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994.3]

 

내가 읽은 책: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

 

 

매조키즘의 희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조차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에 단 한 번 있었던 지상의 사랑이며, 그때나 이때나 그 이후에나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409쪽). 젊은 수도자 아드소의 이 탄식에서 독자들은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이라는 책 이름을 짐작할지도 모른다.

"문둥이란 일반적으로 추방의 상징이야…… 문둥이라고 할 때 우리는 추방되고, 농촌에서 근거를 잃고, 도시에서 억압받는 부랑자, 빈민, 단순한 사람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되지 …… 추방된 무리의 원상 회복은 권력을 가진 무리의 특권의 제한을 요구하기 때문에, 추방된 상태를 의식하는 추방된 무리는 교리야 어떻든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야만 되는 것이야. 성 프란치스코가 이 점을 깨닫고는 제일 먼저 문둥이들에게 가서 함께 살기로 결단을 내렸지.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런 추방된 무리를 다시 품에 받아들이지 않는 한 변모가 불가능해…… 모든 이단은 추방이라는 현실의 깃발을 내걸고 있지. 이단을 파헤쳐 보면 거긴 문둥이가 있어 ……"(206쪽). 어떤 독자들은 이 구절만으로도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교회론적, 사회학적 충격을 예감할 것이다.

"당신은 악마입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당신은 속은 겁니다. 악마는 물질의 왕자가 아닙니다. 악마란 정신의 오만, 웃음이 없는 신앙, 한번도 의심을 받지 않은 진리입니다"(478쪽). 저 견고하고도 성스러운 수도원에서 여섯 명의 수사들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호르게 신부에게 주인공 윌리암 수사가 던지는 이 마지막 말마디에서, 교회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절망으로 가슴앓이하는 이들은 신학적 비수에 찔린 듯 매조키즘의 희열에 소스라칠 것이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중세에서 새 세대를 향해 던지는 다음 한 마디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화한 모든 것에 대한 어떤 경종을 듣게 된다.

"아드소, 너는 예언자들과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해라. 이 사람들은 원래 수많은 사람을 자기네와 함께, 흔히는 자기네보다 먼저, 때로는 자기네 대신 죽게 만들기 때문이지"(491쪽).

"서기 1327년 경 유럽의 한 수도원에서는 지금부터 기록하려는 여러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한 편이 1980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자 "세계 문단에 일대 사건"(<뉴욕 타임즈>)으로 떠오르고 전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그 소설을 대상으로 문학, 철학, 미학, 역사학 계통의 연구서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학회가 생겨나고 있다면 독자들에게는 무슨 소동 같아서 좀 의아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내가 로마에서 수학하던 시절, 이탈리아 친구에게서 이 소설을 선물 받고 읽어 내려가면서 받은 충격, "금세기에 나온 가장 심원한 철학 소설이자 종교 문학"이라고 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일간지에 <장미의 이름> 또는 저자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가 오랫동안 광고에 올랐으므로 독자들에게도 책 이름쯤은 기억에 남아 있으리라고 본다. 더군다나 이 소설을, 영화 <베어>를 감독한 쟝 쟈끄 아노 감독이 영화화했고,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었다. 유럽에서는 최고의 흥행을 올린 반면 한국에서는 보름도 안 되어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은 비디오 가게에서 구해 볼 수 있다.

소설의 무대는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다. 당대에 패권을 두고 다투던 교종 요한 22세와 루이 황제는 "하인이 백오십 명에 수사는 육십 명"임을 자랑하는 이 부유한 수도원으로 사절들을 보내어 토론을 함으로써,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벌인 청빈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시도한다. 그곳에 파견된 황제편의 밀사가 프란치스코 회원이자 프라띠첼리에 속하는 버스크빌의 윌리암 수사이다.

해설을 통해 이 소설을 끌어가는 베네딕도회 수련자 아드소를 거느리고 온 윌리암 신부는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브루넬스라는 말을 찾아준 덕택으로, 비상한 관찰력과 추리력이 있는 인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바로 전날 수도원에서 수사 하나가 당한 의문의 죽음을 수사해 달라는 원장의 요청을 받는다.

사건의 발단은 한 권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2권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제2권은 유실되고 없다. 지식을 교류시키고 인류의 역사를 발달시켜 온 매개체로서의 책이 여섯 번의 살인을 초래한다. 당대 유럽 최대를 자랑하는 그곳 도서관이, 진리의 전파가 아닌 진리의 고수와 방어(거울, 약초, 미로는 독점되고 고수되는 진리의 이미지다)에 목적을 두고 구조 설계된 건물이어서, 보존 의지와 도전 의지, 14세기 사회의 두 추동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그 비극을 빚어내는 것이다.

소설에는 중세의 시대적 어둠이 흐르고 있다. 숀 코네리가 주연하는 영화의 무대도 시종일관 `밤'이다. 그 어둠에 가려진 온갖 욕망들을 이 수도원이 축약하고 있다. 수도원에는 지식에 대한 욕망(죽음을 무릅쓴 호기심), 권력에 대한 욕망(수도원장과 도서관장 직위를 겨냥한 권력 싸움, 교종권과 황제권의 패권 다툼), 재물에 대한 욕망(수도원장의 보물 설명, 청빈 논쟁, 교종의 엄청난 물욕) 그리고 색욕(살바또레, 아드소의 체험, `치프리아노의 만찬')이 판친다. 수사관은 웃음에 관한 호르게 신부의 특유한 관점을 단서로 하여 천신만고 끝에 도서관의 비밀장서 서고인 `아프리카의 끝'에 도달하여 호르게와 대결한다.


이 글에서는 박학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의 온갖 사상적 주제들을 다 털어버리고 `진리와 웃음'이라는 하나로 초점을 모으고, 나머지는 독자들의 인내로운 독서에 맡기기로 한다.

이 소설은 두 번역자에 의해서 우리말로 중역 소개되었는데, 나는 단연 이동진 씨의 번역본(<장미의 이름으로>, 1986년, 우신사 : 시중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다. (02)571-1615)을 추천하고 싶다. 이동진 씨는 신학 연구와 유럽의 외교관 생활을 통해서 이 소설의 배경과 감각을 공부하고 체험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다.


진리가 웃도록 만들라 !

"아, 이 세상에서 진리의 정체를 판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까 진리가 제아무리 애매하게 보인다 해도, 또 순전히 악에 기울어진 인간 의지와 뒤섞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진리를 밝혀 주는 징표라면 남김없이 포착해야 한다"(11쪽)는 서두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무서운 경종을 울려댄다. 우선 주인공 "윌리엄 신부는 오로지 진리에 대한 열망, 그리고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것이 진리는 아니라고 하는 의혹에 따라 움직이는"(14쪽) 인물이다.

일찌기 종교재판소의 심문관이기도 했던 윌리암 수사, "나도 시뻘겋게 단 쇠로 진리를 생산해 낼 수 있다고 믿는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이 프라띠첼로는 수덕과 청빈에 매진하는 자기 동료 수사에게 경고한다. "우베르띠노, 자네 영혼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나 악에 대한 증오에서나 늘 치열하군. 내 말은 세라핌 천사의 열성과 루치페르 사탄의 열성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걸세. 둘 다 의지가 극도로 치열하거든"(62쪽). 이 경고는 "그리스도의 적(Antichrist)은 경건 그 자체에서, 하느님 또는 진리에 대한 과도한 사랑에서 나올 수가 있다"(491쪽)는 에필로그로 이어진다.

따라서 중세에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베르나르기의 당당한 신앙고백(그의 저서에서 인용한 대목이다)이 우리를 전률케 한다. "나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단의 독사가 어디 숨어 있든 이를 찾아내기 위해 고된 시련과 비천한 갈바리아의 짐을 지고 갑니다 …… 이단자들이 자기네 사악한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려고 이용한 여러 저서의 저자들을 나는 이단의 공개적인 친구라고 생각합니다"(392쪽).

잔학하게 동료 수사들을 독살한, 스페인 부르고스 출신의 호르게 수사도 고개를 쳐들고 단언한다.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읍니다. 죽은 자는 모두 자기 죄 때문에 운명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난 도구일 뿐이고 ……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행동했다는 것을 아시니까 주님은 나를 용서해 줄 것입니다. 도서관의 보호가 내 의무입니다"(471쪽).

그러면 살인을 자행하면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감추려고 한 범인의 사상적 동기는 무엇일까? 이 책의 대단원에서(473∼481쪽), "웃음은 육체를 움직여 얼굴 모습을 왜곡시켜 사람을 원숭이 비슷하게 만든다"고 하는 호르게와 윌리암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갖는다.

"당신은 왜 하필 이 책만 그토록 두려워하는 겁니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철학자의 저서란 그리스도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축조해 온 가르침의 일부를 파괴했습니다 …… 철학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심지어는 성인들과 예언자들조차 그 말에 걸어 맹세하는데, 이 세상의 모습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만일 이 책이 공공연히 해석되었더라면 …… 또 일반에게 공개되었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웃음에 대한 논의는 왜 두려워합니까? 책을 없앤다고 해서 웃음 자체를 당신이 없앨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웃음이 뒤집혀 있습니다. 웃음은 예술로 승화되고, 지식인의 생각의 문이 웃음을 향해 열려 있고, 또 웃음은 철학의 대상, 타락한 신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 웃음은 농노들을 악마에 대한 공포로부터 풀어줍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지혜라고 가르쳐 준다 이겁니다 …… 요컨대 두려움이 없어지면, 우리 죄인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 이 책은 단순한 사람들의 혀가 지혜의 운반구라는 사상을 정당화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아야 되고 나는 그 일을 했습니다. 나를 악마라고 했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은닉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리와 신념의 갖가지 이데올로기에 병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저자는 윌리암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리면서 책을 덮는다.

"호르게는 진리를 너무 추잡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악마적인 일을 한 거야 …… 아마도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향해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데 있을 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 있기 때문이지".

결국 이 소설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중세의 음울한 가을도 아니고 가톨릭교회의 타락한 그로테스크함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사가 "다양성 안의 일치"와 "일치 안의 다양성"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방황해온 여정임은 사실이다. 역사는 삶의 스승이기 때문에 이 중세 소설은 우리의 내심, 종교심, 진리관,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중세의 기호론

저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년 출생)는 현재 볼로냐 대학교의 기호학(記號學, semiotics) 교수이다. 기호학은 언어라는 기호가 어떤 구조와 절차를 거쳐 사물을 지시하고 의미하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좀 까다로운 내용이지만 몇몇 경우만 예를 들고 넘어가자.

중세인들은 대자연을 하느님에 관해서 말해주는 거대한 책(liber mundi)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세계를 하느님의 표징으로만 보는, 중세의 "닫혀지고" 신중심적인 기호 해석을 벗어나서, 주인공 윌리암 수사는 로저 베이컨의 제자답게, 퍼어즈가 말하는 `무제한의 기호 해석'을 시도하며 연쇄살인사건을 풀어 간다. 자연현상과 사건에서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심리, 사건을 풀이하는 단서를 발견하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자연이라는 이 책은 "최종적인 대상물(여기 대해서는 늘 모호하게 말해 준다)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가까운 대상물에 대해서도 속삭이고 이때는 아주 명확하게 말하지 ……"(26쪽).

또 소설에서 "언젠가 악마가 나타난다면 …… 악마의 모습은 그때 우리 등뒤에 나타난 수도자의 몰골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만큼 기괴한 얼굴을 한 살바또레 수사가 사용하는 언어, "각종 언어와 라틴어를 섞어 말하는" 언어는 `무제한의 기호 해석'을 부정적으로 체현하는 본보기이다. 언어와 사상(종말사상과 수도적 청빈, 이단과 사도적 열성)이 자의적으로 혼합되고 구사될 때의 혼란을 그가 표상한다.

"사내가 체험한 언어란 행복한 인류가 태초부터 바벨탑까지 한결같이 사용한 공용어, 즉 아담의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의 분산 이후 출현한 여러 민족의 언어도 아니었으며, 말하자면 천벌 직후 첫날 사용된 바벨의 언어, 즉 원시적 혼돈의 언어였다고 나는 직감했다"(48쪽).


또 소설은 수도원에서 일곱 날(창조의 칠일)에 걸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들을 중심으로, 수도자들이 바치는 시간전례(時間典禮)에 따라서 전개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구세사의 재현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온통 사로잡혀 있는 묵시문학 사상, 곧 여섯째 시대가 지나면 만물이 불로 사르어진다는 종말사상으로 미루어, 소설 말미에 도서관과 수도원이 모조리 불타 없어지리라는 것은 예측하고도 남는다.

소설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호르게와 윌리암이 개진하는 상반된 지식론(知識論)이다. 바벨탑처럼 우뚝 솟은 도서관은 처음부터 불길한 인상을 준다. 제우스에게 도전하던 거인족들이 만든 성채 같기도 하여 폐쇄적이고도 오만한 인상을 주는데(23∼24쪽), 아보 원장은 "도서관은 그 안에 간직된 진리처럼 측량할 길이 없고, 또 그 안에 보관된 허위처럼 길을 잃기 십상이므로 스스로 방어합니다. 정신적인 미로임과 동시에 지상의 미로이기도 하죠"(41쪽) 라고 소개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수도회에 사명을 부여했다면 그것은 선조가 물려준 지혜의 보고를 보존, 방어함으로써 인류를 파멸에서 구하는 겁니다 …… 진리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개해선 안됩니다"(39∼40쪽).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지식과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지식 이론이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윌리암 수사는 아드소에게 말한다. "책의 선익은 읽히는 데 있어. 책이란 다른 기호를 말해 주는 기호로 되어 있고 그래서 사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야. 읽어 줄 눈이 없으면 책의 기호는 개념을 말해 주지 못하니 벙어리로 남을 뿐이야"(399쪽).

그 대신 호르게는 수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강론한다. "우리의 노동, 우리 수도회의 노동…… 그 본질은 지식의 보존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탐구가 아니라 보존이라 이겁니다…… 지식의 역사에서는 진보도 시대의 혁명도 없으며 겨우 있다면 지속적 궁극적 요약(compendium)뿐 입니다…… 수도자가 보존이 아니라 인류에게 허락되지 않은 다른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자만의 죄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입니다"(401-402쪽).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론과 상치되는 이 신념 때문에 그 장님 신부는 지식을 탐구하러 필사본에 접근하는 수사들을 독살한다.


끝으로 책의 마지막(498쪽)에 나오는 시 한 구절에서 유래하는 이 책의 제목 <장미의 이름>이 호기심을 일으킨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의 이름으로 태초의 장미가 존재하나 우리는 빈 껍데기 이름만 취한다.

모든 개념은 내용없는 이름일 뿐이라는 유명론(唯名論)으로 중세가 마감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의 감각으로 이 소설은 아우구스티누스 색채에 가깝다. 추운 필사본실에서 죽음을 내다보는 늙은 수사에게는, 비록 뇌리에 그 이름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가슴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던 따스한 체온, 여인이라는 아련한 실체가 여운을 끌고 있는 것이다.

[ 공동선 199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