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2005.6]     

[ 바티칸에서 온 편지]         

 

 

교회는 살아 있다! 교회는 젊다!

 

 

“진리의 협조자”

 

     베네딕토 15세의 교황 문장(紋章)은 선임교황에 비해서 색깔도 그림도 아기자기하다. “왕관을 쓴 무어인(이슬람교도)”은 교황이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교구장으로 있던 프라이싱 교구의 문장에 11세기부터 나오는데 그 유래를 아무도 모른단다. 그 옆에는 등짐을 지고 가는 곰이 그려져 있는데 독일 바바리안 지방을 선교한 코르비니아노 성인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성인이 말을 타고 로마로 가는데 숲속에서 곰이 나타나 말을 물어 죽여 버렸다. 화가 난 성인은 곰을 꾸짖고는 물어 죽인 말 대신에 곰더러 짐을 지라고 하여 로마까지 끌고 갔단다. 거친 이교도들을 순치하여 순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는 선교 의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성모님께 “나는 오로지 당신의 것”(Totus Tuus)이라던 요한 바오로 2세의 표어와는 어감을 달리하여 새 교황은 “진리의 협조자”(Cooperatores Veritatis)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신학자 출신 라칭거 교황에게 가장 달콤한 소리는 “진리”이다. 추기경단이 교황선거에 들어가던 날인 4월 18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집전되던 미사에서 추기경단장 라칭거는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24년간 다져온 신념을 아무런 여과 없이 피력하였다.

 

그의 강론은 시종일관 진리를 수호하는 내용이었고, “그리스도교도들의 작은 배”를 뒤흔드는 “상대주의의 독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그 범주를 “맑시즘부터 자유주의까지, 집단주의부터 철저한 개인주의까지, 무신론부터 황당한 종교적 신비주의까지, 불가지론부터 영합주의까지” 폭넓게 규정하였다. 상대주의는 “자아와 자기 욕망을 궁극 기준으로 삼는” 풍조일 따름이라고, 우리 신앙을 명료하게 하는 일을 왜 근본주의라고 폄하하느냐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들, 참 사람”이라는 진리의 기준이 있으며 바로 “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양떼를” 영도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강론을 듣던 외교관들은 차츰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고 한 동료 대사는 (그분이 자기 신념을 작심해서 토로하고서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가려는 생각이라면서) “만종이 울린다”고 내게 속삭였지만 나는 “그분의 교황 취임사를 앞당긴 기조연설이다”라고 풀이하여 둘이서 내기를 걸었다.

 

“구원의 방주”인가, “세상의 소금”인가?

 

새 교황으로 뽑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베드로의 직무 곧 성좌의 영적 현세적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고 수호하려는” 의지(Universi Domini gregis 53항)라고 규정되어 있다. 11억 가톨릭신자들을 통솔하는 교황청과 교황직이 스무 세기의 경험과 투쟁을 거쳐서 일군 역사적 산물임을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베네딕토 16세가 구상하는 교회상이 혹시 세속, 마귀, 육신이 날뛰는 죄악의 바다를 건너 가톨릭신자들을 무사히 구원의 항구로 실어 나르는 “노아의 방주”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방주의 창은 위로만 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기를 꺼린다면, 성부께서 만들고서 “참 좋다!” 하신 세상, 성자께서 육화하면서까지 껴안으신 세상은 어찌 되느냐는 물음이다. 신앙인들이 성령께서 인류를 만나주시는 저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탄하는 모습을 왜 “신앙의 미숙함이요 열등감의 상태며 교리적 풍조에 이리저리 까불리는 위험”이라고만 보느냐는 반문이다.

 

신앙인들을 방주에 가두어 버리면 신심(信心) 혹은 성사(聖事) 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해지는 어린이로 머물기 쉽다.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뿐이고, 독실하다는 신앙인일수록 성당 문을 나서면 모든 윤리도덕과 사회문제에 “자아와 자기 욕망을 궁극 기준으로 삼고” 행동한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성(聖)과 속(俗)을 철저히 구분하고 살게 된다. 유럽 연합이 그 대륙의 뿌리가 그리스도교에 있음을 공식으로 묵살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냐고 묻고, 교회 교도권이 뭐라든지 상관 않고서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혼과 동성애, 낙태와 안사술, 환경 문제, 선거, 정치적 경제적 정의 등은 각자가 알아서 처리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조가비만한 인간의 지성”

 

하지만 지성인들의 일부 염려는 기우(杞憂)로 그치리라 본다. 명민한 지성인으로서 라칭거 교황은,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진리, 그것이 악마다”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의미심장한 경고를 알고 있었는지 자기 문장 아래편에 조가비 하나를 그려 넣었다.

 

이 조가비는 두 가지를 상징한다. 우선 중세 그리스도인들이 성지를 순례할 적에 표주박처럼 조가비를 차고 다니다 물을 떠먹던 풍습이다. 새 교황에게 이 조가비는 선임교황의 뒤를 이어 지구를 순례하며 겸허하게 뭇 백성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만나 뵙겠다는 사목방침을 드러내는 것 같다. 두 번째 상징은 그분이 각별히 경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삼위일체를 궁리하던 성인이 바닷가를 거니는데 조그만 아이가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는 조가비로 부지런히 바닷물을 퍼다 부으며 놀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고 성인이 묻자 “저 바닷물을 죄다 퍼서 이 구멍에 채울 테에요!” 하더라나. “예끼 이 녀석, 그 쬐끄만 조가비로 그 쬐끄만 구멍에 무슨 수로 바닷물을 다 퍼다 붓는다는 말이냐?”라고 면박을 주자 아이는 당돌하게도 “아저씨 그 작은 머리에 무슨 수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집어넣으려고 그러세요?”라고 대꾸하고는 사라졌단다.

 

가톨릭신도들은 앞으로 미사 때마다 “우리 교황 베네딕토”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교황의 무류권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기도에 근거하리라는 것이 필자의 신념이다. 우리 모두의 기도에 힘입어 인간의 지성이 조개껍질 만하다는 그분의 신념은 깊어져만 갈 것이고, 계시된 것들은 계시되지 않은 것들의 일부분임을 깨달을 것이며, 인간의 모든 것과 인간이 지향하는 모든 것 안에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얼(성령)이 현존함을 실감하면서 하느님의 길은 교황직을 포함해 인간이 끌어가는 어느 제도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음을 인류 앞에 증언하리라고 본다. “교회는 살아 있다! 교회는 젊다!”는 그분의 취임식 선언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바로 이런 기대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