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의 추억(루가 4, 18~30)

--마리아의 독백

 

                                                                                      [성모기사 1994.5월호]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날을 내가 무슨 수로 잊는담? 아무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히지 않을 날이지. 그날따라 마을 사람들이 온통 다 모였고 회당 안은 가뜩이나 흥분된 분위기였어. 우리 동네 출신, 우리 아들 예수가 드디어 귀향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아버지를 여의고서 누구보다 일찍 목수로 나선 우리 아들이지만, 동네 어느 젊은이보다 곱상스럽고 고분고분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어. 아들의 일솜씨는 나사렛은 물론 가파르나움에까지 소문이 자자했고 헤로데왕이 호수 저편에다 신도시 티베리아스를 세울 때에도 우리 아들은 젊은 나이에 대목으로 뽑혀 갈 정도였다구. 내가 무슨 복이 있었던가 모르지만 하여튼 우리 모자 둘이서만 살던 그 몇 해는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세월이였다구.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한다."면서 내 곁을 훌쩍 떠나버렸단 말야. 목수도, 고향도, 어미와 친척도 다 팽개치듯 버리고. 나야 지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아기를 가졌을 적부터 그런 날이 오려니 걱정 반 각오 반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까 이 어미의 맘이 얼마나 놀라고 서운하고 허전했겠는지 짐작이 가고 남을 게야.

 

소금 바다 가까운 "빛의 아들들"인가하는 수도원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소문도 들려 왔고, 제 6촌형 요한이 도를 닦는다는 광야에서 보았다는 소식도 내 귀에 들려 왔지. 제 6촌형이 비명에 가고 나서 (엘리사벳 언니 내외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오, 주여!) 예수 이야기가 심상치 않게 들려 오더란 말야.

 

우리 아들의 고매한 인품이며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이며 병이란 병은 모조리 낫게 한다는 기적술이 선풍을 일으키는 중이었어. 나는 그 모든 소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새겨 두고 있었지. 예수의 설교를 듣다못해 어느 아낙이 “당신을 품은 배와 당신을 먹인 젖은 복도 많겠네요.”하며 부러워했다는 말에는 솔직히 기분이 참 좋았지. 아무렴.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이 무슨 흉조란 말이냐?”

며칠을 두고 난 내 정신이 아니였어. 안식일 전날 몇 해만에 돌아온 아들 얼굴을 보았을 적의 내 심경을 헤아려 보라구. 생김새는 같은데 이미 내 자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더란 말야. 자식은 뱃속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발치로, 그 다음에는 먼 발치로, 어미 안 보이는 데로 멀어져 간다고는 겪어서 알지만 이건 얘기가 달라.

 

그러니까 예언자, 아니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구나 싶더란 말야. 대견하기도 하고 섭하기도 하고… 무슨 장정들을 한 패거리 데리고 왔어. 우리 아들과 연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인데도 우리 아들한테 ‘선생님’이라고도 하다가 ‘주님’이라고도 하더구먼.

 

안식일 예수와 그 애의 제자들을 따라서 회당으로 갔지. 여자들 좌석에서 맨 앞에 앉았지. 그야 그날 말씀은 우리 아들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동네 아낙들이 나를 그리로 떼밀었지. 회당장이 예수를 상좌로 모셔 내니까 사람들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어. 우리 아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지 가슴이 뿌듯하더군. 예수가 낭랑하고도 근엄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었어.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 ” 어미의 마음을 어쩌면 저처럼 잘 알아줄까? 이건 이사야 예언서였어. 내가 처녀 적부터 제일 좋아했고 예수 어렸을 적에도 그 애한테도 내가 어지간히 많이 읽어 들려주었지. 그래선지 몰라도 예수는 이사야서와 시편을 제일 좋아하고 자주 펴 읽었었어.

 

그런데 살갗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어 나는 갑자기 눈을 떴어. 뭔가 심상치 않았던 거야. 예수의 설교가 이사야서를 두고 이어지자 신도들 사이에서 “쯧쯧쯧” 혀차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나사렛이야 초라한 동네지만 출세해서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헤로데당 하는 친척들을 둔 사람들이었어.

 

분위기가 갑자기 식었고 아까까지 흥분해 있던 사람들이 눈을 부아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어. 아주 적대적인 눈빛이었지. 그런데 예수는 물러서지 않았어. 언성을 높여 “정말이지만,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라고 내뱉다 시피 했어.

 

그 뒤에 내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은 나로서는 여태도 까닭을 모르겠다. 예수는 동네 밖으로 쫓겨나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고 도망가듯 서둘러 마을을 떠나야 했거든. 단 하루에 만사가 절단나고 그 애는 실패를 본 거야. 아침나절에만 해도 온몸에 부러움을 사던 나는 동네 여자들의 싸늘한 눈총을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그 애도 고향 나사렛에는 살지를 못하였고 이웃 가파르나움에 가서 살아야만 했지.

 

왜? 왜? 왜? 나는 속으로 까닭을 물었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비끌어져나간 것일까? 메시아가 오시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준다는데 왜 나사렛 사람들이 그토록 분기탱천했을까?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어.

 

홀어머니의 자식

그래 그거야! 내가 처녀 몸으로 예수를 임신하자 동네 사람들 눈에 띨까 두렵다며 어머니가 사촌 언니 엘리사벳한테 나를 보냈지. 마침 늘그막에 아기가 선 언니 수발하러 가 있으라는 것이었지. 아인카림에 가 있으면서 내가 지어 본 노래, 여태까지 내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 노래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때 엘리사벳 언니는 내가 지었다는 그 노래 가사를 읽어보고서는 기겁을 했어. 당장 그 양피지를 빼앗아 감추려 들었어. “이런 글을 보면 네 약혼자 요셉보다 장로들이 널 먼저 때려죽일 게다. 얘! 요셉이야. 너하고 갈라서면 끝나지만 장로들은 널 혁명 당원으로 걸어 넣어 죽일게 틀림없다. 너 정말 큰일 낼 애로구나!”

 

맞아. 예수는 이 홀어미 밑에서 컸어. 배운 것도 홀어미한테서였고, 결국은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옳아. 천사의 말씀은 내가 낳을 자식이 메시아라길래, 우리 아들이 세울 나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참다운 세상,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그 노래로 그려 본 것이었는데, 그게 예수의 머리에 꽉 박히고 만 것 같아.

 

내가 기어이 고집을 부려 예수를 낳자 친척들은 나를 당차다고 했지. 독하다는 욕일 게야. 외아들을 키우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식을 당차고 모질게 키운 셈인가 봐. 나야 여자라서 언니 말대로 큰일을 내지는 못했지만 우리 아들은 기어이 큰일을 벌이고 말 것 같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에서 마음의 위안이나 바라고 성령의 방언이나 바라고 희한한 기적을 바랬는데, 예수는 하필 사회정의니 뭐니를 꺼내어 힘께나 쓰는 사람들의 비위를 뒤집어 놓은 게야. 이 어미가 잘못 가르친 겔까?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그 애는 출세하기는 이미 틀렸고 제 명에 죽기도 어려울 것 같아. 불길한 조짐이야....

(성모기사 199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