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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읽기 6]

(경향잡지 2017년 7월)

 

아우구스티노의 정치적 사랑

- ‘세상에 대한 사랑’(amor mundi),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

 

나의 중심(重心)은 나의 사랑


고백록6권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자기가 세 여인에게 기울었던 애정(12,21~ 21,25), 친구 알리피우스에게 쏟았던 우정(7,11~11,20)을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회상한다. 그가 황실 교수로 채용되자마자, 퇴임 후 조그만 속주(屬州)의 총독(總督) 자리 하나쯤은 돌아오려니 하는 기대에서, “특히 모친이 일을 꾸미는 바람에라는 핑계로, 자기 나이 서른에 결혼 적령에서 두 살 가량이 모자란열두 살짜리 양가집 규수와 약혼을 한다(12,23). 


그러고서 아들까지 낳아주고 15년간이나 품어오던 여자를 결혼의 방해물이나 되듯이 옆구리에서 떼어내아프리카로 쫓아보낸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에게 매어 있던 제 마음은 찢어지고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는 감상적 변명마저, 자기로서는 다른 남자를 알지 않겠노라고 하느님께 맹서하더라는 치졸한 자존심마저 글귀로 남길 만큼 염치가 없었다.(15,25) 쫓아낸 여자가 남기고 간, 두 살 모자란 약혼녀가 적령을 채워야 하는 그 틈새를 못 참고 딴 여자를 두었습니다(15,25)는 고백은 차라리 솔직하기까지 하다.


먼 옛날 고향에서 뜨거운 우정을 나누다 갑자기 사별한, 이름 없는 친구에게 쏟은 격정적인 파토스(4,4,7-4,12,19)와는 달리, 진리탐구의 여정과 타가스테 수도생활 그리고 둘 다 주교로서 여생을 함께 한 알리피우스와의 우정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친구들만은 무작정 사랑했고 아울러 그들에게서 제가 무작정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6,16,26).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아우구스티노는 치열하게 사랑하였다. 여성에 대한 애욕이든 친구에 대한 우애든 학문에 대한 집념이든, 그 흐름에서 교부가 파악한 대로, 인간 실존의 중심(重心) 곧 본질에 해당하는 사랑의 한 측면이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제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갑니다.”(13.9.10)


이 말은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인간 정의를 낳는다. 논변은 간결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신약의 전제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창세 1,27)는 구약의 명제를 대입하면, 모상이 원형을 따르듯,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20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 정치철학이 간직한 정치이론을 맨 처음 간파한 사상가가 독일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500년 전 아우구스티노가 사랑을 정의하여 인간의 의지를 온통 사로잡고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대상을 감싸 안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의지(신국론 15,21,41)”라고 한 말에서 아렌트는 세계와 역사에 관한 교부의 정치적 사랑을 발견하고 세계에 대한 사랑’(amor mundi)이라고 이름 붙였다(1929년도 학위논문 사랑 개념과 성아구스티누스”).


서기 430. 영원한 도성 로마가 고트족 장수 알라릭에게 점령당하고 약탈당하자 로마 제국의 지성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자 아우구스티노는 인류사를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의 두 의지가 합작으로 전개하는 구세사(救世史)의 지평에서 바라다보면서 신국론(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04)을 집필한다. 아구스티노는 인간이 사사사로이 그리고 집단적으로 발휘하는 모든 욕망을 사랑으로 환원시키면서, 그 모든 정열과 정욕은 두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사랑의 성격이 선한가, 악한가에 따라서 지상 도성하느님 도성으로 갈라진다고(신국론 14,7), 사랑의 성격은 사랑의 질서에 의해서 정해진다고(신국론 15,22), 사랑의 질서가 바로 잡힌 상태가 곧 평화라고 역설하였다(신국론 19,13).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신국론 14,28).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명명하여 지상의 도성하느님의 도성이 갈라지는 기반을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사회적인 사랑'(amor socialis)이라고 하였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창세기 축자해석 11,15,20)

 

엉뚱한 서품식 두 차례


우리가 읽는 고백록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스티아 항구에서 모친 모니카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하고서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독백 1,1,5)라고 선언한 이후의 여생은 실로 파란만장하였다.


우선 고향 타가스테에 있던 자기 생가에서 지인들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오로지 진리탐구와 수덕에 매진하던 3년여 세월은 목가적 행복이었다. 도회지를 피하여 시골에 은둔한 까닭은 그 인물 정도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은 자칫 신도들에게 붙들려 반강제로 사제직이나 주교직에 서품될 우려에서였다. 밀라노 집정관 암브로시우스도 밀라노 교회가 주교를 선출하는 회합에 감독 차 들렸다 신도들의 호선으로 그만 주교에 뽑혀 입교와 사제서품과 주교서품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으니까....


아우구스티노가 타가스테에 정착한지 3년 뒤 사업가 하나가 수도원 입회 문제를 상의드리겠으니 도회지로 와주십사 하는 편지를 보내와서, 80킬로 떨어진 히포로 간 적 있었다. 이리저리 뜸을 들이던 사업가는 히포에 오신 김에 대성당도 둘러보지 않겠느냐 했다. 그래 그날 오후 둘이서 성당엘 갔는데 성당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뒤로 문이 잠기고 아우구스티노는 장정들 손에 번쩍 들려 제단 앞으로 떼매져 갔고, 성당을 가득 메우고서 기다리던 신도들의 갈채와 환성 속에 그만 사제로 서품되고 말았다. 391년 일이다(포씨디우스, 성아우구스티누스전이연학-최원오 역주, 분도출판사 2008, 5).


4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히포의 늙은 주교 발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주교가 공석이 된 교구 사람들이 히포에 나타나 서성거리면 사제 아우구스티노를 수도원 깊숙이 숨겨놓곤 했다. 그를 납치해다 자기네 주교로 삼아버릴까 두려웠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3956월 교구장 발레리우스가 인근 주교들을 히포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아프리카 수석주교 메갈리우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갈리우스가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 사제를 제단 앞에다 무릎을 꿇리고는 주교품을 줘 버렸다. 본인이 울고불며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포씨디우스, 성아우구스티누스전8).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노의 생애 후반은 히포의 주교로서 무너져가는 로마 제국의 악취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가톨릭 윤리를 정립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분주한 투쟁으로 점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