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2000.3]

 

선거와 그리스도인

 

 

     국민의 심중을 드러낸 총선연대의 혁명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치계는 40년 군사정치의 술수 그대로 오로지 지역감정을 볼모로 정치적 야망만으로 움직이는 4당 체제의 혼잡한 선거구도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나는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참여 영역을 소극적이나마 줄곧 편 들어온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하나로 내 신앙에 비추어 나의 투표행위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여러 차례에 걸친 교회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신자가 교회에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절반 이상이 "마음의 평화와 심적 위안"이라고 대답해 왔다. 그래서 `선거'라는 정치 행사는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 놓는 속사(俗事)라고 여기는 교우(敎友)들도 많고, 선거와 신앙은 전혀 별개의 것이어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내가 찍는 것이지, 교회가 이래라 저래라 훈수할 것이 못 된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천주교 주교단이 여러 차례 말해 왔듯이, 선거라는 정치행위는 중대한 신앙행위이므로 성서적 관점에서만 나의 행동 명분을 찾아보았다.

먼저 나의 투표행위를 `거룩한 장막 속에서 하느님과 독대(獨對)하는 만남'으로 이해해 보았고, 빌라도가 예수의 십자가에 처형죄목으로 걸어놓았던 명패의 `INRI'(`유대아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라는 글귀에서 지역감정을 뛰어넘을 만한 신앙의 명분을 발견하였다. 투표장 속의 나의 행위에 내 자신의 구원과 멸망, 그리고 민족의 구원과 멸망이 달렸으리라는 절박한 책임감 속에 나의 투표 기준은, 교회의 오랜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음을 자백한다. 따라서 `천주교 총선연대'가 "올바른 선거참여와 국민주권 회복"을 주창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신앙을 함께 하는 교우들에게 보내는 종교적인 호소로 여겨진다.


공동책임이라는 원죄 안에 있는 우리

사순절을 맞을 적마다, 신앙이 미약한 나로서는 심중에 맴도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한 사람의 범행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단죄에 이르게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의 의로움에 이르게 되었다."(로마 5,18)는 바울로의 로마서 사상이 그것이다. 우리 조상 단군의 전설처럼,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인지 신화인지도 모르는 `아담의 사과 따먹기'로 말미암아 배달 겨레 창녕 성씨(昌寧 成氏) 가문에서 태어난 내가 원죄(原罪)를 뒤집어 쓰고 태어났다니 말이 되는가? 그리고 2천년전 팔레스티나땅 한 구석에서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자렛 사람 예수의 죽음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성염(成稔)의 죄를 씻어주고 그에게 영원한 구원을 준다니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인류를 지어내신 한 분 하느님, 그 하느님이 지정하신 한 분 구세주를 믿더라도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들던 교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와 선거를 지켜보면서 실감났다. 우리는 한 겨레여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잘잘못으로 모조리 함께 구원받고 멸망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더구나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의 행실로 한 민족의 역사적 운명이 좌우되어 왔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 특히 정치지도자의 언행이 하느님 앞에서 그 공동체 전체의 언행을 대표하는 이른바 `공동인격(共同人格: persona communis)'이라는 개념은 동서고금에 퍼져있지만 특히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모세 한 사람의 전구(轉求)로 이스라엘이 전멸을 모면한 일이라던가(출애 32,7-14; 민수 17,6-15), 다윗 왕이 하느님의 명(命)을 받지 않고서 시행한 병적조사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전염병을 천벌로 당한 사건(2사무 24장)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주간에 봉독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특히 넷째 노래 이사 52,13-53,12)는 이 공동인격 사상을 알아들을 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사 53,4-6.8)


더구나 현대에 와서는 국민이 투표해서 우리의 지도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하느님 앞에 내세운다. 따라서 그들의 언행과 정치에 따라서 한 민족과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도덕 모두에 걸쳐서 하느님 앞에서 유권자들과 국가가 책임을 지고 축복이나 징벌을 당한다. 군사반란을 일으키거나 국민을 학살하거나 수십 년간 오로지 한 지역만을 편파적으로 개발한 정치가들과 그들이 만든 정당을 청와대와 여의도로 보낼 적에 단순히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서의 나의 영원한 운명을 두고 책임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특히 지역감정이라는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면, 그 인물이 얼마나 오랫동안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는가, 얼마나 무섭게 변절한 정치가였는가, 선거부정을 얼마나 저질렀고 자신과 직계가족의 국방의무를 성실히 하였는가는 다 눈감아주고 무작정 내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 가진 것 지켜준다는 이유만으로 찍고서는, 그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정치악(政治惡)을 하느님 앞에서 함께 뒤집어 쓰겠다는 만용을 부린다. 우리의 선거는 실상 "그 사람과 그 당(黨)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책임은 나와 내 자손들이 지겠습니다."고 하느님께 덤비는 행동으로 보인다.

우리 각자가 지난 30여 년간 무슨 명분으로 어느 정당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만, 역사에 나타난 결과로는 4천억과 7천억의 부정축재,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성수대교 붕괴며 삼풍백화점 붕괴며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사고,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폭발사고와 그 희생자들이 있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삼보와 기아 그리고 대우의 파산에서 보듯이 국민에게 수십 조를 빚지게 만든 파탄을 초래하였고 급기야는 IMF라는 재앙이 온 나라에 찾아들었다. 내가 그 동안 행해 온 투표 때문에, 이 모든 일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책임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내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가늠하는 총선을 두고 긴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전례(典禮)는 구세사(救世史)의 의미에서 사순절(四旬節)을 맞고 있지만, 교회 밖에서 전국민들은 민족사(民族史)의 사순절을 맞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신앙으로 살고 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번 선거에 어떤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하느님께 흡족할까 헤아리고 있으리라.


`나자렛 사람'인 예수

사순절(四旬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인지, 그분의 신원(身元) 문제를 따지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이 수천 년을 고대하던 메시아였다. 그러나 당대의 종교계 지도자들인 대제관들, 당대의 평신도운동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 당대의 지식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율법학자들이 합작하여 예수를 처형하고 말았다. 학식 있고 경건하고 하느님 뜻을 알만한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의 언행으로 보나, 그분이 돌보고 편드는 무리로 보아서 도대체 자기네들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식일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 예루살렘 성전과 제관들 그리고 제사를 그다지 존중 않는 언행, 율법과 도덕에다 큰 비중을 두던 종교계를 상대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책임을 내세우는 등, 탈잡힐 만한 시비 꺼리가 많았으나, 예수가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한 중요한 이유 하나가 놀랍게도 `출신지(出身地)'가 안 좋았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저주하던 땅 갈릴래아 출신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처음에 예수를 따라나서는데 스승의 출신지가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를 맨먼저 따랐던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립보가 자기 친구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을 우리는 만났다네. 그분의 요셉의 아들로서 나자렛 출신 예수라네."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같은 갈릴래아의 가나 출신이면서도 나타나엘은 한 마디로 일축한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수가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3-51). 결국 찾아가서 만나 보고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는 했지만….

훗날 기적과 설교로 대중을 동원하는 예수를 두고 예루살렘 여론이 "예수가 누구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적에도, 예수의 출신지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예수의 고매한 인품과 훌륭한 설교와 기적을 보고서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이분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갈릴래아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출신지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군중 가운데에는 분열이 생겼다"(요한 7,37-52).

하여튼 예수는 안 된다고, 그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떠드는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의 당무회의에서, 그래도 비밀리에 예수를 만나 본적이 있던 니고데모가 참다못해 발언을 한다. "우리의 율법에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또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소?" 그때 그들이 니고데모의 입을 막아버린 한 마디는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란 말이오?"라는 지역감정이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란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요한 7,52). 바리사이들의 지역감정은 "성서를 샅샅이 뒤져본 끝에" 나온 신앙이기도 했다, 맹목의 신앙!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한 줄 알면서도 사형언도를 내리고는 "처형 명목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IESU NAZARENUS REX IUDAEORUM)'라고 씌어 있었다"(요한 19,19). 지금까지는 비굴하게 여론에 굴복하여 사형을 언도한데 대한 보복으로 빌라도가 이러한 처형 명목패를 썼다고 해석해 왔지만, 요즘 성서학계는 이 명목패에도 유대인들의 지방색을 이용한 고도의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다는 해석을 내린다.

빌라도가 십자가 명패에 굳이 죄수의 출신지를 밝혀 `나자렛 사람'이라고 써 붙인 것은 유대인들의 지방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죄한 동포가 로마군인들 손에 죽는다고 분개하여 폭동까지 갈지 모르지만, 저 명패를 읽고 나서는 "아하, 거기 출신이야? 그렇다면 죽어도 싸지. 죄가 있든 없든 그 지방 사람들은 씨를 말려야 해!"라면서 분기(憤氣)가 수그러들리라고 외국인 총독 빌라도는 예상했던 것이다.

신앙인이기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을 뽑는 행동도 하느님 앞에서 양심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이 시점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인 명패는 나한테 많은 경고를 담고 있다. 지난 4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온 군사정권은 지독하게도 지방색을 내세우고 특정 지방과 그 곳 사람들을 무턱대고 미워하게 국민을 교육시켰고, 국민을 자기 지방사람이면 무조건 찍어야 한다는 망국병자로 만들어 왔다. 그래서인지 선거철이면 어디서나 지방색이 판치지만, 지방색이란 우리 구세주를 처형시킨 죄악이므로 우리 신앙인이 절대 피해야 할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임을 깨닫는다.


투표장 속의 구원과 멸망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일찍이 "내 곁을 지나가 버리시는 하느님이 나는 무섭다!"고 고백하였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는 굶주리고 헐벗고 울고 신음하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무죄하게 옥에 갇히고 정의를 위하여 힘쓰는 사람을 아끼고 돌보겠다고 마음 먹는다. 자기는 이 땅이 조금 더 정의로와지기 바라고, 없는 사람들도 사람 대접을 받고 살기 바라며, 배고픈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사는 나라가 되기 바란다고 말은 한다.

그런데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선거야말로 우리의 이웃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아주 귀중한 기회요 따라서 올바른 투표는 `회개의 증표'가 된다. 4년마다 찾아오는 선거는, 우리가 실제로 나라와 겨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불의와 부정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절호의 기회처럼 보인다. 사실 선거때 마다 나오는 주교단의 담화문대로, 4월은 우리 나라의 역사에, 그리고 이 역사에 베푸시는 하느님의 구원이 가늠되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리라. 이 땅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일어나느냐, 더욱 절망적이고 불의한 정치로 내닫느냐를 내 한 표로 결정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말을 주교단에선 거듭 밝혔다.

그러므로 선거의 시기는 어쩌면 한반도를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모양으로 가꿀 수 있도록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때이자, 우리의 기득권이나 지켜주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짓밟는 무리에게 투표함으로써 이 나라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갈림길일지 모른다. 그런 기회를 우리가 놓치면, 구원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이 한반도를 그냥 지나가시고 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투표하러 가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내 본분으로 여겨진다. 한국처럼,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국민이 참여할 기회가 없는 나라에서 이런 기회마저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일로 보인다.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정의로워지고 하느님의 나라와 비숫해지도록 노력하라는 부르심을 외면하는 `태만의 죄'이리라.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나는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받아들이겠다. 온갖 흑색선전과 모함, 보수언론의 교활하면서도 무자비한 수작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 특히 군사정권과 보수언론이 40년간 써먹은 색깔논쟁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처형당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또 만일 내가 무슨 대접이나 돈봉투를 받고서 찍는다면 그 투표로 나는 이 땅의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들의 돈을 빼았는 셈이고 이 땅의 짓눌리고 돈 없는 사람들을 다시금 힘세고 돈 많은 자들의 손아귀에, 과거처럼 독재자들과 고문기술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유다의 행동이리라. 유다는 선약금으로 은전 서른냥을 받고서 스승을 팔아 넘겼다.

입후보자가 천주교 교우니까 찍어준다는 구실처럼 맹랑한 명분은 없다. 총선 시민연대가 낙천대상자로 지명한 국회위원들 가운데 그리스도 신자가 절반으로 33명이며(불교신자 17명을 합하면 신앙인이 무려 50명이나 된다), 가톨릭신자만도 13명이나 되고 대다수가 공천을 다시 받았다. 천주교 교우니까 찍는다는 것은 종교를 빙자한 집단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그 교우 의원이 저지르는 정치적 과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하느님 앞에서 더욱 커지기만 한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천주교 신자가 몇 명 뽑혔다"는 신문보도는 신중을 요한다.

나는 먼저 입후보자의 과거 전력을 살피겠다. 총선연대가 이미 지적하였지만, 군사독재정권의 하수인이나 협력자였거나, 보수정당들에서 기득권을 향유한 사람들이거나, 부정부패에 물든 사람들이거나 (병역비리로) 사생활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우리의 대표자로 세울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투표하면 그 당선자가 지금까지 저질러온 죄상과 앞으로 그 정당과 더불어 일삼을 부정과 악행에 대해서 하느님과 동포 앞에 내가 책임져야 할까 두렵다.

그러나 인물본위(人物本位)라는 말도 내게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후보자 개인이 훌륭해도 정당정치나 보스정치를 하는 곳에서는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심지어 소신에 따라서 용기있게 행동하였다가는 출당조처되는 예를 여러 번 목격하였다. 따라서 입후보자가 속한 정당의 강령과 여태까지의 정치행태가 과연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 것인지도 살펴 보겠다.

적어도 나로서는 농어촌과 도시빈민층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정당, 대기업 구조조정을 반대하면서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지지하는 정당, 수백만의 동포가 굶어죽는다고 좋아라 하면서 보수를 자처하여 빨갱이에게 먹을 것 주지 말라는 정당("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혀주지 않았다."는 성서말씀을 명심할 것), 의료보험의 통합이나 의약분업에 반대하고, 반공을 핑계로 양심수와 정치범의 석방을 반대하고, 대한민국 인권유린의 첨병인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정당("내가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마태 25,42-43 참고), 그리고 지역감정 외에는 기댈 곳이 없는 정당에는 등을 돌리겠다.


구원과 멸망은 한 표 차이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성막(聖幕)을 짓고난 다음, 모세는 그 장막 속에 들어가서 단독으로 야훼 하느님을 뵙고 명령을 받는다. 4월 13일이면 나는 투표소의 휘장 속에 들어갈 것이다. 그곳은 하느님과 내가 일대일로 마주하는 자리, 성스러운 자리, 어쩌면 지성소(至聖所)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휘장 속에서 비밀투표를 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과 홀로 마주 서리라. 그리고 하느님만 지켜보시는 가운데 내 속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뜻, 나보다 못살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뜻을 실천하는 사람인지를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기회가 되리라. 아니면 내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서, 사회정의니 민족통일이니 노조니 제도개혁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바리사이인지를 하느님께 들키는 자리가 되리라. 정말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구원과 멸망은 거기서 내가 찍는 한 표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

이번 선거에서 내가 수구사상과 지역이기주의로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이 나라의 장래는 더욱 암담하겠다. 국민 누구에게나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로,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 정의사회로, 분단된 조국이 하느님 안에 화해하는 통일국가로 회개하지 않으면 온 민족이 멸망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 민족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가 내 표 한 장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선거에 임하겠다.

[ 공동선 20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