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996.7]

 

 

추악한 전쟁 속의 추악한 교회들

 

 

"아르헨티나, 나의 조국이여..."(이사벨라)

1976년 3월 이사벨라 페론 정권을 무너뜨린 비델라 군사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야당과 재야인사 및 노동운동가, 그리고 학생운동가를 포함하여 4천여명을 학살하였고, 보안군에 끌려간 뒤 행방불명된 국민이 1만명이었다(공식집계). 피해자 측에서는 3만여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1976년만해도 주교(Enrique Angelelli) 한명, 사제 7명, 신학생 3명이 피살당하였다.

군사반란 당시의 군종감이자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이던 토르톨로 주교(Adolfo Tortolo)는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비델라 장군(Videla)과 해군제독 마쎄라(Massera)를 만나서 군사반란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또 군사반란이 일어난 직후인 5월 주교회의 명의로 아르헨티나 전교회에 사목서한을 보내어 군사 쿠데타는 `공동선'을 위한 결행이었음을 천명하고서, 반정부 인사들의 무차별학살을 두고는 "우리는 보안군이 평화시의 순진한 행동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잘못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상황의 요구로 말미암아 우리 자유가 어느정도 제한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주지시켰다.

`추악한 전쟁'의 와중에서 아르헨티나 교황대사 라기(Pio Laghi) 대주교는 아르헨티나 교회를 상대로 단 한 차례도 이 사태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더러, 무수한 인사들이 붙잡혀가 고문과 학살을 당하고 그 시체가 소각당하고 있던 군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장병들을 격려한 것으로 후일 밝혀져 서방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킨 두 달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이 되고 토르톨로를 뒤이어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이 된(76.5.24) 아람부루(Juan Carlos Aramburu) 추기경은 1982년 로마를 방문하는 길에 어느 일간지(La Repubblica)와 다음과 같은 회견을 가졌다(82.4.20).

-. `추악한 전쟁(guerra sucia)"에 대해서는?
"근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그 상황을 촉발시킨 요인은 분명이 [좌익의]테러리즘이었다. [이탈리아의]여러분은 아직도 테러리즘에 시달리고 있지만, 요행히 아르헨티나에서는 덕분에 뿌리가 뽑혔다. [군부는 좌익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아다시피 그러다 보니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와서는 왈가왈부가 대단하고 특히나 이탈리아에서 소동이 대단한데 나로서는 그 까닭을 모르겠다...."

-. 무수한 시체가 묻혀있는 구덩이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나로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시체 구덩이는 없다. 시체마다 관 하나씩이 돌아간다. 죽은 사람마다 정식으로 사망자 장부에 올라있다. 시체 구덩이라는 것은 정부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을 묻는 구덩이에 불과하다. `행방불명자?'침소봉대하지 말자. 모두가 편안하게 사는 유럽에서도 행방불명자는 있지않은가?"

-. 당신의 대주교 임명은 우연인지 비델라의 쿠데타와 맞아떨어졌다. 당신은 수차 비델라의 군부를 두둔하였고 그들의 범죄행위를 간접적으로 옹호해 왔다. "아니다. 그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정권 남용에 대해서 주교들은 수시로 손을 썼다. 우리는 장장 열두번이나 당국에 호소를 하였다."

-. 그래서 무슨 성과를 얻었는가?
"소위 `행방불명자' 가족들의 불만이야 늘 있게 마련이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행동으로 행방불명자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보았다. 예컨데 정치범들 말이다."

-.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교황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이나 [행방불명된] `어린이들의 할머니들'을 교황이 접견해 준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역대 교황들은 문제를 언급해 왔다. 바울로 6세나 요한 바울로 2세가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이 한번이 아니다."

이처럼 생래적으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군사정권하에서 저질러지는 탄압과 학살에 침묵하면서 세계여론에 밀려 "고문은 피해자나 가해자나 인간을 비하시킨다"(1977), "아르헨티나인들은 각 사람과 각 집단이 전체 사회의 일원으로서 겸허한 솔직성을 갖고 자기 행동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1981: 포클란드 전쟁후), `추악한 전쟁' 기간에 "범한 죄과에 대한 혐오감과 그것을 고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이 양심 성찰에 수반되어야 한다"(1983: 문민정부하)는 형식적인 선언을 하는데그쳤고 실제로는 군정을 지지하였다. 알폰신 문민정부하에서도 언론의 공격에 교회는 강경하게 반발하고 침묵을 지켜오던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1996년 4월 27일에야 <서기 2000년 희년을 위한 사목서한: 3천년대>라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교회의 과거사를 다루었다.

교회가 군정을 비판하고 관계를 단절하는 "그런 노선을 취했을 경우 무슨 일이일어났을 것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변명반, "그러나 [우리가 시도한] 모든 것이 그때에 일어난 무수한 가공할 사건들을 정지시키는데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이의의 여지가 없다."(20항)는 고백반의 이 어중간한 문서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지만, (이미 사라진)군사정권과 그 반인륜적 범죄를 명시적으로 단죄한 것과, 군사정권의 범죄에 교회가 공동책임을 지겠다는 의사표시는 진일보한 것이다.

그렇지만 `추악한 전쟁'은 역시 개혁을 추구하던 진보세력의 `테러리즘'에 의해서 촉발된, 국가의 (비록 `억압적인 국가 테러리즘', `부도덕한 탄압', `불법적 대응, 비도덕적이고 잔혹한 방법'이라는 단서는 붙지만) 정당방위였다는 보수적인 관점은 `게릴라 테러리즘', `게릴라 폭력',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말로 문서에 무려 세 번이나 명기된다: "`국가 해방'의 형태로 정권을 장악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 영감을 받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조직적인 폭력을 정당화하고 참여한 가톨릭신자들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며, 불행하게도 다수 젊은이들이 이러한 시도에 휩쓸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다."(18항)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당시 군부에서는 860여명으로 산출하고 재야쪽에서는 3천여명으로 추산하던,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이 저질러지던 1980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5월 23일에 상임위를 긴급 소집하고 비분에 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광주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사태"는 "우리 민족 전체가 당하는 고난"으로 규정되었다. 그 사태로 "사랑하는 같은 민족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고 있으며, 전국민이 참으로 긴장과 불안과 슬픔 속에 내일을 걱정하게 되었다"는 선언은 주교들이 사태의 심각성과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1996년의 <5.17 군사반란> 재판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태는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분쟁"이었고, 따라서 피해 지역이 아닌 곳의 신자들이 양비론에 입각해서 그 글을 읽는다면, 광주 사태는 군부가 계획적으로 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던 범죄가 아니라, "같은 민족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비인간적 충돌"에 불과하였으며, 남은 일은 피살자와 학살자가 서로 용서하면서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5년 세월을 두고 주교회의는 침묵하였다. 국민들은 바로 전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여자들과 벌인 술자리에서 총맞아 죽었을 때, 불교신자인 그를 위해 천주교 주교 전원이 명동성당에 모여서 미사를 드린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동작동 묘지에는 그의 묘에 스님이 분향하고 목사가 기도하고 신부가 성수를 뿌리던 기이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1996년까지도 광주교구를 빼면, 한국천주교가 전체적 태도를 표명하거나 주교들이 광주 5.18 희생자들을 위한 공동 미사를 올린 기록이 없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의 보수파는 부단히 침묵 속에 실력행사를 해왔을 따름이다. 민족사의 엄청난 상처를 목격하고서도 천주교는 바로 그해 11월(17-20일)에 열린 주교회의 추계총회에서 광주 문제에 관한 대외언명을 일체하지 않고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만을 논의하였다. 1981년 10월 25일에는 전두환 정권의 전폭적 후원을 입어 `조선교구 설립 150주년 기념행사'라는 성대한 잔치를 서울 여의도에서 거행하였다. 뜻있는 국민에게는 광주학살을 저지른 군부가 80년 가을에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1995년은 민족사의 진로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5.18 광주시민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양심가책이 일년내내 각종 시위와 서명작업과 성명서로 표출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보수적인 지식인들과 개신교 집단들까지 동참하여 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함성이 드높던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95년의 추계 주교회의(10.9-12)는 5.18 문제를 묵과하고 넘어갔다. 전국 여러곳 성당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문서에 서명한 주교는 두 명뿐이었다.

여론과 정세에 밀려 지난해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다음에야 김추기경도 관훈클럽 연설(95.12.20)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새 한국을 만드는데 절호의 기회"라고 이를 지지하였다. 그리고서는 95년 성탄과 96년 새해를 맞는 교구장들의 사목교서는 한결같이 역사청산을 담았다.

그런데 김추기경의 `역사청산' 공식지지와 여러 교구장들의 지지 교서가 나오자 보수파가 드디어 목청을 냈다. 한국천주교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보수파의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되 것은 <월간 조선> 96년 2월호(414-426면)에 실린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이동욱 기자와의 인터뷰 덕분이다. 그 인터뷰기사는 <罪人 아닌 사람 없는데 누가 누구를 斷罪합니까? 인간은 누두고 자기 허물을 고백할 의무가 없습니다>라는 김주교의 선언을 제목으로 달고 있다.

물론 교회내 보수언론 매체들은 김남수 주교의 발언들이 <월간조선>에 의해서 왜곡 보도되었을 가능성을 내세워 그를 두둔하고 있지만,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그러한 가능성을 두고 김남수 주교에게 직접 문의서한을 보낸데 대해서 본인이 일체 답변을 거부하였으므로 독자들은 <월간조선>의 글을 김주교의 순수한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자는 첫머리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관훈클럽 발언에 대한 반대 여론을 찾고 있었으며 "천주교 신부들 사이에 `保守의 首將'이란 별칭이 더 어울린다는 평판이 나있다"는 김주교를 의도적으로 인터뷰 대상으로 선택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김남수 주교도 "저는 본래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종교인은 종교에 관해서만 노력하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자는 것이 주교직 20여년 동안의 자세였습니다"고 호응한다. 주교가 되기 전 오랫 동안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서, 주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주교회의 의장으로서의 경험을 내세우면서 김주교는 한국 "주교계의 구성원 대다수"가 김수환 추기경이나 정의구현 사제단과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까지 언명한다.

김남수 주교의 대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광주 사건"을 "민란"으로 규정하는 발언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그 `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된 사실은 그의 안중에 없다.

-. 광주사태 문제는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아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동조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민란이란 충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구실로 민중이 분노하고 있지요. 민중의 분노는 비이성적입니다."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후세에나 가야 이루어질 일이지, 현세에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주문제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급선회는 하는 마당에 검철은 검찰대로 객관성있는 조사를 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세상에 객관성, 객관성 하고 주장하는 사람보다 더 큰 주관성은 없습니다."

이 부분(422-24면)을 읽는 독자는, 광주 민란은 검찰측이나 당사자들이나 국민의 `진상 조사'를 통해서 밝혀질 수도 없고, 민란을 일으킬 정도로 비이성적인 민중이 말하는 피살자 숫자 역시 믿을 수 없으니까 `광주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논지를 발견하게 된다. `후세'라는 종교적 명분까지 동원해서.

피살자 숫자가 과장되면 학살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고 볼만큼, 김주교가 어리석은 성직자가 아닐 터이므로, 그러면 가해자들이 이를 밝히면 된다는 말일까? 맥락은 다르지만, <월간조선>이 회견문의 제목으로 달았고 지하철 광고문안으로 뽑힌 <인간은 누두도 자기 허물을 고백할 의무가 없다>는 김주교의 명제는 그 가능성도 차단한다.

"우리 크리스찬의 원칙에는 <아무도 자기 허물을 밝힐 의무가 없다>는 조항이 있어요. 이것은 크리스찬 윤리의 초보단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허물을 다른 인간에게 고백토록 도무지 강요할 수 없다는 겁니다." 김주교가 마지막에 묵비권을 언급한 점으로 미루어, [아무도 자기 허물을 밝힐 의무가 없다(nemo tenebitur prodere seipsum)]는, 로마 시대부터 전해오는 법률공리가, 혐의자는 자백에 의하지 않고 증거에 의해 판결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표명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군사반란자요 시민학살자라고 하더라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물론 갖고 있다. 문제는, 자기 허물을 사제에게 고백하여 사죄를 받아야 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사목하는 주교로서, 그리고 타인에게 끼친 해악은 어떻게든 보상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보속을 고백자에게 내리는 성직자로서 이 구절을 인용한 데에 있다. 신학박사요 성직자라면 수백명 시민을 학살한 범죄자나 수천억을 횡령한 범죄자를, 맥락에도 맞지 않게 "크리스챤 윤리의 원칙"을 내세워 두둔할 것이 아니라, "민족사의 그 불행한 사건을 국민에게 사죄하고 용서받으시오!"라고 호소했어야 할 것이다.

광주에서 사태가 진행되고 있던 5월말 필자와 인터뷰한 어느 외신기자가 "대구의 고위성직자(prelate)한테서 `호남은 원래 좌익이 많은 곳이고 이번 사태도 그들이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는 발언을 내가 들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필자에게 제기한 일, 그리고 전두환씨가 국회를 없애고 조작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대구교구가 이종흥신부와 전달출신부를 참여시킨 것 외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들이 아르헨티나 주교들처럼 군사정권에 적극 협력한 다른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김남수 주교가 이 회견에서 "과거의 천주교회가 정치권[5,6공집권자를 말한다]에 어느 정도 동조해온 것은 교회의 입장이고 옳은 태도입니다"라고 한 진술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난 한 세기 동안을 가르쳐 온 사회정의라던가 3천년대를 준비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중세의 가혹한 종교재판을 사죄하고 그 희생자들을 재심하려는 입장을 굳이 천명하지 않더라도, 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반란과 3만명 국민의 학살을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테러리즘'으로 간주하는 주교들, 80년 한국의 군사반란과 광주시민학살을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분쟁"이나 "민란"의 진압으로 간주하는 주교들의 사회적 양심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 김남수 주교는 자신의 행동명분을 분명하게 밝힌다.

4천억이나 7천억이라는 액수가 세계정치사에 기록된 가장 큰 액수가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서 김주교가 어차피 "돈은 인간을 성인으로도 죄인으로도 만든다. 그많은 돈이 정치에 필요했다는 것은 아마도 박정희대통령 시대부터 계속해서 내려왔을 것이다"고 변명해 주었고, 그들의 부정축재는 "그 시대 정치인으로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허물"이었을 따름이라면서, "두 분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그분들은 나라를 이끌고 좋은 정책도 많이 했다. 비자금 문제 한 가지 죄 때문에" 욕하고 구속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강변하였는데, 거기에는 본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군사반란과 시민학살에 대해서도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지 우리가 판관이 아니다."라고 관대하게 발언할 때에도 명분이 뚜렷하게 있다.

이처럼 대자대비한 성직자의 발언에 감복하였는지 <월간 조선>의 이동욱 기자는 회견을 마치면서 김안젤로 주교야말로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님'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1989년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수산나)양을 데리러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당국이 문신부를 구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이며 주교단의 눈치를 보고 있던 시점에서, 한국천주교 주교단이 "우리 사회는 좀더 법질서를 확립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공표하였고, 김남수 주교가 주교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하며 "실정법 위반에 대해서는 당국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특권을 요구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하던 광경(89.7.27)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비유가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으로 들린다.

1996년 2월호 <월간조선> 424면에는 한국천주교 보수진영의 행동이념이 뚜렷하게 언표되어 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역사적으로 사람의 분노를 정치에 이용한 것이 계급투쟁이고 공산주의 아닙니까?" 북한이라는 원수가 존속하고 있는 한, 김주교의 논변대로라면, 남한에서 7천억 정도의 부정 축재와 2백명 정도의 학살은 보아넘길 만하고 그 희생자들은 참을 만하다! 그리고 군사반란과 학살을 문책하는 짓은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계급투쟁이다!

김주교의 마지막 말에서 드러나듯이, 아르헨티나에서나 한국에서나 보수층 논리의 핵심은 반공과 국가안보이다. 로마 속담대로 "전쟁은 악마적이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공포 역시 전쟁 못지않게 악마적이다." 지난 30년간 한반도에서 두 번의 군사 쿠데타, 군부의 계속된 집권, 그리고 대통령마다 수천억의 부정축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국민을 사로잡아온 전쟁의 공포였고, 한국천주교 역시 이 공포를 조작한 집단의 하나라는 의혹을 면치 못하게 만든 것이 김주교의 회견문이다. 종교와 신학의 정상에 있는 천주교 고위성직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서슴없이 나올 때에, 우리 국민은 그에게서 정의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보다도 반공과 국가 안보의 탈을 쓴 맘몬을 하느님과 함께, 혹은 하느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를 보지 않을까 두렵다.

[ 공동선 199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