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994.1]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신앙인들

 

 

신창원을 잡아서 물난리

     홍수에 잠긴 연천과 문산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고 있던 여덟 살배기 진호가 난데없이 불쑥 한 마디 한다. "아저씨, 신창원 잡아서 물난리가 났지요?" 지리산 백무동 가까운 산골에서 자라난 초등학생에게 무슨 근거로 "신출귀몰 탈옥수" 신창원과 경기북부 대홍수를 결부시키는지를 묻자 "그냥요!"라는 답변이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왔다. 큰비에 피해 없느냐는 안부 전화에 팔순이 가까운 어느 할머니의 대답에는 더욱 아연하였다: "이북 놈들한테 쌀 갖다 주어서 창고들 텅텅 비워놓으니까 큰물이 났지 뭐야. 우리나라 쌀 다섯 창고치를 다 줘버려서 다섯 창고밖에 안 남았는데 그나마도 다 젖어서 우린 죄다 굶어 죽게 됐다더라."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넘어 장사까지 치른 라자로를 되살려 동굴무덤에서 불러내신 기적은 삽시간에 유다 지방에 쫙 퍼졌다. 이 엄청난 소문이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들의 귀에 들어가자 예루살렘에서는 즉각 최고의회가 소집된다. "이 사람이 많은 이적을 행하고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터전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낸 기적이 의회 원로들에게 나자렛사람 예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아보게 만들기는커녕,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해괴한 결론을 끌어낸다. 최고의회 의장을 겸하던 대제관 가야파의 발언은 더 기막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서 죽고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이롭다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는군요." 다른 죄가 없더라도 국가안보를 위해서 예수는 죽어 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요한 복음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맺는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자는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요한 11,45-57) 신고 않는 자는 불고지죄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대제관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린 예수의 행위에 당대의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사형을 결정한 사람들은, 경기북부 대홍수와 신창원을 결부시킨 여덟 살배기 산골소년도 아니고, 이북식량원조가 물난리를 가져왔다고 우기는 팔순 노파가 아니었다. 날마다 성경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성직자 대제관들이요 오로지 하느님 계명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평신도 지도자 바리사이들이었다. 그들마저 국가안보라는 허구에 눈이 어두워지자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잡아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의 운명과 국가보안법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심정적으로 국가보안법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구세주로 받드는 분이 당대에 국가보안을 명분으로 사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내세우는 법률이 나오면 일단 주님의 억울하고 무죄한 죽음을 떠올리면서 또다시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을까 의구의 시선을 돌린다.

따라서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말은 천주교신자에게 아무 설득력이 없다. "서양 오랑캐들이 들여온 삿된 가르침을 신봉하지 말라!" 는 국법과 왕명을 어기고 천주교를 믿다가 목숨을 잃은 3만 명의 순교선열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처음 한 세기 동안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고 불렸다. 실정법과 양심법의 대립에서 실정법을 무시하고 양심을 지켜 온 것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이다. 지난 7월 12일 결성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천주교연대모임>을 주축으로 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국가보안법 폐지에 발벗고 나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불법한 입법자가 불법하게 만든 법률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1980년 12월 31일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관이 이전의 국가보안법을 손질하여 만든 법으로, 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씨가 그해 5월 18일 쿠데타로 헌법을 파괴한 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를 대행시킨 위헌기관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97년 반란 및 내란목적 살인을 저지른 집단으로 역사적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반란집단의 꼭두각시 입법기관이 만든 이 법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5·18 군사반란을 편드는 짓이고, 무고한 광주시민들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하겠습니다."라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신앙인들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고 한다.

둘째로,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고 현대 유람선이 금강산을 오가며 남한이 북한에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어주고 식량원조를 보내는 마당에,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거나 극구 반대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은 없다. 천주교 안에도 북한선교회니 레지오 마리애니 푸른군단이니 다락방이니 하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단체도 많다.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도 러시아가 회개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이었고, 그 기도대로 러시아 스스로 현실사회주의를 포기하였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전세계가 합법적 국가로 인정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반국가단체라고 단정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과 교류를 범죄시하고 있다. 북한을 붉은 악마 같은 반국가단체라고 욕하고 증오하면서 북한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그들과 화해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얼마나 신앙에 어긋나는지 신자들은 잘 알고 있다.

셋째로, 38선의 분단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본분이다. 헌법(제 4조)에도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기해 놓았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무력과 전쟁에 의한 북진통일 이외에 다른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등 남북한 정부의 모든 외교문서는 평화적 통일방안을 추진하면서, 국민에게는 적화통일이나 북진통일 가운데 하나가 이루어질 것처럼 오도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목표는 마치 적화통일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국민에게서 통일에의 의지를 꺾어 버리고 희망을 좌초시키는 데에 있지 않나 의심받는다. 평화의 사도로서 전쟁을 증오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력으로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이 법률이 남북의 분단을 영속화하는 법제임을 간파하기 때문에, 이 법률 폐지에 앞장선다. 한반도라는 공간은 범죄의 공간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구원의 공간이 된다. 남북분단을 영구화할 만큼 분열을 조장하고, 공산주의자라면 모조리 섬멸하겠다는 증오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고 악마에게서 오는 까닭이다.

넷째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는 형벌 법규는 구체적이고 명백해야 한다. 명료하지 아니한 것은 용도가 의심스러운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을 말한다"고만 규정할 뿐, 정부참칭이나 국가변란이 무엇이고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7조에서 "반국가단체와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자"를 처벌하는데, 찬양 고무 동조의 개념 역시 지극히 애매모호하여 아무에게나 씌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실제로 지난 세월 이 법으로 남파간첩이나 공산당원을 붙잡아서 처벌한 실적은 극히 미미하다. 북한으로부터 파송된 간첩도 아니고, 더구나 본인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생존권을 외치는 노동자들,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학생들, 쿠데타와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지식인들과 성직자들을 군사정권이 국가보안법에 걸어 처벌해 왔다. 올곧은 양심을 간직한 사람은, 지난 세월 남한에서 행사된 국가보안법이란 권력과 금력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내 주먹에 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조작한 법적 장치라고 의심한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엄연히 남침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빨갱이들이 38선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데 이 법률을 폐지하여 어쩌자는 말이냐?" "북한에도 사회안전법이 있지 않느냐?"라는 반문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온다면 너무나 어리석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5,20)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겠지만, 신앙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한다. 종교가 말살되었다는 북한과 크리스천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고 자랑하는 남한은,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먼저 용서하고, 누가 가난한 약자를 더 돌보느냐로 우열을 가려야지, 누가 더 악질적이냐로 승부를 걸어서는 안 된다. "공산당들은 제 부모도 당에 고발하는 패륜아란다."고 가르치는 대한민국에 남편이나 부모, 스승과 친구를 빨갱이로 고발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처벌하는 반인륜 법률이 있다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 가는 길이다. 그리스도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가는 길이다"(인간의 구원자, 14항)고 하였다. 어느 법률이 인간을 유린한다면, 특히 사회의 약자들이나 그 약자들을 편드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투옥하고 죽인다면 신앙인은 순교자 후예다운 기개로 이런 악법에 저항한다.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걸어야 하는 길은 '인간'을 살리고 구하는 길이지 공산주의나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길이 아니다. 한반도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관심사는 반공이 아니라 한겨레의 구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자본주의든 집단주의든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고 촉진되는 한에서는, 교회가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며 "교회의 사회교리는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양편에 다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사회적 관심, 21항)고 하였다.

현 교황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나누어진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사회적 관심, 36항)고 선언한 바 있다. "나는 우익이다, 너는 좌익이다."하는 말이 신앙인의 입에서 나온다면, 자기가 죄스러운 이데올로기 구조에 예속되어 있다는 자백이다.

신앙인은 적어도 남한에서 전개된 해방 후의 역사는 우익의 전횡으로 저질러온 죄악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통탄한다. 지난 40년간 남한에서 위협 당하고 핍박당하고 집단으로 학살당한 자들은 좌익이거나 좌익으로 몰린 동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 이 민족적 죄상을 짊어질 각오가 선 사람만 우익을 자처할 용기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자유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사이에서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앞에서 이 땅의 힘없는 사람들을 편들어 내리는 결단이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할 적에는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자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신앙인은 반세기 동안 이 땅을 분열시켜 온 좌우익 논리가 민족 번영을 찾는 화해와 통일 논리로 바뀌도록 노력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는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 반란자로서 처형을 당하였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두 세력, 즉 외세였던 로마 제국과 그 외세와 결탁하여 사회적·경제적·종교적 기득권을 향유하던 대제관과 바리사이파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성경에서 읽은 신앙인들은, 예수가 무죄함을 알고서도 유대인 정치권의 압력에 못 이겨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면서 "나는 이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소.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대답하여 "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감당할 것입니다."하였다는 말도 기억한다(마태 27,24-25). 그들의 장담은 30년도 못 되어 로마군인의 예루살렘 함락과 전시민의 학살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해방 후에 이남에서만도 제주4·3 사태, 여순사태, 대구사태로 이어지는 엄청난 동족 학살, 저 무죄한 죽음들의 피값이 6·25라는 전쟁의 참화로 온 민족의 머리 위에 쏟아졌으리라는 종교적 해석을 한다. 신앙인은 '북괴 김일성의 남침'이니 '미국의 핵무기'니 하는 것 말고도 하느님도 계심을 믿고 심판하시는 그분의 손길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마몬의 가면을 벗기자

민족화해와 북한선교를 염원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필히 갖추어야 할 통일영성(統一靈性)이 있다면 국가보안법의 뿌리가 되는, 증오에 찬 반공(反共)을 극복함이리라. 그 이유는 반공이 자칫하면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느님보다 앞세운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공산주의자들을 무신론자라고, 종교자유를 안 준다고, 사유재산과 자유를 빼앗는다고 증오하고 그래서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는 신도가 있다면, 그 본심이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을 안전하게 보전하려는 욕심, 못 가진 자들과 약자들로부터 기득권을 보호하는 폭력에 있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내 주먹에 쥔 것은 죽어도 내놓지 않겠다"는 마음씨를 이름 붙여 예수는 '마몬'이라고 부르셨다. 주먹에 쥔 것 나눠 먹으라고 말해 오는 자라면 그가 노동자든 학생이든 지식인과 심지어 신부, 주교든 상관없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욕해 온 사람들, 저 사람들이 붙잡혀 들어가고 퇴학당하거나 해직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어갈 때에 속시원해하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기보다는 마몬이라는 재물의 귀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이다.

주님은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박았지만 우리는 "마몬을 마소로 길들여서 그 위에 하느님을 태워가자. 하느님과 돈이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더라."는 생각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현자(L. P. Smith)의 말대로 "하느님과 마몬 양쪽 다 섬기기 시작한 사람은 머지 않아 하느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한반도 반세기 동안 마몬이 남한 사회에 뒤집어 씌운 국가보안법이라는 귀신탈을 벗어 던져야겠다. 인류 역사상 국가보안법 최초 희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공동선 19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