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날숨 2001.3]

 

 

 

                                        성  염

 

“주 예수”와 “나무아미타불”


    서울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는 무슨 까닭인지 사찰에 불이 나고 불상이 훼손당하는 일이 잦았다. 벽안(碧眼)의 승려 현각(玄覺) 스님의 글에 의하면, 경찰에 붙잡힌 방화자는 놀랍게도 크리스천이었다. 방화범은 우상을 타파하라는 성령의 계시로 불을 질렀는데 뭐가 잘못이냐면서 되레 큰소리치더란다. 그런데 아랫 동네 한신대학교 김경재 교수가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거느리고 사찰을 찾아와 기독교 전체의 이름으로 정중한 사과를 드렸고 덕분에 스님들의 노기가 갈아앉더라는 얘기였다. 그때부터 성탄절이면 화계사에서 한신대 정문에 성탄축하의 플랭카드를 내걸었고, 사월 초파일이면 한신대 학생회의 이름으로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같은 자리에 걸린다. 화계사 입구에 있는 한신대 운동장은 초파일 불자들에게 주차장으로 개방된다. 그 무렵부터 두 종교 사이에는 부처님과 예수님의 탄일을 서로 경축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생겨나 세인들을 흐뭇하게 해 준다. 교황청도 부처님 탄일과 이슬람의 라마단에 해마다 경축 메시지를 보낸다.

 

   한국에서 수녀들과 비구니들과 원불교정녀들이 꾸민 삼소회는 널리 사랑받는 합창단으로 배달겨레의 종교적 관용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불교 명승지의 입장권도 수녀들이나 로만칼러를 한 성직자에게는 무료다. 성당에 스님이 초빙되어 설법을 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주 예수!”라는 신앙고백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고백이 사이좋게 발설되는 정경이리라. 시국사건이 생길 적마다 7대종단 대표들이 연서하여 성명서를 내는 일은 국민에게 낯익다.

 

   만약 가톨릭이 지금 와서 국내의 타종교와 그래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1960년대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구원의 문을 조금은 넓혀놓은 덕택으로 여겨진다. 공의회는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고 선언했다. 타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야 우리가 자기네한테 구원을 못 준다고 했다가 준다고 했다가 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이 김선달 대동강물 팔아먹은 고사를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13세기부터 스페인 등지에서 이슬람과 유대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화형에 처하던 교회의 서슬에 비하면 엄청난 유화정책이겠다.

 

  “교회 밖에 구원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고약한 명제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근자(1990년)에 재해석을 내놓았다. “구원의 보편성이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구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계시를 알거나 받아들이거나 교회에 들어올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방해하기도 하고, 또는 흔히들 다른 종교의 전통 안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능하다.”(교회의 선교사명, 10항).

 

   따라서 가톨릭의 플로렌스 공의회(1441년)가 발표하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교도권으로 재가한 교령은 지금 와서는 지성인이 아니더라도 누가 읽어도 낯이 뜨거워진다.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교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즉 이교인뿐만 아니라 유다인도, 이단자도, 열교자들도, 만일 이들이 죽기 전에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영원한 불에 빠지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선포하는 바이다.”(DS 1351)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마르틴 루터의 주장 가운데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는 것은 성령의 뜻에 위배되는 짓이다.”(DS 1483)라는 명제와 “터키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 죄악을 찾아보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터키인들과 전쟁을 걸어서는 안된다.”(DS 1484)라는 명제가 교황 레오 10세의 칙서(1520년)에 이단 죄목으로 꼽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구 3%의 교우들이 97%의 타종교인들과 함께 사는 아시아의 교회가 이 대륙의 타종교들을 대하는 입장은 인구 100%를 그리스도인으로 가정하는(신도의 본분을 지키는 숫자는 비록 3%를 겨우 웃돌지만) 유럽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겠다. 서구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소수의 타종교를 너그럽게 대하는 ‘관용’의 문제일지 몰라도, 아시아에서는 비그리스도교 세계에서 (필리핀과 한국을 제외하면) 극소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는 ‘공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고충 속에서 그래도 타종교들과 대화하면서 평화로이 공존하려고 애쓰는 아시아의 소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유럽 교회가 “누룩은 3%로도 족하다.”라고 대꾸하면서 왜 로마제국의 순교자들처럼 목숨 바칠 각오를 하지 않느냐고 핀잔한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여하튼 바다 건너 인도네시아와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으로부터 부단히 도전을 받는 소수 그리스도인들이 전전긍긍하기 여러 해다. “칼이냐 코란이냐?”라는 표어가 아랍 세계에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서구인들이 꾸며낸 중상모략임은 역사가들이 밝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 지난 세기 이스라엘의 재건과 팔레스타인 사태, 이라크 전쟁 등을 이어오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대하는 적개심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파키스탄 카라치의 「움마트」지는 금년 1월 9일자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권의 최고지도자 무자히드 물라가 “이슬람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거나 그리스도교나 유대교를 장려하는 문서를 배포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을 아프간의 라디오샤리아트 방송을 통해서 발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인 지역에서 당하는 갈등과 도전을 두고,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가 대희년 반성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인 서구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만방자하게 소수 종교인들을 박해하였고, 중세에 행한 가톨릭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십자군의 패악과 주민 학살처럼, 또 종교개혁과 그에 수반한 300년 종교 전쟁처럼 극히 잔학하게 불의와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또 근대와 현대 중남미의 역사는 같은 가톨릭신자들이면서도 이념과 계층에 따라서 가톨릭신자인 상대방에게 엄청난 폭력과 학살을 자행해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코 1,15)라는 말 마디가 나자렛 사람의 근본 메시지였다지만, 신대륙 발견과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 이래로 가톨릭교회가 아시아의 타종교들을 대하는 자세는 상당한 변천을 겪었다. 스리랑카의 예수회 신학자 피어리스(Aloysius Pieris)는 그의 저서 「아시아 해방신학」(성염 역, 분도출판사 1988)에서 근현대에 가톨릭교회가 타종교들을 대하는 자세가 변천해 온 과정을 살펴 정복론(征服論), 적응론(適應論), 완성론(完成論), 그리고 성사론(聖事論)으로 도식화하였다

 

   '정복론'에 입각하면 타종교는 그리스도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미신 체계이고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반(反)그리스도 세력이므로 억지로라도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왕권(王權) 밑에 탈취해내야 한다. '적응론'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인도와 중국의 고등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접하고서 바꾼 태도로서, 유교, 도교, 불교 같은 아시아의 대종교들을 ‘반(反)그리스도적’이라고 단죄하기는 그래서 '비(非)그리스도' 종교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표현이나 용어, 교회 전례 등을 그 문화와 종교에 적응해 보려는 입장이었다. 지금도 토착화(土着化)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 노선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마태오 리치 등의 예수회원들이 취한 이 정책은 도미니코회의 격렬한 반격을 받아 좌절되었고 그 탓으로 중국의 복음화 기회를 영구히 상실하였으며 조선에서는 2만 여명에 가까운 애꿎은(?) 순교자를 냈다. 이 점은 작년에 로마 교회와 한국 교회가 역사적 과오라고 인정하였다.

 

   '완성론'에서 보는 힌두교, 도교, 유교, 불교, 이슬람은 메시아 같은 존재를 기다리는 중이요, 성령이 그들 안에 활동하면서 그리스도교가 도래하도록 닦아 놓은 길로 간주된다. 그야말로  '전(前)그리스도' 종교요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 역할을 한다는 해석이다. 덕분에 1980년대 독일 신학자 칼 라너 이래로 인도의 간디도 한국의 청담 스님도 티벳의 달라이 라마도 가톨릭교회로부터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대접(?)받았다. 우리가 법정 스님을 찾아가서 "스님은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올시다. 스님에게도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할라 치면, "말씀이라도 고맙소이다만 제가 찾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해탈이올시다."라는 공손한 대답이 고작이겠지만, 이런 어법이 우리끼리 주고받는 대내 발언이고 우리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광기 어린 구호를 청산하고 하느님 대전에서 타종교인들을 공대하는 언사라는 점에서 본다면 일리가 없지는 않다.

 

   '성사론'이란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통로요 하느님 나라의 성사라면서, 교회는 유불교와 힌두교, 이슬람이 발견하여 쌓아 올린 거룩한 가치들을 그 종교 내에서 신장 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천명한다. 그런데 이 입장 역시 '그리스도교가 일방적으로 제종교에 성사가 되어 준다'는 말에서 그친다. 그러자 1998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는 이 성사론을 쌍방적인 것으로 정립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곧 그리스도교만 타종교들에 성사가 되어주는 게 아니라, 타종교들도 그리스도교에 성사가 되어준다는 이념을 표방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아시아의 대종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성사적 체현이라는 이 시각은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용에 있어서 현재까지 가장 발전된 이론이겠다.

 

   각각의 주교회의를 한데 묶어 만든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는 그보다 한 해 전(1997년)「오늘날 아시아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라는 문서를 내어 놓고서 “오늘날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모습에서, 아시아 대륙의 수천 년 역사 동안 우리 선조들에게 친숙하였던 그 힘을 알아본다.”고 선언한다. 단 아시아에서 이루시는 성령의 이 힘을 알아보는 작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백성들의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 대화는 또한 우리가 어쩌면 미쳐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를 우리들 자신의 신앙의 보화들까지도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는 성사론적 희망을 담고 있었다.

 

   이 문서에서 아시아교회는 명시적으로 선언하였다: “우리는 힌두교 역사를 거룩한 역사, 곧 성령께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하느님의 깊은 신비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 인도하시는 역사로 읽을 수 있다..., 붓다의 통찰력과 경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경험한 성령의 활동이 아니었겠는가?... 유교와 도교 이 두 철학은 우주 안에, 특히 인류와 그 역사 속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반영하고 있다.... 우주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고자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모슬렘의 삶에 성령의 비할 데 없는 열매가 맺어지도록 이슬람교에서도 활동하신다.”

 

   더구나 종교간의 대화가 '선교를 위한 전략'이라는 속임수가 되지 않도록 아시아 주교들은 조심하였다. “대화는 성령의 활동이다. 대화는 우리를 상호 이해와 존중과 풍요로 이끌어준다. 선포의 길을 닦으려고 대화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분의 광채를 관상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이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재조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아시아 주교들은 아시아인들이 이해할만한 그리스도상을 찾는 일이 급선무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신약성서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서로 다름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모두 특정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배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한 접근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곧 그분의 삶, 설교, 죽음과 부활이 하느님의 성령의 영향으로 이루졌다고 본다. 아시아 역사의 현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이러한 성령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의 전통과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롭게 접목시키는데 매우 중요하다.”


“요나는 누구에게나 있다”


   가톨릭 사상가 한스 큉은 새 천년대의「세계윤리구상」(안명옥 역, 분도출판사, 2001)을 하면서 세계의 대종교들이 관용 속에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대중적으로 정치, 경제, 과학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만이 인류가 공멸하지 않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인류의 공존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러한 태도는 “진리에 관한 한 아무도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자세로 우리 이웃 곧 타종교를 신봉하는 이들과 더불어, 하느님이 창조계와 각각의 종교적 철학적 예지 속에 펼쳐 놓고 계시하신 진리를 탐색하겠다는 겸허함을 전제한다. "진리를 방어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진리가 발견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진리에 봉사하는 것이 의무"라는 종교적 사명감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시아교회의 저러한 식별작업에 대해서 바티칸이 작년에「주님이신 예수님」이라는 선언을 내어 놓고 “종교상대주의로 특징되는 신앙무차별주의“라는 의혹을 씌웠다는 사실이다. 교황청의 이 문서에 한국 교계에서는 색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교황청 내부에서는 물론 인도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와 심지어 월남의 가톨릭 신학자들의  반발은 대단하였다.  하지만 바티칸의 이 문서는 오히려 아시아 교회가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관용을 얼마나 훌륭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냈다는 것이 학계의 평이다.

 

   바티칸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계시된 진리의 은총”이고” 타종교들의 믿음은 인간이 진리를 찾는  '인간적 보화' 혹은 단순히 '인간적인 종교 경험'일 따름이라고 못박아 버렸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관용의 덕을 발휘하여 대화는 갖지만 타종교들은 ”하느님께 대한 동의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거나 “중대한 결핍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독일인 신학자는 “요나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꼬집은 적 있다. 여지껏 “교회 밖에 구원 없다!”고 호언하는 인사들은 이교도들이 회개하여 행여 구원 받을까 심술이 동하여 차라리 고래 뱃속으로 삼켜 들어갈지언정 니느웨로 가서 설교하기는 싫다는 심뽀를 품고 있지 않느냐는 힐문이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이론적으로는 청산되었으나 구원의 길과 수단을 그리스도교가 독점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여전히 교계와 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열쇠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 나자렛 사람이 갈릴래아의 어부에게 주었다는 쇠붙이가 서양어로는 한결같이 닫아 거는 '잠을쇠'(clavis, chiave, clef, key, Schoussel)이지만 우리말로는 고맙게도 '열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마따나 하느님의 나라라는 "진리의 보화는 (만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성염(成稔) /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로마 교황립 살레시안대학에서 라틴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를 거쳐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교양」 「참된 종교」 「자유의지론」등을 번역 주해하였고 「신국론」을 번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