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994.7]

 

민족증오의 참호에서 나와 대화를 시작할 때

 

 

바람개비 언론들과 신앙인들의 귀

     초미의 현안 문제인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 그것을 구실로 현 정권과 보수 언론들이 몇 주 전처럼 "북한 폭격이다, 경제 제재다, 북한이 우발적인 도발을 할 것이다, 전쟁을 각오하라, 전쟁하라!"라고 목청을 높여 갈 때, 2백만 천주교 신자들은 사태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을까? 관제 언론들이 "전쟁이다! 전쟁이다!" 떠들어도 하도 오래 속아 온 국민들이 시큰둥하자, 내각은 국민의 "안보 불감증"을 꾸짖었고 그것도 안 통하자 반상회를 통해서 "적어도 보름 먹을 식량은 사재기하라!"는 선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때, 서울 강남 여교우들은 식품 사재기, 달러 바꾸기, 서울 탈출 예행 연습말고 무엇을 했을까? 김대중 씨의 제언대로 "카터의 미소"가 평양으로 파견되자 청와대와 민자당이 모처럼의 전쟁 호기를 놓쳐 서운하다는 투로 "북한에게 이용당할 텐데 누구 좋으라고 가느냐?" "가 봤자 별볼일 없을 것이다." 하며 비아냥거리던 며칠 동안, 통일을 염원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카터의 주머니에서 뜻밖에도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자!"는 김일성 주석의 제안이 나오고 김영삼 대통령이 즉각 호응하자 하루아침에 북핵 문제는 다 사라졌다는듯이, 50년만의 남북 정상 회담이 마치 전쟁 불사론자들의 공로인듯이 가락을 바꾼 매스컴을 신앙인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그 동안 자기가 내려온 판단과 언행만으로도 자신이 과연 역사의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인지, 유신론으로 치장한 반공교 신도인지 웬만큼 드러나지 않았을까? 제주도 한라산에서든 백두산 천지에서든 이번에는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만날 것 같다. 여태까지 남북 협상이나 합의가 양편의 흔들리는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국민을 속여 온 깜짝 쇼들이었지만 다시 한번 믿어주고 싶다.

신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필자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고 민족이 진정 하나되는 터전을 마련하려면, 신앙인들이 나서서 남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다음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1. 영남주의(嶺南主義)

지난 30년 동안 남한의 요직을 대부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 문화와 교통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려 온 영남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영남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지 않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민족 통일에 파국적인 장애가 될 이데올로기이다. 기득권을 청산하거나 적어도 모든 분야의 혜택을 남한에서 골고루, 남북한이 골고루 분점하려는 의사 없이는 진정한 통일도 없다. 남북 예멘은 두 기득권 집단을 살리는 조건 하에서, 그들을 주축으로 통일을 이루어냈지만, 한 집단의 이익이 위험에 처해지자 민족도 국가도 저버리고 또 다시 전쟁과 분단으로 치달았다. 5.16 쿠데타로 시작된 우리의 암울한 역사가 증명하듯이, 한 지역이나 집단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려는 집단 패권주의는 민족의 안위와 복지와 동질성보다 집단 이익을 앞세운다.

어느 종교든 가진 것을 나누고 타인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겠지만, 지난 30년 동안 자행되어 온 이 땅의 편파주의를 극복하는 데 한국 천주교는 중요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 신도들이 정계와 군부와 재계에 두루 자리잡고 있는 만큼, 그들이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남한 사회에서는 물론 북한을 상대로도 진정한 나눔을 시행한다면 통일의 심리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2. 반민족주의(反民族主義)

독일인들이 통일을 성취한 저력은 아리안 민족주의에 있다. 독일 통일 이후 온갖 경제·사회의 어려움에도 무난하게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도 이 힘 덕분이다. 그러나 남한은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권력을 장악해 외세에 편승한 반공 이데올로기(북한에서는 친일파는 청산되었다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를 압도하였다. 핏줄과 언어와 얼굴이 같은 민족임에도 "저자들은 빨갱이니까 무조건 죽여라!" "반동분자이니까 죽여라!" 하는 점령군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로부터 시작하여, 지리산, 대구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이 학살을 역사적으로 정당화 시키고 말았다.

지난 30년 동안 남북한은 교육과 홍보를 통해 국민들에게 극도의 증오를 심어 왔는데, 그 같은 증오를 토대로 무슨 염치로 통일을 입에 올리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그리고 남한에서 역대 정권이 자행하는 저 "증오 교육"에 천주교가 일체 함구한 일이나, 정치·언론·교육을 맡은 신자들이 그 증오를 증폭시키는 활동에 앞장서기까지 했음은 통탄할 일이다. 정치가들이 무력 공격을 외치고 경제 제재를 내세우는 시점일수록, 우리 신앙인들은 화해를 내세우고 대화를 주장해야겠다.

3. 준비주의(準備主義)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이른바 문화 정책이라는 것을 썼다. 총독부는 조금이라도 민족주의 색채가 보이는 지식인들을 독립군 세력으로부터 차단하려고 "조선은 아직 독립할 준비가 안되었으니 차츰 단계적으로 준비를 시키라"고 유인하였다.

아직도 친일파의 논리 구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한국에서 보수 언론들이 앞장서서 "급작스런 통일은 대혼란을 조성한다. 아직 통일은 안된다. 예멘을 보라"고 홍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갖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미·소의 대결 속에서도 드디어 해냈다!"는 통일 독일인들의 자부심을 듣고 본 이들은, 통일 준비론이 결국 "통일은 안된다! 통일은 절대 싫다!"는 고함임을 직감한다. 기다리는 통일은 없다! 준비 다 된 통일은 없다! 하지만 남북한 기득권자들의 밀약과 합의에 의한 통일과, 민족의 결단에 의한 통일은 사뭇 다를 것이다.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값싼 노동력이 몰고 올 경제 이익을 위한 통일과, 민족의 동일성에 근거한 통일은 사뭇 다를 것이다.

통일전망대를 찾아가 기도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통일 의식이 예리고성을 맴도는 히브리인들의 행렬 그대로라면 한심한 일이다. 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 성모님의 기적으로, 미국의 폭격으로, 주변 국가들의 경제 제재 조처로 38선과 북한 체제는 저절로 무너지리라는 믿음이다. 그 다음은?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쳐 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 버렸다. 그리고 성에 불을 질러 그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여호수아 6, 20∼21. 24). 통일은 하느님 모상들에 대한 대학살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느님의 섭리와 배달겨레의 사랑이 이루어내는 축복이어야 한다.

[ 공동선 199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