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포럼 2005.5.2]

                                               내가 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염 (주교황청 대사)

20세기에 깊숙한 발자취를 남긴 교황요한 바오로2세. 한 거인이 지상을 떠났다. 자기가 믿음을 걸었던 피안으로 떠났다.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 하루가 넘는 기나긴 단말마를 신에게 마지막 제물로 바치고서.


불과 한 주일 전 3월 27일 부활절 정오, 필자는 성베드로 광장 오른편 회랑 지붕 위, 교황청이 외교단에 마련한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현 교황의 음성을 듣는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서. 이날 교황은 병세가 깊은 모습으로 힘들여 손짓으로 축복을 내렸으나 목소리는 낼 수 없어 국무장관 소다노 추기경이 교황의 부활 메시지를 낭독했다.


메시지는 불과 네 문단으로 된 아주 짧은 내용이었으나 요한 바오로 2세가 25년 간 행해 온 그의 어느 설교보다 웅변적이고 비장하여 인류에게 건네는 마지막 유언처럼 울려 왔다. 교황이 ‘인간의 구원자’라고 즐겨 부르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기도문으로 지어진 한 대목을 읽어 본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한테 평화의 언행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피흘려 성별한 지상에 제발 평화를 주십시오! 여전히 많고 많은 피가 흐르는 저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에 평화를 주십시오! 골육상잔의 전쟁 위험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온 인류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밥상에 함께 앉은 사람들에게 쪼개지고 나누어진 빵이여! 오늘도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시달리다 죽어가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에 몰살당하고 엄청난 자연재해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연대감을 간직할 힘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

역사는 카롤 보이티와를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부를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경탄, 그것을 일컬어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는 좌우명을 세우고 무려 105회의 여행으로 전세계를 누비면서 인간이 주리고 짓밟히고 스스로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다녔다. 번번이 열강에 짓밟힌 조국 폴란드의 운명, 두 차례의 세 계대전, 아우슈비츠와 카친 숲과 공산 치하, 지구상에 총성이 멈추는 날이 단 하루도 없는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종교지도자로서 몸부림쳐 왔다.


 

또, 주이탈리아 아랍연맹 대사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위대한 윤리교사"라고 불렀다. 올해만 꼽더라도 새해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교황은 강대국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테러의 유혹에 빠지는 민족들에게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으로 이기자!”고 타일렀다. 쓰나미의 재앙으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당신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인류의 고난을 나누어 지게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는 말씀으로 위로했다. 필자가 참석한 주교황청 외교단과의 신년 하례식에서는 동식물을 포함해서 지상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라고, 자기 밥상의 빵을 나누어 먹으라고, 평화는 오로지 정의가 존중되는 데서만 맺는 열매라고, 인간은 모름지기 진리에 바탕을 둔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후대인들은 동서 진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현실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체제를 포기하게 만든 그의 공적, 남반구와 북반구의 빈부간격을 좁히자던 애타는 호소, 두 차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정면 충돌을 막으려던 안타까운 노력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교회 인사들이 저지른 십자군전쟁과 이단재판과 마녀사냥 같은 수치스러운 죄과를 인류 앞에 용서 빌던 교황의 사죄도 무력하기만 했다. 20세기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증오는 600만의 희생자를 내고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인도차이나, 남미에서 끊임없는 내전과 민간인 학살과 군사독재를 자행하거나 용인하지 않았던가? 공산주의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는 또 어떻게 하고?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와 이란으로 이어질 아랍 땅의 끊임없는 전쟁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교도들과 영원한 원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언젠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날은 어떻게 할 것인가?


 

455년 만에 이탈리아인 아닌 동유럽인으로서 교황직에 오르던 1978년,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의 나이는 불과 58세였다. 혈기에선지 그는 가톨릭신자들과 인류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그리스도의 인사말을 건넸건만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 교황은 예수의 절망한 제자들이 엠마오 길의 어느 낯선 나그네에게 “ 우리와 함께 계셔주십시오!”라며 매달리던 하소연을 그리스도에게 남겼다. 〈바티칸에서〉

[성염/ 주 교황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