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2007.9.16]

[가톨릭인터뷰] 성염 전(前) 교황청 주재 대사

발행일 : 200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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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한국교회 선교역량에 큰 기대”

북한·만주·몽골·시베리아 복음화에 매진해야

전·현 교황, 한반도·북핵문제 깊은 관심 표명

[전문] 가톨릭신문은 이번 호부터 교회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충실하게, 가톨릭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명망 높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가톨릭 인터뷰’를 게재합니다.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일상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가톨릭인터뷰’를 통해 제시되는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삶의 귀감으로서,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소명에 대해 좀 더 깊이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이 새 기획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로마 이승환 기자]

거저 주신 은총의 시간들

가톨릭인터뷰가 만난 첫 인물은 성염 전(前) 주 교황청 한국대사다. 2003년 6월부터 4년간 대사로 봉직한 그는 9월 15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이임인사를 한 뒤 16일 귀국길에 올랐다.

성염 전 대사는 삶의 전부가 그랬던 것처럼 대사로서 4년도 오로지 거저 주시는 은총이었다며,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 문제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크나큰 배움이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성염 전 대사가 가까이서 바라본 교황청과 세계교회, 그리고 교황청이 생각하는 한국교회 역할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인터뷰는 9월 4일 저녁 이탈리아 로마 주 교황청 한국대사관저에서 마련됐다.

- 교황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중책을 마무리 짓게 되셨습니다.

▲ 지난 4년간 북핵 문제로 한반도가 격동을 치를 적에 교황청은 우리나라를 편들어 국제외교에서 커다란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무력충돌이 일어날 분위기에서도 교황님은 ‘평화적인 대화’(6자회담)를 끝까지 주창하셨고, 북한의 핵실험 직후 대북식량원조가 모조리 동결되었을 때도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적 식량지원’이 계속되도록 국제사회를 독려하셨습니다. 제 임기 중 두 분 교황께서 공식석상에서 한반도와 북핵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호소하신 것이 여섯 번이나 됩니다. 대한민국 대사로서는 보람이 컸습니다.

지난 4년간은 로마에 있는 한국교회가 함께 수행한 주교황청 외교활동이었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로마에서 연학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께서 대한민국·교황청 수교 40주년 행사, 해마다 치른 국경일 리셉션, 정추기경님 서임 축하식도 자기 일처럼 도맡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재외공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어서 교황청 성직자들이나 이곳의 외교관들은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이 조금이라도 위상을 올렸다면 그분들의 공적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 재임 기간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었다면?

▲ 우연이겠지만 큰 일(大事)을 많이 치렀습니다. 지난 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도 있었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최후를 지켜본 일입니다.

2005년 3월 27일 부활절. 거실 창문에 힘겹게 모습을 보이신 교황님은 강복을 주시고 소다노 추기경이 부활절 메시지를 대독하였습니다. 25년간 행하신 모든 강론과 연설문 가운데 가장 짧았던 그 메시지에서 교황님은 Mane nobis cum Domine! (엠마오 제자들이 주님의 옷소매를 붙들고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지요!’라고 드리던 호소)를 무려 여덟 번이나 되풀이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엄청난 비극들을 눈앞에 둔 채로 인류와 교회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 나가는 한 목자의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그분이 운명하고서 로마로 몰려들던 400 만 명의 젊은이들, 뙤약볕에서 무려 열 시간을 줄지어 기다린 다음에야 그분의 시신 앞을 지나가던 젊은이들의 눈이 과연 오늘날 나자렛 사람 예수와 그분의 교회한테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한겨레가 바티칸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 대사님께서 만나신 두 분 교황님은 어떠신지요?

▲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비행기를 내려와 땅에 엎드리더니 우리 흙에 입맞추며 “순교자들의 땅이로다”라고 뇌이던 장면을 우리 국민들은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2003년 제가 대사신임장을 제정하던 날 손이 떨리고 침이 흐르고 말씀이 어눌하던 모습에서도 그 분의 카리스마적 인물상은 바래지 않았습니다.

맨발로 팔레스티나 먼지 나는 땅을 돌아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시던 예수님, 지중해 연안을 돌며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설교하던 바오로 사도, 그리고 재위 25년간 비행기로 전 세계를 돌면서 ‘인간의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던 교황 사이에는 어떤 연장선이 있음을 역사가들은 발견할 것입니다.

대신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서 사람들은 조용한 학자적 성품,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결연히 가르치려는 지혜, 유럽 문화의 뿌리로서 그리스도교를 일치시키고 교황청을 서서히 개혁해 나가려는 의지를 봅니다.

일반알현 때 그분을 뵈러 오는 신자들이 선대 교황님 때보다 두 배로 늘어 요즘 성 베드로 광장이 아니고 실내에서 알현이 있는 경우에는 두 군데로 나누어서 행사를 치르고 있습니다.

- 대사님께서는 복음적 소명에 바탕을 두고 사회적 변화에 깊은 관심을 두어온 진보적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한국교회 안에서 교황청에 대해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제삼세계 교회의 진보적 학자들에게서 성찰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대사로 재임하시며 이런 견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 1997년 8월 31일에 레이디 다이애나가 죽고 한 주일 뒤인 9월 7일에는 마더 데레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분은 모두 인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도 다이애나 같은 자태를 찾는 신앙인들이 있고, 마더 데레사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종일 밭에서 일하다 온 엄마의 땀 냄새에 친숙한 자식들에게는 바티칸의 권위나 통치방식, 화려한 전례가 낯설테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친숙하게 마련입니다. ‘해방신학’을 정립하고 실천한 제삼세계 신학자들이나 ‘정의구현’에 몸 바치고 희생된 활동가들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르소의 바울로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육성으로 전하던 진리가 21세기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중계로 인류에게 전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덩어리가 되신 말씀이 베들레헴 마구간과 말구유라는 공간, 마리아와 요셉을 필요로 했듯이, 오늘의 세계는 바티칸과 베드로대성당이라는 공간과 교황이라고 일컫는 인물에게 구현되는 도덕적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신앙인들의 투신을 강조하시고 그 의무를 일컬어 ‘정치적 사랑(caritas politica)’이라고 정의하신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교황청의 북한에 대한 관심은 어떤 것이며, 향후 교황청과 북한과의 관계 개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 남한교회가 북한교회에 갖는 관심 이상으로 교황청이 북한교회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북한 교회는 50년 넘게 교회가 살아있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음도 사실입니다.

지난 7월에 교황님이 중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보내신 서한을 발표하신 이후, 저는 교황청 인사들을 찾아가서 “중국과 북한의 친밀한 관계로 보아서 두 교회는 대성당의 대문과 그 대문에 딸린 쪽문에 비유할 만하다. 중국이 교황청에 대문을 열면 거기 딸린 쪽문은 저절로 함께 열릴지 모른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북한에 대한 관심을 가져달라. 우리 조상들이 스스로 복음을 가지러 교회를 찾아갔고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교황청에 호소했으니, 이번에는 교황청이 스스로 북한을 먼저 찾아가는 수고를 해 달라. 남북정상회담은 그런 면에서 아주 좋은 기회에 해당한다”는 요지로 설득해 왔습니다.

북한 측으로부터 어떤 신호가 오기를 교황청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 현안에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음이 제게는 미안한 마음으로 남습니다.

- 최근 한국교회의 가장 큰 화두는 아시아교회 복음화입니다.

▲ 아시아 교회는 자기본연의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교회는 성령께서 이미 우리 조상들의 종교와 역사에 일구어 놓으신 문화의 반죽에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누룩을 넣는 역할을 해야겠지요.

라칭거 추기경께서 교황이 되어 맨 먼저 행하신 행정조처로 교황청 종교간 대화평의회를 사실상 문화평의회에 통폐합하였을 적에, 뜻있는 사람들은 그분이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도모하는 일에 치중하고 아시아교회의 사정은 소홀하지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레겐스부르크 강연 이후 그분의 정책이 수정되었고 종교간 대화 평의회가 본래의 역할을 되찾았습니다.

아무튼 교황청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바라보면서 한국, 인도와 필리핀, 베트남의 교회가 담당할 선교역량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음을 고위인사들의 말에서 자주 느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북한과 만주, 그리고 몽골과 시베리아에서 맡을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 귀국 후 계획은?

▲ 제 본래 일은 번역이었습니다. 제가 80년대에 늦깎이로 로마에 유학한 것도 교부들의 작품을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때도 김수환 추기경님의 추천으로 독일 미씨오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니 제가 교회의 은덕을 얼마나 입었는지 아시겠지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작품들을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에 치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약력

942년 7월 11일 전남 장성 출생, 1972 가톨릭대학교 신학사, 1976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석사, 1986 교황청립 살레시안대학교 라틴문학박사, 1988-1991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1991-2005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2003~2007 주교황청 한국대사

사진설명

성염 전 대사.

성염대사가 재임시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 lsh@catimes.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