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2005.2]

 [바티칸에서 온 편지]   

                               

남아시아의 재앙은

 

신앙의 시련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자기네 구세주 오심을 반기는 성탄절 송가를 한 소절도 채 부르기 전에 인도양을 휩쓴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 그 주변의 모든 바닷가에서는 예레미야의 애가가 울리고 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리니 울음과 통곡이 애절하구나! 제 자식 때문에 우는 라헬, 위로받기조차 마다하니 그들이 없어졌음이라!”(예레 31,15) 그리고 텔레비전 앞에서 처참한 폐허와 산더미 같은 시체를 바라보는 온 인류의 입술에서 절로 나오는 한숨이 있다. “하느님, 어찌 하여 저들을 버리셨습니까? 하필이면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들, 가장 힘없는 어린이들을 쓸어가셨습니까?”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무구한 어린이들의 시체더미에서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을 떠올리면서 이번에는 폭군 헤로데의 손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죽음 당한 듯한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른다(마태 2,16-18). 하늘과 땅의 주인, “파도소리 요란하게 바다를 뒤흔드시는 이, 그 이름 만군의 야훼”를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는 “이런 시련마저도 신앙이 이겨낸다는 사실이 내게는 오히려 이상하다. 신앙이 위로나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주신 바를 부인할 길 없기 때문이다.”라면서 영국의 지성들을 위로하였다. 무엇을 베풀어주셨다는 말인가? 교황은 1월 2일 삼종기도에서 바티칸 광장에 모인 이들과 함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확실한 것은 며칠 전 남아시아를 휩쓴 재앙처럼 가혹한 시련에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약한 어린이로 태어나신 성탄의 신비에서 그분은 우리의 존재를, 아니 온갖 고통을 나누어지려고 오신 까닭입니다.”

 

....사랑의 시험이다

 

과연 인도양의 대재앙은 인류가 하나임을 보여주는, 거대한 ‘나눔’을 낳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곳에 한 5백만 불쯤 내놓을까 하다가 열배로 구호금을 올렸고 미국도 3천 5백만 불 운운하다가 열 배로 올리고 함대까지 보내 헬리콥터로 식수와 식량을 나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이 남아시아 구호의 선두에 나서고 “남아시아 지진-해일 지원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이탈리아 수상은 “서방세계가 재난피해국에 지운 부채를 탕감하자!”는 구호를 내놓았고 유엔은 10년을 내다보면서 이 고통을 전 세계 국가들이 ‘나누어지는’ 장기계획에 들어갔다.

 

“국경 없는 의사들”이 속속 집결하고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진 이탈리아 관광객들이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생존자들을 돕고 있다. 런던에서는 단 하루에 수백만 유로가 걷혔고 우리나라의 모든 매스컴과 단체가 구호금 모집에 나서 거리거리에서 모금을 하고 있다. 날마다 텔레비전과 신문지가 이 뉴스와 사진으로 가득하다. 3천년기에 들어서자마자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실의에 빠졌던 인류의 양심과 자긍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류는 새삼 깨달은 것이다. 최첨단 과학과 인류사상 가장 풍요한 번영을 누리던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타인들이 고통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인색하였는지! 더구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고 이제 갓 시작한 재앙이라면, 이런 재해가 우리한테는 닥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면, “돕는 것도 훈련이다!”(조선일보 1월 3일자 사설)는 표어처럼 인류는 사랑의 훈련을 받는 중이다.

 

다만 우리 신앙의 본색을 또한 드러낸다

 

그래서 이 사건이 우리 본당 주일미사에서 강론과 신자들의 기도로 얘기되었던가? 본당에서 특별헌금이나 위문품수집이 있었는가? 교구차원이나 한국천주교 차원에서 기도회나 모금이 있었는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만일 없었다면, 본당신부님이나 주교님들은 온 인류가 아파하는 이 재난이 우리 신앙과 아무 상관없다고 가르친 셈이다. 전 세계 주교님들이 한데 모였던 공의회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것이다”(사목헌장 1항)라고 선언하였는데 말이다.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성서 대목이 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러 성전에 데려갔을 때다(루가 2,22-38). 아기가 누구의 핏줄인지 알던 마리아는 야훼의 성전에 아기를 안고 들어가면서 “제가 낳은 당신의 아드님입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입술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거기서 만난 시므온이라는 늙은이의 불길한 예언은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말았다. “두고 보시오. 이 아기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심중의 생각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로 태어난 하느님 아들만 아니고 주변에서 발생하는 온갖 사건들도 자칫 우리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