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명저탐방 2005.5.22]

 

단테의 「신곡(神曲)」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대통령궁에서 유럽연합헌법 초안에 서명하였고, 이 헌법은 각국의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날이기도 하였으니,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황의 끈질긴 주장을 유럽 정상들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패권 다툼이 유럽 전체를 황폐케 하던 중세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단테(「제정론(帝政論)」성염 역주, 철학과현실사 1997)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패권다툼을 두고 단테는 “신이 신성로마황제에게는 현세의 최고통치권을, 로마 교황에게 종교적 최고권위를 독자적으로 부여하였으므로 인류의 평화로운 현세적 행복과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양자가 공존하고 협력해야 하며  하나가 다른 편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교분리론을 확립하였다.

   라빈드라나드 타골과 더불어 시성(詩聖)이라는 월계관을 쓴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레기에리(1265-1321)는 궬피당과 기벨리니당의 정쟁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던 플로렌스에서 태어났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유럽에 궁극적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정치적 노력이 실패하자 역사의 지평을 넘어 세계사 전체를 종교철학의 시각으로 재정리하여 3부 100곡으로 이루어진「신곡(神曲)」을 남겼다.

   신곡은 단테라는 한 영웅이 육신을 입은 채로 지옥, 연옥(煉獄), 천국을 여행하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가 탐험하는 명계의 처음 두 곳은 이성(理性)의 상징인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고 세 번째는 신앙(信仰)의 상징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가 아홉 살에 처음 보았고 18세의 나이에 다시 해후하였으나 딴 남자에게 시집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은 한 여인이 구원(久遠)의 여성이 되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서사시는 “여기 한숨과 눈물과 드높은 통곡이 별 없는 하늘에 메아리 하는” 지옥에서 시작하여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그리고 만사를 한결같이 움직이는 바퀴나 같이 해와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더니라.“는 천국으로 끝난다. 인류사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이 엮어내는 승리의 기쁨 속에 완성된다는 낙관적 역사관을 보여준다. 전의 중세인들이 대자연(大自然)과 성서(聖書)라는 두 편의 책에서 인생과 신을 읽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이 함께 엮는 역사(歷史)라는 책으로 인생을 읽었다.

   그래서 지옥의 멸망된 족속으로 드는 길은 인생과 자기 사회에 대한 역사적 태만과 해악이며, 실상 지옥은 인간 자유의지의 개별적 집단적 행사를 신이 영원히 존중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이어 그 극한 지혜와 본연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영겁까지 남아 있으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그리고 “세계에서 세계에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는 시인의 동경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의 시집을 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