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는 빛과 소금인가?

 

                                                                                  [가톨릭사회 1995 봄호]

 

총체적 부패 속의 빛과 소금

독자들은 영남의 가톨릭 교회가 영남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을 단지 사회사업이라는 좁은 테두리에서 보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복지시설이나 다양한 교육기관, 의료기관 등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외에도 다른 종교들도 다투어 수행해 온 애덕활동이며, 우리 정부도 사회복지 정책에 눈을 뜸에 따라서 차츰 국가에 이양되어 가는 중인만큼, 교회는 국가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서 이를 보완하는 활동으로 여길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관들이 끼치는 성과는 그 수혜자들이 판단하고 선전할 일이지 가톨릭 운영자들이 내세울 공적은 아닌 성싶다. 분도병원을 찾는 환자는 아프기 때문에 의료보험증을 갖고 온 것이지 꼭 ‘가톨릭’병원이기 때문에 자선을 입으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데레사여고나 성모여고에 온 학생들은 은행알이 그 쪽으로 굴러서 왔지 ‘복음’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니리라. 우리가 영남 땅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루가 17, 10)라고 고백한다.

 

마음 같아서는 가톨릭 신자 아니라 국민 누구라도 법 없이 살아갈 선량들이다. 그렇지만 정작 본인이 집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는 어떻게든 한 뼘이라도 늘여짓고 주차시설, 소방시설을 빼먹는다. 인천의 세금도둑들을 비웃으면서도 정작 자기가 다액의 양도소득세나 상속세를 내야 할 때에는 백방으로 손을 쓰고 세무서원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고서라도 세금을 감면받는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나서는 검찰, 경찰, 관청의 ‘백’을 총동원하여 빠져 나갈 궁리를 찾는다. 성적이 미달한 외아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입시에 닥치고 나면 교육계의 인사를 샅샅이 찾아서 부정입학을 시도한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적하는 ‘총체적 부패’는 ‘모든’ 국민의 부패에 뿌리가 있는 듯하다.

 

우리가 교회다!

“아니, 교회가 빛이요 소금이냐를 따지는 마당에 개인의 사생활은 왜 들추어내는가?” 답변은 간단하다. “우리가 교회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부산교구청이나 교구장이나 사제단이 가톨릭 교회가 아니고 영남에 사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언행이 얼마나 ‘가톨릭 교회다운가?’를 가름하는 시금석으로 필자는 영남 가톨릭인들에게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딱 하나 꼽겠다. 독자의 돈독한 신앙심을 북돋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보다는 아마도 마음의 평화를 뒤흔드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정신을 톱니바퀴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여기저기서 톱니를 마구 갈아버린 그런 기계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 지옥의 뻐꾸기시계는 8분 33초 동안 정확히 가다가, 14분을 그냥 뛰어넘고, 6초 동안 정확히 가다가, 2초를 뛰어 넘고, 2시간 1초 동안 제대로 가다가, 1년을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다. 없어진 톱이란, 물론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간단하고 명백한 진리들인 것이다. 톱니바퀴를 고의적으로 이와 같이 줄로 갈아버린 때문에,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들에 귀를 막고 눈을 가렸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 太初의 밤, 중앙일보사 1982)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우리는 만민의 구세주로 섬긴다. 80년전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을 ‘불손한 조선놈’(不逞鮮人)이라고 부르던 언론들이 80년 지나서 의사(義士)로 칭송하고 있다. “전라도 것들은 좀 죽어야 해!”라는 유언비어가 영남에 돌던 광주사태가 10년이 넘자 ‘5.18민주화운동’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교육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신성한 교육자를 노동자로 전락시킨다!”고 하여 쫓겨난 전교조 선생님 수천명이 3년도 못되어 교육현장으로 돌아왔다.

 

내 종교가 정의와 평등의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가, 재물의 신, 안보의 신,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의 신, 맘몬을 섬기는 ‘미신’인가 식별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안중근 토마스에게 살인자라고 최후의 고해성사마저 거부한 것이 경성[서울] 천주교였기 때문이다. 또 광주시민 학살에 대해서 한국 천주교주교단은 굳게 침묵하였기 때문이다.(“서로 화해하라!”는 상임위의 성명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전교조 선생들을 제일 먼저 쫓아낸 학교들이 가톨릭 학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영남주의를 청산할 수 있는가?

필자는 남한 사회에 진정한 정의사회를 건설하고 남북분단을 극복하여 이 민족이 하나되는 터전을 마련하려면 신앙인들이 나서서 먼저 지역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고 있다. 멀리는 이태조부터 시작하고 가까이는 박정희 군부정권에서부터 비롯한 호남차별, 선거때마다 터져 나온 영호남 대결(88년 대통령선거야말로 이 상처를 극복할만한 유일한 기회였는데 양 김씨의 야망으로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까닭 없는 증오가 서린 이 상처는 신앙인들과 교회가 아니면 그 누구도 치유에 나서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을 필자는 알고 있다. 소위 ‘동학란’과 ‘광주사태’로 주로 피해자의 위치에 선 호남인들에게도 같은 신앙으로서 호소할 바가 있지만 이 글은 주로 영남인들이 읽어줄 글이므로 먼저 영남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지난 35년간 남한의 정치, 재계, 관료, 군부의 모든 요직을 점유하고서 남한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교통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려온 영남인들이 무슨 수로도 비영남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집념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사회와 민족통일에는 파국적인 장애가 된다. 북미회담의 성사로 북진통일이나 흡수통일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남한 내의 기득권층이 정치와 경제 및 문화의 혜택을 골고루 나누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남북한이 골고루 나누겠다는 의사 없이는 진정한 통일도 없다. 5․16과 유신헌법, 12․12와 5․18 광주시민 학살에서 보듯이, 군사반란과 내란까지 감행하면서 정권을 빼앗고 누려온 자들의 행태에서 보아왔듯이, 국가의 모든 이익을 독점하는 집단들은 민족의 안위와 동질성보다는 필히 집단이익을 앞세운다.

 

지난번의 개각 명단은 홀대받은 호남인을 절망케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독점한 영남인들의 양심을 부끄럽게 하였다. “호남인들이 어때서?”라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말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경부선이 30분 간격으로 새마을호가 있음에 비해서 전라 호남선을 통틀어 하루 네 편의 새마을호가 편성되어 있음을 보리라. 부산까지는 고속전철이 공사중인데 호남선은 일반철도 복선도 다 되어 있지 않다!)

 

가톨릭 아닌 다른 종교도 가진 것을 나누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지역 사람들을 용납하도록 가르치겠지만, 지난 세월 자행되어 온 이 땅의 편파주의를 극복하는데 ‘공번된 교회’ 가톨릭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영남의 신자들이 정계와 군부 및 재계에 두루 자리잡고 있는 만큼, 그들이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남한 사회 내에서도, 북한을 상대로도 진정한 나눔을 시행함으로써 거국적 화해와 통일의 심리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겠다.

 

“북한이 먼저 용서를 빌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고 하는 가톨릭 신자가 있다면 그는 용서라는 것을 무시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자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듯이, “우리가 대권을 계속 잡아야 하는 것은 ‘영남인의 정서’다!”라고 하는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교회가 영남 땅의 빛과 소금이기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영남의 정서’와 함께 장님이 되고 지역이기주의로 함께 썩겠다는 고집이다.

 

이런 노력이 아무리 힘겹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지향하도록 구원되었다!”(로마 8, 24) 역사와 타인(호남인,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 심지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가톨릭이 비추는 빛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가톨릭인들이 지역사회에 내는 소금의 짠맛은 아량이리라.

(가톨릭사회 1995.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