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2005.4]

[바티칸에서 온 편지]                                                                  

 

 

교황청의 수수께끼

 

 

말라키아 수사의 예언

 

     84세의 노교황께서 제멜리 병원을 드나들면서 유럽에는 「말라키아 수사의 예언」이라는 문서가 다시 나돌고 있다. 1595년에 아놀드 드 비용이라는 분도회 수사가 베니스에서 발간한 「생명의 나무」라는 책에 “역대 교황들에 관한 예언”이라는 제목으로 처음으로 수록된 명단에는 1143년에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2세부터 시작해서 111명의 교황이 노스트라다무스 예언과 비슷하게 두 세 개의 라틴어 단어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문구로 열거되어 있다. 12세기의 아일란드 출신 말라키아 주교(1094-1148)가 남겼다는 문서다.

 

말라키아는 아일란드 콘노르 교구의 주교였고(1124), 8년뒤 아일란드 수석주교가 되어 교회개혁에 앞장섰으나 얼마 뒤 주교직을 내놓고 유럽을 한 바퀴 돌아 로마에 체류하다 죽었는데 1190년에 클레멘스 3세 교황이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생전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과 우정이 돈독하여 성인 말라기아의 전기를 최초로 집필한 사람도 성베르나르도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글귀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해석할 만한 이 명단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최근 교황들을 꼽는다면 요한 23세(1958-63)는 ‘목자요 사공’(그는 베니스 총대주교였다가 교황으로 피선되었는데 베니스는 물의 도시이므로 그곳 총대주교에게는 ‘사공’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왔음), 바오로 6세는 ‘꽃 중의 꽃’(몬티니 가문의 문장에는 백합이 그려져 있었음)이라고 나와 있다. 요한 바오로 1세에게는 ‘달포쯤’(겨우 33일간 교황좌에 있었음), 요한 바오로 2세에게는 ‘태양의 산고에서’(태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뜻인데 유럽에서 보면 폴란드도 동쪽에 해당함)라는 문구가 붙어 있고, 그 다음 교황 '올리브의 영광‘과 111번째로 나올 교황 ‘로마인 베드로’에서 명단은 끝난다.

 

명단의 마지막 인물에게 말라키아는 다음과 같은 싯귀를 첨가하고 있다. “로마 교회에 대한 마지막 박해 중에 로마인 베드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많은 환난 속에 양들을 치리라. 그 때가 지나면 일곱 언덕 위의 도성은 파괴되고 두려운 심판자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아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1527년에 베니스에서 출판된, ‘파도바의 수사’라는 익명의 작가가 남긴 「교회의 대환난과 처지」라는 책까지 곁들여 읽으면서 소름을 돋우고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인간이 달에 오를 무렵이면 거창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고 사람들이 추한 노파를 버리듯이 로마는 버림을 받으리라. 콜로세움에는 오염된 돌무더기 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글귀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꿈’

 

교황이 다시 입원한 제멜리 병원 북쪽 담벼락에는 세계 유수 통신사들의 특파원들이 중계차와 텐트에서 죽치고 밤샘을 하면서 며칠째 특종을 기다리고 있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라는 소설에 나오는 야단법석 그대로지만 로마와 바티칸이 여전히 세계의 관심을 받는 도성이며 교황은 여전히 인류가 쳐다보는 정신지도자임을 실감케 한다.

 

그러면서도 바티칸 박물관의 어마어마한 예술적 치장, 세계 최대의 베드로 대성당, 갈릴래아 어부 출신이면서도 50년 전까지만 해도 연을 타고 삼중관을 쓰던 황제의 복식, 지금도 대성전과 광장과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군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교황의 모습에서 정신적 서글픔을 맛보는 지성인들도 없지는 않다. 베르니니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을 바라보면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는 비극을 떠올리고, 대성당에 들어오는 수 만 명 관광객 중 극소수만이 성체경당에 들려 기도하는 광경도 안타깝다.

 

오래 전부터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 누르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적마다 필자는 청년시절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꿈’이라는 글에서 위안을 얻었다. “거룩한 액체가 담겨 있다는 커다란 그릇이 있다. 그릇의 거죽에는 온갖 때와 오물이 더덕더덕 묻어 있다. 무수한 인간들이 그릇 앞에 엎드려 절하고 있다. 그 짓을 우상숭배라고 분개한 사람이 나서서 도끼로 그릇을 깨뜨려버린다. 그러자 거룩한 액체는 삽시간에 땅속으로 스며들고 만다.” 교황청의 봉건적 통치형태나 그 역사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원의 성사가 가톨릭교회와 교계제도에 간직되어 인류에게 전수되고 있음은 부인 못한다.

 

인간은 시간적 공간적 존재이고 교회는 그 사회적 산물이다. 또 스무 세기 넘게 단일하게 계승된 교황직이 지금도 11억 가톨릭 신자들과 3000여개의 교구를 한 조직으로 유지하고 통솔하는 교황청은 인류사의 대단한 경이임에 틀림없다. 오래고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얻은 제도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칙령으로 종교자유를 얻고 심지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지만 그 특전은 자칫 가톨릭이 ‘황제교회’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는데 서로마 제국의 때 이른 멸망으로 위기를 면하였다. 중세에는 교회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과 지루한 서임권(주교를 임명할 권리) 논쟁을 하면서 ‘국가교회’로 전락할 위험을 벗어났다. 이탈리아 통일로 교황령을 빼앗긴 것은 행운이었지만 라테란 조약으로 바티칸이라는 손바닥만한 땅에서나마 독립된 주권을 확보함으로써 전 세계를 향하여 도덕적 발언을 지속하는 현실적 권위를 장악하고 지역교회들을 보호하고 인류에게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선양하는 장치가 마련된 것은 섭리적이다. 전 세계 175개 국가가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맺고 한국을 위시한 72개 국가가 상주 대사관을 교황청에 설치하고 있는 국제정치의 판도를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필리프 반덴베르크와 댄 브라운의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읽히든 성말라키아의 예언이 어떻든 파티마 성모님의 세 번째 메시지가 뭐라고 소문나든 상관 않고 지금도 미사 때마다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생각하시어 교황 요한 바오로와 우리 주교와 모든 성직자와 더불어 사랑의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그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