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짐
[광주기독교방송 1976.2.20]
아직 창밖이 희끄무레한 것으로 미루어 봄은 멀었나 봅니다. 아침을 준비하느라 아내는 부엌에서 도마 소리를 내고 있고 곁에서 돌쟁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습니다. 자기 집 안방 따뜻한 이불 속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 중이나 출장 중에 낯설고 썰렁한 여관방에서 눈을 뜰 때는 알지 못할 찬 기운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듭니다.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게 됩니다. 경험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병원 입원실이나 요양소 병실의 아침은 얼마나 서글프고 외로운지 모릅니다. 서너 길 높다란 담에 에워싸이고 서너 겹의 철창에 갇힌 저 교도소 감방의 새벽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형기를 마치는 날까지는 창살 밖에 펼쳐진 그 넓은 하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속은 오직 꿈길에서만 보는 그리움입니다.
"보리피리 불며 불며" 저 황톳길 언덕을 절뚝거리며 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천벌을 받았다 하여 성한 이들의 세상에서 온전히 잘려 나간 사람들은 아마 모진 목숨 다하기까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이야긴들 쉬어 들읍시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소독약 냄새 짙은 병실에서는 한시 바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수개월 장기 요양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말 못할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요즈음 시내 어느 극장에서 <썬 샤인>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골육종이라는 병으로 죽음을 수개월 앞둔 여인은 여러 번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내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있을지도 몰라.” 가냘프고도 너무나 절실한 소망입니다.
십 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차가운 감방에 갇힌 사람도 꿈을 꿉니다. "내일쯤 뜻밖에 특사가 내려 자유의 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환히 알면서도 마음은 꿈을 먹고 삽니다. 우리 눈에는 거의 띄지도 않고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어 숨어 사는 나환자들의 소망도 같은 것입니다. 어느 훌륭한 학자가 특효약을 만들어 내어 양성이 음성 되고 일그러진 피부와 조직을 온전하게 재생시켜 주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즐겁고 보람찬 하루를 앞둔 분들에게 어두운 이야기를 들려드리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하루의 삶이 짐스럽게 느껴지실 때 생로병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웃사람을 보시거든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병든 사람에게 건강을, 갇힌 사람에게 해방을, 나병환자에게 기적적인 완쾌를 가져다 줄 이는 누구일까? 우리의 허약함을 우리의 병고를 대신 짊어질 분은 누구일까? 옹기그릇처럼 산산조각난 인생을 재생시켜 줄 분이 있을까? 무너진 인생을 재생시키고 인간들이 저지르는 저 엄청난 죄과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할 분이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물음들을 새겨듣고 답변을 찾아내려 힘쓰고 있습니다.
(1976.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