마리아의 미소와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하여" 작년 6월 7일에 개막되었던 성모 성년>이 8월 15일의 폐막을 앞두고 이 성모성월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금세기에 와서는 1954년에 교황 비오 12세가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모성년을 열었으니, 34년만에 가톨릭 신자들은 다시 마리아의 성년을 맞은 셈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의 축제는 우리로 하여금 동시에 그분의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다"는 명분에서 그 축제를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로 준비하는 것이 합당하다"(3)고 설명한다. 마리아께서 대략 열 네살의 나이에 예수를 낳으셨으리라는 전설적인 계산도 곁들여 있다.

 

하지만 25년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여 열리는 1975년의 성년과 1983년의 특별성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유난히 잦게 반포되는 성년에서 교회 최고장상의 달리 표현 못할 어떤 고뇌와 초조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다고 단언은 못하더라도, 파띠마 성모님의 세번째 메시지가 역대 교황들의 손에서는 개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표가 되지 않은 까닭을 여러가지로 추측해 보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임박해 오는 무슨 불길한 운명을 두고 신앙인들의 회개와 속죄와 기도를 총동원하여 이를 막아 보려는 목자의 심중을 헤아릴지도 모른다.

 

이 땅위에서 하느님께 저질러지는 그 많은 죄를 두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하늘에 부르짖는 그 많은 한과 눈물을 두고, 교회하느님과 인간 앞에 정의가 서야 한다고 외쳐 왔다. 그러나 세상이 정의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자비로운 인간의 사랑이 필요함을 아울러 역설해 왔다.

 

<인간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듯이, 성년의 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미움과 혼란과 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는" 길도 <구세주의 어머니>께 매달리는 것뿐이라는 절박함이 들어 있다. 시인의 말대로, "여성적인 것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솔직함이다.

 

 

 2. "주님의 여종"의 이야기(2) 

 

     마리아의 이야기는 모두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만 이분의 신비가 완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4)는 회칙의 선언처럼 이것은 성모 신심의 핵심이라 하겠다.

 

나자렛의 한 처녀에게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엄청난 칭호가 바쳐진 것은 나자렛사람 예수의 신분이 누구냐는 물음의 답이다. 그이가 낳으신 아들이 참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이의 잉태가 원죄가 없었다는 말은 장차 오실 구세주의 위력이 시공을 초월하여 지구상에 나타났고 나타날 모든 인생을 망라함을 웅변적으로 가르친다. 그이가 가득히 받으신 은총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런 이유에서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한다면),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루가 2,48-49)라고 스스로 말씀하실 정도였다. 성모님을 비롯하여 어느 성인 성녀나 위인을 받들더라도 우리가 드리는 찬미가는 하느님이 해 주신 "큰 일"을 두고 하는 경탄이다.

 

이 노선을 지킨다면 우리의 성모 신심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도, 갈려나간 형제들이 그리스도교를 "마리아교"라고 헐뜯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신자들의 어머니가 당신 때문에 자녀들을 갈라놓으실 리가 없다(29-34). 하지만 성모님의 이야기는 팔레스티나의 한 마을에 살던 나자렛 처녀의 이야기이다. 로사리오를 바치거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올릴 적에 우리는 요아킴과 안나의 딸, 다윗 가문 요셉의 아내, 예수의 어머니라는 역사상의 한 여인께 기도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그리스도께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다 삼켜 버리시는 용광로가 아니시다. 세상을 이탈하고, 성덕이 높아져서, 죽은 다음에 누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의 개별 존재가 그만큼 선명해진다. 수호천사에게 드리는 기도는 수호천사에게, 예수 성심께 올리는 공경은 인간 예수의 마음에 도달한다.

 

끝으로 마리아의 이야기는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교회의 어느 신심도 이웃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37)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시간있는 사람의 기분풀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귀찮은 책임을 회피하는 마약"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옛부터 실천적인 이웃사랑은 신심의 참됨과 거짓됨을 가르는 시금석이었다

 

 

 3. "은총이 가득한" 여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는 작년에 성모 성년이 시작되기 전인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에 발표되었다. 전부 52항으로 된 내용이 3부로 나뉘어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인적인 신심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이 회칙은 2000년을 앞둔 "이 마지막 몇년 동안에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특별한 현존을"(3) 필요로 한다는 데서 시작한다.

 

제 1부는 그리스도로부터 그 기원과 효력을 취하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를 논한다. 제 2부는 교회의 모델이 되심으로써 신앙의 나그네 길을 앞장서 가신(5) 마리아의 모습을, 제 3부는 "인류와 우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가장 완전한 상(幾)"(37)으로서 마리아의 중재 역할을 다루고 있다.

 

제 1부는 내용이 "은총이 가득하신 분", "믿으셨으니 복되신 분", 그리고 여성이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 입에 가장 익은 기도문 그대로 "은총이 가득하신 분", 단테가 일찌기 노래한 것 처럼, "그대를 지으신 분이 그대에게서 지음받기를 마다하지 않으실만큼

 

고귀한 인간 본성을 지닌 여인" 을 교황은 극진한 애정으로 우러러 본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영원으로부터 인간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따라서 당초부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그리스도란 사람으로 태어나실 성자이시므로 그의 어머니 되실 "여인"이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7).

 

은총이 가득하시다"는 인사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태초부터 하느님이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뽑으신"

사실,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함께 사랑받으신다는 사실을 말한다(8).

 

성모님의 발현이 있었던 언덕이나 누가 순교한 형장을 우리는 성지라고 한다. 예배를 올리고 성체가 모셔지는 곳은 성전이라 부른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성과 실제로 하나 되신 한 여인의 태중, 인간과 우주 역사의 정점을 가리켜 우리는 은총의 샘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9).

 

아드님한테 특출한 방식으로 구원받으셔서 원죄가 없으셨던 것도 그렇다(10). 그때부터 인류의 역사가 끝나기까지 벌어질 선과 악의 투쟁에서, 하느님이 선의 승리를 택하셨음을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본다(11). 그래서 성모님은 인류사가 바라보는 "새벽별" 또는 "바다의 별"이시다.


 

4.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

 

    오늘의 여인들은 성모님에게서 자기네와 다른 영광보다는 비슷한 모습을 찾는다. 처녀로서, 아내되어, 어머니로서 겪는 나의 삶의 애환을 예수님의 어머니는 어떻게 맞으셨는지 보고 배우고 싶어한다.

 

나자렛의 한 처녀가 걸었던 '여자의 길'은 성모님을 우리에게 한없이 친근히 느끼게 해 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는 말은 같은 여자로서 서로의 속사정을 깊이 아는 언니의 인사였다. 믿음이야말로 마리아론의 '본질'이다(12). 그러나 그 믿음은 구세주의 강생에 어머니로서 승락을 표했다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한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라는 주님의 뜻에, 자칫 미혼모나 부정한 여인이라는 낙인과 외로운 한평생을 각오@하고서 '여성적 자아'로 응답한 모험이었고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아다시피 남한땅 조그만 나라에서 한 해에 수백만 태아가 살해당하고 웬만한 여자는 낙태 경험을 지녔노라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얼마나 큰 강단이었는지 알 만하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시다 그리고 우리네 어머니가 걸은 그 길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괴롭고 한스러웠다.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귀에 선한데도, 극도의 가난 속에 해산을 기다리다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아 말구유에 눕히는 신세가 되신다.

 

그는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리라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시리라"는 시므온 노인의 불길한 예언을 성전에서 들으신다. 과연 베들레헴 여자들이 눈앞에서 자식들을 도륙당하고 미쳐 날뛰며 울부짖는 처참한 장면에서 말뜻을 깨닫기 시작하신다. "당신 자식 때문에...!"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드디어 마리아는 외아들이 사형수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형장에, 십자가 발치에 선다(16-18). 이 장면을 가리켜 회칙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심오한 신앙의 케노시스(자신을 비움)"라고 형언한다(18). 그곳은 하느님의 사랑이 절정에 달하고, 예수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고 한 여성의 모성이 최고도로 발휘되면서 갈갈이 찢기는 무대가 된다.

 

투신 직전에 "이제사 나자렛 예수의 그 심경을 이해할 것 같다"던 조성만군의 말처럼, 자기의 모든 사랑과 기대와 삶이 무너져 내림을 체험하여 본 여인만이 "믿으셨으니 복되시도다"는 말뜻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5.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화신문 제2호를 보면 조성만군의 죽음을 두고 어머니를 위로하며 함께 우는 네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전태일군의 어머니, 김세진군의 어머니, 이한열군의 어머니를 담은 사진은 <아,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금세기 한국의 <피에타>상이다.

 

아들의 친구들이 자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면 참 행복하고 뿌듯하다는 중년 여인들의 말을 듣는다. 예수님의 인품이며 훌륭한 말씨에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복도 많습니다!" 하던 아낙네의 말을 접어두셨던 주님은 십자가 밑에까지 혼자서 따라온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숨지셨다. "어머니,저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던 전태일군의 유서를 생각케 한다. 이래서 이소선 여사의 팔은 길어져만 가고 이 땅의 가엾은 젊은이들을 모두 감싸는 성모상으로 변해왔다. 나자렛의 한 처녀가 그저 '예수 엄마'에서 인류의 어머니로, 이 성년에 온인류의 운명과 사회적 국제적 위기까지 맡으시게 된 경위가 이러하다(23-24).

 

 아들들은 품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조무라기 친구들에게로, 학교로, 사회로, 아내에게로, 죽음으로 멀어져 간다. 아들이 커갈수록,그 역할이 위대해질수록 자기한테서 멀어져감은 성모님도 겪으셨다. 그러면서 당신에게는 '새로운 모성', 어머니로서의 새 역할, 남에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죽어가는 동포들에게, 죄많은 인류에게 아들을 내놓아야 함도 깨닫고 행동하셨다(20).

 

가나 혼인잔치에는 어머니 덕분에 예수와 제자들이 초대를 받아 가셨다. 그리고 거기 인간사의 어려움이 생기자 주저않고 아들에게 부탁을 하신다. 사내아이의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물러서는 여자는 없다("그래도 난 할꺼야!": 우리가 많이도 듣는 소리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성모님이 성자 앞에서 언제나 우리를 위해 전구하심을 믿게 되었다. 나, 내 가족, 우리 사회, 오늘의 인류를 얼마나 걱정하시는지는 그 흔한 성모님의 발현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21-22).

 

우리한테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는 한 마디뿐이다. 빈 항아리에 물을 길어담거나 시키시는대로 퍼다가 잔치상에 내놓는 일이 인간들의 역할이다. 나머지는 아드님이 다 하신다.

 

 

6. "마리아 선언서"

 

     한 시골처녀가 주님의 은총을 입은 뒤에 지어부른 노래에는 인류사 최초의 <혁명 선언서>같은 색채가 농후하다: "권세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젖을 먹이시고 이런 이념을 아들에게 심어 주신 마리아시라면, 예수의 첫설교가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해방설교였고 그래서 첫날부터 하마터면 맞아죽을 뻔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루가4,16-30).

 

과연 그 아드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하셨고 그런 선택은 아드님의 입신출세는커녕 비참한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사랑"을 노래하시고 사신 이상 그 신앙의 여정을 따르는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선택"을 회피할 길이 없다(35-37).

 

교회는 선언한다:"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자유의 표상이며, 인류와 우주의 가장 완전한 해방의 모습이다"(자유와 해방,97항). 그래서 교회는 자기 사명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도 공언하였다. 이 성년도 교황은 "고통받는 이, 소외된 이, 젊은이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의 기도를 결합하여" 개막하였던 것이고, 마니피깟이라고 알려진 이 마리아 선언서가 "전교회의 마니피깟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이 한 해를 성모님께 바쳤다.

 

최근에 나온 새 회칙 <사회적 관심> 마지막 항(49)은"현대 세계의 이 어려운 시기를 성모의 전구에 맡기자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이의 보살핌이 개개인의 사정과 영신적인 이익에만 미치지 않고...빈곤, 실업, 식량 부족, 무기 경쟁, 인권의 경시, 국지분쟁 또는 전면전쟁의 상황 내지는 위험 같은 사회상황과 국제위기에까지" 미치는 까닭이다.

 

우리가 성년 내내 "분단의 쓰라림과 사회적 정치적 갈등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사정을 성모님께 사뢰어 온 까닭도 여기 있다. 마리아는 과연 해방자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손색이 없으시다.

 

 

7. 성모 성년의 의의

 

     "문앞을 지나가시는 하느님이 두렵다."는 성아우구스티노의 말이 있다. 성월도, 성년도, 교황의 회칙도, 해방의 말씀도 닫혀진 우리 마음에는 아무런 흔적이나 변화를 남기지 못하는 법이다. 은총이 무익하게 흘러가 버린다. 현대 세계는 '어머니의 특별한 현존'을 필요로 한다. 죄악이, 특히 사회적 죄악이 가득하다. 수천만 인간이 매년 기아로 죽어간다. 하느님은 그 죄를 바로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한국을 비롯하여 전세계 도처에서 자행되는 인권의 유린이며 학살이며 전쟁이며 불의는 우리가 피를 뒤집어 쓸 일이지 체제의 탓으로 미룰 수가 없다. 태아들의 죽음, 성도덕의 타락, 부의 남용도 이 민족이 그 죄값을 치뤄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민족 사회와 국제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넘어짐'으로부터 '일어남'으로의 변화, '분열된 증오'로부터 '뭉치는 사랑'으로의 변화, 만연된 죽음으로부터 함께 누리는 생명으로의 변화는 생면의 원천을, 모성을, 어머니를 필요로 한다(52).

 

우리가 '넘어져 다시 일어나려는 백성'이기 때문에 여성적인 손길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술이 떨어졌다."  성모님이 개입하셔야만 한다. 손을 쓰셔야 한다. 단죄하고 쳐부수고 말살하겠다는 정의의 분개심을 술로 누그려 뜨리시고 취하여 용서하고 이해하고 살려 주려는 자비의 사랑이 생겨야만 한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였던가, "여성적인 것만이 인간과 인류를 구한다"고?

 

우리는 "오늘날 개인과 가정과 국가를 괴롭히는 많은 복잡한 문제들 가운데 어머니로서 함께 계시는 마리아를 본다"(52).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인류의 미래가 절망적이어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지금도 믿고 계시는 마리아르 본다. 그 약속은 하느님이 '큰 일'을 이루시리라는 것이고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리라는" 것이다.

 

개인들은 "깨어있는 동정녀, 기도하는 동정녀, 어머니된 동정녀, 봉헌하는 동정녀"(마리아 공경,16-32)에게서 모델을 본다. 사회는 교회가 "어머니다운 보살핌과 미천한 이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와 사회일치를 위해 투신함으로써 마리아의 그 사랑을 계속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인류는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된 새로운 인류의 모델"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