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 예찬

--김수복 글


[바오로딸, 듣.봄 1996.9월호]


두달쯤 전,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일면식도 없던 정태현 신부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단짝 친구 성염 교수를 대동하여 분당을 찾아갔다. 성염은 내가 친구라서 특별배려를 해서만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라면 자신을 아끼지 않는 넉넉한 성품 탓으로 항상 빠듯하고 바쁜 중에도 하루를 온통 할애했으리라. 미안하기도 했지만 모처럼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정 신부님은 전철역으로 마중나와 계셨다. 나와 악수하고 수인사를 나눈 다음 신부님이 우리를 어떤 한식집으로 안내했다. 그 한식집을 하는 사람은 오래전부터 신부님과 성염 교수를 알고 있는 사이라 했다. 자리를 잡고 나서 음식과 맥주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정태현 신부님은 정양모 신부님이 요즈음에는 기공에 푹 빠져 계시는데 건강이 아주 좋다고 했고, 나는 그 말 끝에 나도 기공을 한달쯤 배운 적이 있는데 기공 가르치는 선생 하는 말이 나도 두뇌의 송과체가 뚫렸다고 칭찬했고 또 알고 지내는 전남대학 독문학과 여자 교수 한 분은 혼자서 기공을 하느라면 몸이 공중으로 일 미터쯤 떠서 빙빙 돈다고 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더니, 덩달아서 성염 교수도 자기가 한번은 아들과 함께 몸무게 팔십 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거구 남자 머리에 손을 얹어 그 사람의 기를 받은 다음 둘이서 손가락 하나씩을 허벅지 밑으로 넣어 들으니 솜보다 가볍게 높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79년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에 잠도 못자고 취조를 당하는데 백열등 앞에서 수사를 받으면서도 기공으로 눈뜨고 자는 법을 배워 놓은 덕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이렇듯 몇 달 전에 듣․봄지에 성찬성을 소개할 때에도 말했지만, 성염은 동생 찬성과 함께 박정희가 암살당한 바로 그날 사경을 벗어나 당당히 중앙정보부를 걸어나온 국보급 보물, 값나가는 살아 있는 진품임에 틀림없다.


나는 대부분 말 잘 한다는 놈, 글 잘 쓴다는 놈,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놈, 소위 일류 대학 나왔다는 놈, 가진 것 좀 있다고 혹은 그럴듯한 자리에 앉았다고 뻐기는 놈, 사회에서 지배계급을 이루고 무지렁이처럼 보이는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이런 속물들을 구토증나게 싫어하는 뒤틀린 심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내가 성염 교수는 물론 여러 후배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내가 십여 년을 염이와 함께 공부를 했지만 한 번도 빼지 않고 항상 내가 1등을 하고 성염이 2등을 했다고 정색하고 말했더니 모두들 믿는 것 같았고 성염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 약한 나는, 실은 그와 정반대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철없는 시절 나는 성염에게 늘 가려서 지내야 하는 비운을 한탄하던 신세였다. 지금은 부러워하는 심정 없이 조금 해탈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성염은 전국에서도 머리 좋다는 호남의 수재들이 모두 모여드는 서중학교를 2등으론가 합격하고, 명문 광주고등학교를 수석 합격하고, 그 부인 말로는 교황청립 가톨릭 대학에서 수학처럼 어려운 라틴어 문학박사 학위를 A플러스로 취득한 수재, 천재 부류에 속한다. 성염이가 자기의 천재성을 자랑하는 말을 가장 가까운 내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누설한 적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쯤 내가 대신 자랑해 주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하여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머리 좋다는 것 외에 별 볼일 없다면 내가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겠지만, 성염 교수는 수천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 교수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교수들 가운데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주는 따뜻한 사회, 하느님의 뜻과 마음에 맞는 정의로운 사회, 곧 하느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기 위하여 가장 열심히 기도하고 실천하는, 명실공히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래서 나는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영리하다는 작자들 중에서 성염은 틀림없이 구원받을 사람들의 대열에 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성염이 자랑스럽다.


미안하지만 내친김에 성염의 개인사에 속한 일화를 한 가지 더 공개하겠다. 나와 성염은 소신학생으로 중학교 일학년부터 고등학교, 살레시오 수도원 수련까지 동기동창에, 서울 가톨릭 신학부는 동기일 때도 있었고 그냥 동창일 때도 있었다. 대신학교 6학년 때 일이지 싶다. 나는 수도원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고, 성염은 교구로 옮겨 신학교에서 기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신부가 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에서 성염이 나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만났다. 얼굴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 어디가 아프냐고 했더니, 아픈 데는 없는데 고민이 있다고 했다. 말해 보라고 하니, 어떤 처녀와 열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내가 놀라서 어떻게 알게 된 처녀냐고 물으니, 대학간 학술 발표 대회에서 한국신학대학 대표로 나온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에게서 헤어날 수도 없고 서품 받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또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약혼하다시피 언약을 해 둔 사이로 자기 결단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찌보면 철이 덜 든 사람으로써, 지금 기억에, 성염더러 여태까지 애쓴 보람도 없이 결혼해버리면 되겠느냐면서 적극 만류했던 것 같다. 그 즈음 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크게는 당시 약간의 내 언어장애로 인한 자신감 결여 때문에, 이미 수도원에서 쫓겨난 다음 간신히 허락을 받아, 하던 신학공부를 마저 끝내가고 있었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나서도 나는 계속 혼자 수도자처럼 살면서 교부들의 사상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광주 가톨릭 신학 대학교에서 전망 잡지 일을 거들고 있다.


이 사이에 성염은 신학교를 나와 전순란(나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씨와 결혼을 했다. 나니 부모는 직장 번듯한 부잣집 아들을 마다하고 신학교 출신에 키는 작달만한 데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성염과의 결혼을 결사반대해서, 지금은 성염을 끔찍이 아끼지만, 결혼식장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결혼이 태어남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여기고, 인류를 존속시키는 성스런 결혼을 할 때에는 인간 자신 이외의 여하한 조건도 달지 않고 사랑만으로 여자 인간과 남자 인간이 만나야 되고, 그래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도 서로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정말 순수한 사랑으로 만난, 누구나 질투할 만한 천생배필이다.


혼자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벼르던 나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성염에 이어서 결혼을 했다. 결혼하여 용케 아들 둘을 낳았다. 길러 놓으니 큰 아들이 아빠가 하는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하여 종교학과에 들어가고, 둘째 아들이 공교롭게도 내가 서럽게 물러나온 살레시오 수도원에 지원해 들어갔다. 애들 엄마는 큰 아들도 신부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고 있다.


그런데 성염과 나니 부부도 아들만 둘을 낳았다. 그 큰 아들이 내 큰 아들과 같은 대학 1년 선배로서 공부를 마친 다음 예수회에 입회할 예정으로 있고, 그 작은 아들이 내 작은 아들보다 1년 후배로 명년에는 살레시오 수도원에 입회할 예정으로 있다. 우연을 넘어 기연에 가까운 일이다. 한번은 성염 집에서 내가 웃으면서 나니 씨더러 아들을 둘 다 신부 만들면 인류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더니, 나니 말이 다른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들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인류의 대를 잇는 일은 다른 아이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고 했다. 한국 일등 신학교 출신다운 신학적 답변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염도 자기 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결혼하는 것도 은총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자되는 것도 은총이라고 여기는 나였지만 후손 남기는 일까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니와 성염의 자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주 있는 글쟁이가 맛깔스럽게 써주어야 할 인물들을 문학적 필치와는 거리가 먼 번역쟁이가 한없이 부족하게 묘사하여 겸연쩍기 이를 데 없다. 다만 성염과 그 동생 찬성이는 내 동지요 내 마음의 등대이기에 용기를 내어 한밤중에 자지 않고 컴퓨터 앞에서 자판기를 두들기고 있는 것이다.


(김수복, 번역가, 듣․봄 31 199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