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선생님 예수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 1989.7.16]

 

“죽으면 모두 그만”

다른 곳도 아닌 교회기관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운영자측에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 것 같다. 파티마 병원에 근무하는 어느 수녀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6·25를 방불케 했던 악몽 같은 88년 마지막 날을 회상하며 인간적 배신감, 허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뼈저린 치욕감, 우매한 인간들에게 쏟은 사랑의 허탈감들이 주는 그 아픔, 베푼 사랑, 노력한 도움들, 아껴 준 마음들로부터 받은 배신이었고 상처였기에 ….”

 

교회사업체 내의 정신적 분위기를 숨김없이 반영하는 글인데, 우리의 이런 심경이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종교인 특유의 독선, 베푸는 자의 우월감, 경영자들이 종사자들을 두고 “우리는 봉사하고 여러분은 보수 받는다”는 경멸로 비칠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서 쌓이는 감정적 앙금은 당사자들의 영혼에 무서운 폐허를 몰고 온다.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에 종지기 영감과 본당신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우리 집안은 성당에 딸린 사람들입네다. 우리 할아버지는 리옹에서 종지기를 하셨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월만의 본당신부님 댁에 식모로 있었고요. 우리 집안 식구 치고 성사를 받지 않고 죽은 이는 하나도 없습네다.”

“영감님은 천국에서 그분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에는 그는 오래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일손을 놀리면서 그를 곁눈질로 살펴보았으나 다시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는 잊을 수 없는 지쳐빠진 목소리로, 아득한 저 옛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가 그만입지요.”

 

교조를 보는 두 시각

지난 6월 7일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는 "가톨릭 학교 관계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가톨릭 학교 관계자들이 “교원 노조에 가담하는 것을 우리로서는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가톨릭 산하의 학교는 다른 일반 학교와 그 설립 목적이 다르고 이루어야 할 결과가 또한 다르다”는 명분에서였다. 그런데 7월 8일에는 2백 59명의 사제들이 “오늘날의 비인간화된 교육현실을 극복하고 참된 교육을 실천코자 노력하는 전교조를 지지한다”고 성명하였다.

 

지금의 평화신문 사태나 작년의 부산 분도 병원과 대구 파티마 병원의 분규를 염두에 두고, 교회 내에 앞으로도 이러한 분쟁은 계속해서 발생하리라는 가정 하에 우리의 시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난감하다.

 

교회사업의 명분은 ‘무슨 일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추첨제 입학과 의료보험시대에 사람들은 복음을 받으러 학교나 병원에 오지는 않으리라 본다. 상대방의 불행을 빌미로 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교회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교육이나 의료나 진실의 홍보이다. 거기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는지 여부는 우리 스스로 내세우기보다는 우리에게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내릴 평가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교회를 대표하노라는 경영자들이 그 사업을 ‘어떤 정신’으로 하고 있는지는 가까이서 협력하는 종사자들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다.

 

두 번째로, 근로자들은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노사문제’를 제기하는데, 우리가 종교신앙의 차원에서 ‘교권 침해’라고 응수함은 논리적 비약으로 들린다. 교회사업이 이 민족에게 하느님 나라의 표지도 되지만 그 나라를 은폐하고 왜곡시키는 ‘반대표지’도 될 수 있음을 인정하자. 교회사업기관이 ‘파견 받은 현장교회’임을 자처한다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간접 고용주의 위치에 서므로 응분의 책임이 있다.

 

사제단은 “전교조 결성이 교육을 정권 유지의 목적으로 악용하는 현정부에 대한 양심의 궐기”라고 보는데 비해서, 가톨릭재단협의회는 “노동조합이 교육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대립적 관계를 조성한다”고 해석하였다. 일단 노조가 생기면 투쟁적 분위기가 생김은 사실이지만, “노동조합들은 참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다. 어떻든 이 투쟁은 정의로운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다.(노동하는 인간 20항)

 

“현행법에 위배되니까 ‘교원노조’ 가입을 금지한다”는 말은 날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성 싶다. 더군다나 ‘대다수 국민의 마음속에 새겨진 교사상을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교원노조가 불가하다는 명분은 복음적이 못 된다. 교사들이 “성직의 존엄성을 내던지고 노동자로 전락한다”고 흥분하는 문교부의 논리 그대로다. 이 논리대로라면, 교단에 서 보지 못한 1천 5백만 노동자들, 특히 육체노동자들은 모두 ‘전락한 인생들’이 되고 만다. ‘우리 반 선생님’ 예수께서 목수 일 하는 노동자이셨다고 해서 참 교사상이 어긋난 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