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2005.3]

 [바티칸에서 온 편지]                                                         

 

 

도덕적 인간들이 만드는 비도덕적 사회

 

유럽 연합의 새 헌법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의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영원한 도성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퀴리날레 궁에서 유럽연합헌법 초안에 서명하였고, 이 헌법은 각국의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날의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패배이기도 하였다. 이 헌법 초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교황과 교황청인사들은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유럽 정상들은 이 요청을 묵살하고서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들에 근거하여 발전된, 인간의 불가침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자유, 민주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을 건국이념으로 천명하는 데서 그쳤다. 불란서 혁명 이래로 추진된 유럽 정치의 탈종교(laicisation) 운동의 절정이었다. 한 마디로 유럽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교회 앞에서 “정치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작년에 한국 중산층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 심리’를 조사한 어느 종교사회학자의 말에 의하면, 먹고 살만한 신자들이 교회에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 주일미사 강론에서 좋은 말씀으로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인도양 쑤나미, 수단의 다푸르, 이라크 팔루자 하는 단어는 기도할 마음을 싹 가시게 하고, 우리가 북한의 기아를 해결하고 민족화해를 도모하고 보안법을 폐지하는 일이 내 신앙의 의무인양 닦아세우는 설교는 내 양심의 평화를 일그러뜨리니까 제발 삼가달라는 주문이다. 주일미사는 참례하겠고 교무금은 내겠고 필요하면 고백실에 나타날 테니까 선거나 지역감정, 낙태나 성매매, 이라크전이나 세계 기아문제는 내게 맡기고 교회는 입을 다물어달라는 말이다. 신앙과 생활의 철저한 분리다.

 

21세기를 움직이는 “믿음의 시스템“

 

지난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판세를 분석한 워싱턴포스트지(11월 8일자)에 의하면 부시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과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이 앞장서서 부시를 지원한데 있었다. 케리 후보가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보수파 가톨릭 신자들은 케리 후보가 ‘동성결혼‘을 용인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교황이 극구 만류하고 단죄한 이라크전을 감행한 부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유럽 언론들은 미국의 네오콘이 정권을 움직이고 있다고 의심한다. 네오콘은 평화라는 것은 인간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미국 본토가 침공당하지 않는 한) 전쟁이 더 바람직하다는 이론을 갖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레바논, 아프간, 이라크를 차례로 무력하게 만드는 일은 비그리스도교 세력을 무찌르는 성전이요, 북한(나아가서 중국)은 무신론 국가이므로 어떻게든지 파괴해야 한다는 종교적 명분까지 감추고 있다.

 

한국에서도 현 정부의 개혁정책이 시도될 적마다 서울시청 앞에 모이는 반정부 시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보수인사들이 집결하고 있고, 특정지역의 보수주의 기독교계 속에 현 정부와 대북정책에 대한 증오를 심어온 언론인들은 이런 집회를 가리켜 “파도는 이제 일렁이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신앙인들이...시대의 요청에 부응해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에릭 프롬의 말처럼, 종교를 신봉하는 도덕적 인간들이 종교와 상반되는 비도덕적 사회를 창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치는 내가 알아서 한다”

 

우리가 믿음에 정진하면서 기도와 성서에 맛들이고, 단식과 자선에 몰두하게 되면 신앙생활이 두 갈래로 나뉨을 본다. 하나는 자신이 의인임을 스스로 다짐하면서 나의 언행, 정치적 판단은 하느님의 계시만큼이나 올바르다는 확신에 차오른다. 어느 우스개처럼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에 콘돔을 비행기로 살포한다면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은 그런 비윤리적 처사를 도저히 용납 못할 테지만 이슬람 땅에 폭탄을 투하하면 사탄을 무찌르는 하느님의 사자로 보기에 이른다. 9.11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한다는 세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이 되돌아온 느낌이다.

 

다른 하나는 신앙에 정진하면서 주님의 십자가(팔이 안으로 굽지 못하게 못질이 되어 있다!) 신비를 조금씩 배우면서 우리의 팔이 넓어지는 현상이다. 처자식 아닌 사람도 보살피고 영호남도 어우르고 남북의 동포도 걱정하기에 이른다. 하물며 아브라함의 한 피붙이 이슬람과 크리스천들의 평화야 오죽 소중하겠는가?

필자가 대사로 파견되어 교황께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교황께서는 “과거를 잊고 한반도 전체의 미래를 바라보라!”고 우리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하셨다. 세계 유일하게 남은 남북 분단은 “죄스러운 상황”이라는 말씀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요즘 정부에서도 국회에서도 한국 정치계와 언론계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가톨릭 신자들이다. 적어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북한을 두고 증오의 논리로 대하느냐 화해의 논리로 대하느냐, 경제정책에서 기득권수호냐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우선적 사랑”이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같은 믿음을 가진 교우(敎友)들이면서도 여야의 정책이나 언론인들의 발언을 보고 듣노라면, “신앙은 어디까지나 신앙이고 정치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신조를 품은 사람들 같다. 정작 비신앙인들이 목격하는 것은 종교를 신봉하는 인간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비도덕적 사회를 만들어가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