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2005.1 ]

[바티칸에서 온 편지]                                                     

 

한 여자를 쏙 빼 닮은 하느님

 

교황의 인본주의

 

     지난 2004년 11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폴란드 토룬의 니콜로 코페르니코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수여 명분은 신앙과 이성의 훌륭한 조화 속에 인류에게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가르친 사상적 공로였다. 필자도 1978년에 교황에 오르기 전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시절의 저서 「반대 받는 표적」(1978: 바오로딸) 을 번역하면서 그의 깊은 인본사상에 심취한 바 있지만, 교황이 되어 자기의 근본사상과 사목신학을 담은 첫 문서(1979) 「인간의 구원자」(성염 역, 1981 CCK)에서 그는 이 사상을 유감없이 펼쳤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달리는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10항]고 선언하면서, “인간이야말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할 첫째가는 길이며,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 가는 길”[14항]이라는 인간학을 평생 동안 개진하였다.

 

정말 교황청 가까이 있으면서 필자가 듣고 배우는 바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고 인간으로서 그 역사의 배역이 되셨다”[위문서 1항]는 자긍심이다. 우리가 1월 1일 새해마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거창한 칭호를 한 여자에게 붙이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이 자존심을 내세우는 까닭을 피부로 체험한다. '하느님의 어머니‘(그리스어 theotokos, 라틴어 sancta Dei genitrix)라는, 가톨릭교회의 두 마디 단어에는 인류가 하느님 앞에 내세우는 자존심, 인류가 배어 낳고 키운 하느님, 하느님을 아기로 만들어 팔에 안고 있는 인류, 하느님을 빚어내고 탄생시킨 인류의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금쪽같은 내 새끼」

 

독자가 이 얘기를 좀 더 실감하고 싶다면, 무신론 실존주의자라고 일컫는 사르트르가 2차대전중(1940년) 전쟁포로로 이탈리아 트레비 수용소에서 쓴 글이 있다.

 

“하느님을 자기 살에서 나온 살, 자기 몸에서 나온 소생으로 안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군가? 태중에 품고 다니던 아홉 달 동안, 그녀의 가슴에서 나온 젖이 하느님의 피가 되고 살이 되던 젖먹이 동안, 그리고 열세 살이 되도록 먹이고 씻기고 어르고 안아주던 소년시절... 과연 어느 인간, 더구나 어느 여인이 이토록 하느님을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 감히 자기 창조주더러 “내 아들아”(어느 TV 연속극의 제목 그대로다)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피조물! 그래서 한 처녀엄마의 팔에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아진 하느님, 엄마에게 뽀뽀를 받으면 거룩한 얼굴이 온통 가려지고 숨이 막히는 하느님, 손으로 만져지고 품에 안기고 따스한 체온으로 새근새근 잠들고 방긋방긋 웃곤 하는 하느님.

 

‘이게 하느님이고, 이 하느님이 내 아들이라니! 이 보드랍고도 신성한 살집이 나한테서 나왔다니! 아기 눈이 내 눈을 닮았고 아기 입매무시가 영락 내 입을 쏙 빼 닮고... 세상에, 나를 닮았어. 하느님이 나를 닮았어.’“

한 어머니의 눈에 비친 하느님의 저 오달진 사랑, 무신론자의 저 인간 경탄을 일컬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존중하지 않는 대상은 유린 한다

 

과연 죄 많은 인류가 이토록 엄청난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인류를 지긋이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애정 어린 눈길을 너무도 잘 익혔기 때문이리라.

 

성서에도 하느님의 이 눈길을 표현하는 구절이 무수하다. 일찍이 창조의 벽두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라고 흥겨워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다. 또 예언자 이사야의 경탄이 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너 대신 다른 사람들을 내놓고 네 생명 대신 민족들을 내놓는다.”(이사 43,4) 시편작가의 저 감사에 찬 탄복은 우리의 심금 그대로다. “인간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기억해주시다니! 사람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돌보아주시다니!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시편 8,5-6)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느님이 우리한테 얼마나 매이시고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삼위일체론 10,13) 너무도 놀라워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매이지 않던가? 캘커타의 굶어죽는 빈민들을 무릎에 안고 그 눈을 감겨주면서 “여기 보세요. 이 사람들의 눈이 얼마나 예쁜지 아세요?” 하던 마더 데레사의 한탄이 있다.

 

어느 종교인이 인간을 “벌레, 먼지, 죄인”이라고 부르면서 겁주고 비하시킨다면 무슨 수로 인간존엄성을 살리겠는가? 사실 존중하지 않는 대상은 잠시는 연민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결국 굶기고 매질하고 겁탈하고 고문하고 폭격하여 떼죽음을 시키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군복을 입고 몰려간 이라크 땅에서 인류가 지금 날마다 목격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곳을 손가락질하면서 84세의 고령으로 어둔하게 더듬거리는 목청으로 인류의 양심을 꾸짖는 노교황의 쇳소리가 바티칸 광장에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