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2001.4]

 

‘쇄신과 화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성 염 (보스코. 서강대철학과. 수유본당)

 

 

     전인류와 가톨릭신자들에게 대희년 2000년을 마감하고 삼천년기로 들어서던 대림절 첫주인 12월 3일자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한국교회의 과거사를 민족과 하느님 앞에 반성하는 「쇄신과 화해」라는 문건을 발표하였다. 비록 지나간 두 세기간에 저질러진 잘못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신앙으로 결합된 형제자매로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함께 고백하고 참회한다“는 취지였다. 문건의 의도는 한국천주교가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직업인으로 “천주교 신부”가 꼽히고 한국사회의 가장 존경받는 어른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지목되는 세태에서, 불과 200년이 안되는 과거사를 두고 가슴을 치는 한국천주교의 모습은 양식있는 국민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작년 3월 12일 로마교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가슴을 치고 인류와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을 적에 중세의 종교재판과 마녀화형, 그리고 유대인 박해에 가장 극렬하게 앞장섰고 현대에는 스페인내란과 프랑코의 40년 독재비호에 깊숙하게 간여한 스페인 주교회의가 “우리는 유죄를 인정할 의사도 없고 변명할 의사도 없다. 스페인 내란 동안 교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적절하지도 못하다. 그것은 국민을 분열시키고 당혹하게 만든다.”고 마드리드의 바렐라 추기경을 통해서 선언한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겸허한 종교인 모습을 우리 주교단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교회의 산하의 「역사신학위원회」의 8개월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 문서가 고백치고는 내용이 너무 모호하다는 일각의 불만도 없지 않았지만 만장일치제인 주교회의에서 이만한 문서라도 채택된 것은 성령이 우리 목자들과 함께하신다는 표징으로 읽을 만하다. 따라서 필자는 주교님들이 주창한 「쇄신과 화해」가 한국교회에 지속되는 길이 무엇인지 성찰해 보고 싶다.

 

첫째로, 작년 사순절 교황의 선언을 뒷밭침하기 위하여 국제신학위원회가 수년에 걸쳐 「기억과 화해. 교회의 과거의 잘못들」이라는 문서를 마련하였듯이, 한국주교회의도 3인으로 구성된 신학자들의 신학적 성서적 성찰을 거쳐서 「쇄신과 화해」에 대한 부속문서를 마련하고 있다니 한시 바삐 그 문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다. 이 문서나 로마교회 문서를 사용하여 신자들에게 우리 교회사에 대한 재교육이 이루어지는 일이 급선무다. 오로지 선열들의 순교사(殉敎史)에 도취되어 있는 신자들에게도, 물량적인 개선주의(凱旋主義)에 물들어 “정말 그게 잘못한 짓이냐?”고 반문하는 성직자들에게도, 역사의 구체적 사안과 그 신학적 해설을 담은 부속문서는 시급하며, 시간을 오래 끌수록 주교단 문건은 효과가 절감될 것이다.

 

둘째로, 교회에 화해와 통일의 영성이 심겨져야 하겠다. “광복 이후 분단상황의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소홀하였다”고 교회가 반성하였는데 남북의 분단이 여지껏(세계에서 유일하게) 지속되고 있으며 동서의 지역감정이 남한의 정치사회를 무섭게 파괴하고 있는만큼 교회가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할 것 같다. 화해와 용서라는 차원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받아들이게 신자들을 계도하고, 민족적 증오의 화신인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적극 나서게 지도하며, 영호남의 분열과 지역감정을 신앙인들만은 극복하도록 격려할 역량이 교회에는 있다. 지금 지리산 실상사에서는 50년대 지리산 주변에서 이념 투쟁으로 죽어간 좌우익 희생자들을 위해 100일기도가 올려지고 있고 5개종단합동으로 5월 26일에는 천도제(遷度祭)라는 화해의 의식이 준비되고 있다. 불교신자였고 비록 술자리에서 시해당했지만 박정희대통령의 추모미사를 명동에서 함께 봉헌했던 우리 주교단이 광주 망월동에 묻힌 희생자들을 위하여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동서화해의 표양이 될까?

 

셋째로, “세계 정세에 어둡던 박해시대에” 종교자유를 얻고 싶어서 외세에 힘입거나 외국의 부당한 압력에 편승한 역사를 교회는 잘못으로 뉘우쳤다. 한반도의 현시점을 개항시의 열강들의 세력판도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자존심을 모색해야 했던 국제정치적 형세와 비교하는 사학자들의 우려가 높다.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회담은 그 노파심이 현실적인 것임을 드러냈다. 한국천주교는 ‘가톨릭’이라는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주변 4강의 패권주의 사이에서 생존을 고민하는 정부와 국민에게 신앙과 국제정의에 의거한 정도(正道)를 보여주는데 이바지할 수 있겠다.

 

\또 일치의 상징인 로마교회와의 친교 속에서도, 전례나 신학교육에서도 배달겨레에게 주신 하느님의 지혜와 삶의 축제가 스며들만큼 한국교회의 고유한 얼굴을 갖추어갈만한 성숙기에 우리가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조선교회사 초기가 로마교회가 강요한 선교방법 때문에 무고한 피들로 얼룩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선교사들의 협박을 받을 정도로 신자들이 민족현실에 외면하였으며, 주일교황대사의 개입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성직자가 선도하여 신사참배를 행할 정도였으며, 해방후 분단체재를 방관하거나 전쟁억제활동을 교회가 포기한 전례는 지금 우리에게 성숙한 판단과 처신을 요구한다. 아시아 대륙과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 반만년 넘게 구원을 베풀어 오신 유불선 대종교들이나 이슬람과 진솔하게 대화하겠다는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의 자세를, 로마교회가 「주님이신 예수님」이라는 문서로 일축하였을 적에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월남교회에서마저도 반발이 있었지만 한국교회 신학자들은 유구무언이어서 “로마교회보다 더 로마답다.”는 변방주의를 보였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달가와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7,80년대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주장해온 김수환, 윤공희, 지학순, 김재덕, 두봉 주교님들의 착한 목자다운 용기와, 당시 이반디아스 교황대사나 교황청의 공문을 묵살하면서까지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묵인해온 주교단의 입장은 역사가들의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끝으로, 우리도 한국교회의 초창기로 돌아가 평신도 교회의 모습을 복원했으면 한다. 다만 평신도들을 그들의 고유한 영역인 세속(世俗)으로 돌아가게 떠밀어야 한다. 따라서 민족과 신앙을 한데 융합시키고자 노력했던 안중근, 이기당, 장규섭 등은 모범적 신도상으로 복권되어야 한다. 각종 신심회나 성령기도에 매달리고 기적과 치유를 찾아 몰려 다니면서도 하느님과 마몬 양편에서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에게는 성사집전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세속사는 자기들이 알아서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와 집단이기심에 따라서 해결하는 행태를 보이기 쉽다. 신도들이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어른답게 처신하도록 그에 걸맞는 평신도상(예: 장면, 김홍섭)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교황의 두 차례 방한이나 국제성체대회등 이벤트 중심으로 사회에 보여진 인상에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적이기는 해도 복음적은 아니다. 그러한 이벤트가 없으면 냉담자가 되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승리하시고 그리스도는 군림하시며 그리스도는 통치하신다!(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지금도 바티칸 방송국의 시그날로 울리는 이 성가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세상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만 의미가 있다. 무분별할 정도의 순교성지(殉敎聖地)의 개발이나 교구마다 열성을 쏟는 시복시성운동의 저변에 개선주의(凱旋主義)가 깔려 있다면 주교회의의 이번 문건은 의미가 반감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순교자들의 자랑스러운 후예만 있고 가슴을 치는, 박해자들의 후손은 온데간데 없는 까닭이다. 주교회의의 「쇄신과 화해」는 우리도 언젠가는 박해자요 죄인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깨우쳐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