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성탄절의 의의

예수의 사랑과 평화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일치

 

                                                                                     [내외저널 2001.12월호]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탄절.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미움과 전쟁, 증오와 경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증발해 버린 사회. 절대적인 인간 사랑의 삶을 실천했던 예수의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찍이 해방신학을 우리 사회에 소개해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서강대학교 철학과 성염 교수. 그에게서 고귀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민중적 삶과 인본주의의 삶을 실천했던 ‘나사렛 사람’ 예수의 얘기를 들어본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성탄절의 가장 큰 메시지는 사랑과 평화. 이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범죄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지금 주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미국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또 이에 대해 많은 나라가 침묵, 방관하고 있어요. 이래서는 예수의 사랑을 믿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주위를 돌아보면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훨씬 많이 펼쳐지고 있어 문제에요. 한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도 서러운데, 또 다시 동서로 갈라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화해와 평화는 모든 종교인이 지켜야 할 기본 덕목인데 시대착오적인 멸공통일을 외치며 분열을 일삼는 일부 극우 성향의 종교인들도 있어요. 이건 종교인으로서 스스로의 근본과 도덕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사실 12월 25일은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예수가 태어난 날짜도, 계절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요. 지금의 성탄절은 고대 로마에서 열리던 12월 24일의 아폴로 대축제에서 유래한 거에요. 아폴로는 제우스의 아들로 위상이 아주 높았던 데다가 25일부터는 해가 다시 길어진다고 해서 로마인들이 이 날을 크게 축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이 날을 성탄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러나 유래야 어찌 됐건 후대의 사람들이 해마다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리는 것은 신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인간의 지위가 무한히 높아지고 아주 귀해졌으니까요.

 

또 당시 사람들은 신과 직접 통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사람, 제관과 제사장만이 신과 통할 수 있었지요, 그들은 이를 교묘히 받아들여 높은 위상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이의 근간을 뿌리부터 뒤흔든 것이 예수였어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뤄지는 관계가 곧 인간과 신의 관계가 통한다고 얘기했지요. 이는 기존 종교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도 일치하는 겁니다.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상(模像)인 인간의 존엄성이 완벽하게 되살아난 거에요. 이를 계기로 만물의 척도가 신이 아닌 인간을 기준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겁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 담긴 뜻은?

 

예수를 나타내는 호칭은 아주 다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등등. 그러나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한 말은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이에요. 당시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면 유대 사회에서도 가장 천시받는 계층에 속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를 구원할 예수가 가장 천한 계층에서 나왔다는 얘기지요. 당시 지도층은 이런 이유 때문에도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에요.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말에는 평범하지 않은 뜻이 담기게 됩니다. 자기 헌신적인 삶, 민중적인 삶, 만인에 대한 사랑 등 지극하고도 절대적인 인본주의의 삶이 배어 들어가게 되지요.

 

예수의 외모는 또 어떤가요?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던 푸른 눈, 새하얀 피부의 가냘픈 금발 미남 예수는 사실과 다를 것이라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올 3월에는 영국의 법의학 교수가 최첨단 법의학 기술로 당시 유대인의 두개골을 복원해 예수의 모습을 새롭게 재현해냈지요.

 

그런데 그 모습은 고귀하고 우아하던 기존의 예수 이미지와 완전히 반대였어요. 시커먼 얼굴에 흑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짧고 더부룩한 곱슬머리, 두텁고 투박한 입술, 마치 소도둑과 같은 이미지의 예수는 어디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민중 그 자체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반면 예수가 죽을 당시에 입고 있었다는 옷, 일명 ‘거룩한 염포’의 흔적으로 복원한 예수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에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예수의 모습과 유사하지요. 모두들 자신들이 믿는 예수의 모습이 진짜라고 주장해요. 하지만 어느 하나 똑같지 않은 예수,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는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신분적으로 전혀 내세울 것이 없었던 만큼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외모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성경 어디에도 예수의 외모에 대한 말은 나와 있지 않지요. 누구나 자신만의 예수상을 가슴에 그려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답이 없다고 하는게 정답일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의 외모를 따르는게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겁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 역시 흑인으로 그려진 그림이 많아요. 말 그대로 마음에 와닿는 대로 그리면 되는 겁니다. 예수의 생전 모습을 복원해 내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일일지 몰라요. 왜냐하면 외모에 따라서 예수의 거룩한 삶이나 고귀한 사랑이 퇴색하거나 달라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성경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당시 유대인들이 믿었던 신은 전지전능한 동시에 무서운 심판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와 같이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지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아버지와 같이 끝없이 이해하고 받아주는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겁니다.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를 닮아 인간과 인간끼리도 서로 지극히 사랑하라는 내용이 성경 곳곳에 들어있어요.

 

그러나 성경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역사에 따라, 또 이를 읽는 개개인의 인격과 성숙도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성숙도가 낮을수록 문자 그대로, 또 율법적으로 해석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깨이고, 진보한 사회일수록 인류 공동체 의식에 입각하여 다양한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성서를 꾸준히 읽고 있는데 나이에 따라, 읽는 상황에 따라 매번 새로운 깨달음을 얻곤 해요. 이게 바로 성서의 매력이 아닐까 싶군요.

 

또 성서가 놀라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작은 한 권의 책에 모든 유형의 인간이 다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을 보면서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의로운 인간을 보면서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찾게 되지요.

 

여하튼 최근에는 사람들의 변화한 의식을 반영해 새롭게 해석된 성서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성서가 쓰여졌던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은 물론, 현대의 역사와 사회적 시각에서 성서를 읽고 보다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구원이나 천국은 신앙인의 전유물인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떠나서 양심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성실하고 의롭게 살면 구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또 누구든지 올바르고 선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그것은 당연히 구원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타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곧 하느님의 사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리스도를 알고 이에 의지하면 신자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마음이 더 든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때는 이 역시 어떻게 가늠하고 계실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예수가 끝없이 설교한 것 역시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 현실로 바꾸어 말하면 정의이고, 서로 나누며, 사회적으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개개인이 몸담고 있는 삶의 현장, 이를테면 가정, 직장, 학교 등에서 바른 삶을 구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구원이라는 것도 실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예수는 구원의 핵심을 가리켜 ‘하느님의 나라가 와있는 상태’라고 얘기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예를 들자면 친구간에 우정이 돈독한 사회, 부부간에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사회, 사회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골고루 나누는 사회가 모두 구원된 세상의 모습과 통하는 겁니다.

 

또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 서로 용서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사회, 하느님의 뜻을 받고 태어난 우주의 모든 생명을 지키려는 사회가 구원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하나하나 성취될 때마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신의 존재 의미는?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이, 이러한 삶이 어디에서 온 걸까 생각해보는 순간이 있어요. 또 아름다운 우주나 자연을 보면서 혹시 위대한 존재가 있어 이것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지요.

 

설사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참된 것을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 진리를 탐구해 가려는 자세 등을 가지게 마련인데, 저는 이러한 의지 역시 인간의 의식 너머에 진리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바로 그 ‘무엇’에다 이름을 붙이신 그게 때에 따라서는 ‘신’이 될 수도 있는 거지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참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에요. 그 배후에 무언가 우리 인간을 그러한 방향으로 이끄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요? 여기에 하느님을 붙이면 하느님이 되고, 태극을 붙이면 그 때는 또 태극이 되고 하는 거지요.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꿈꿀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에는 분명히 악이 존재하고 있어서 사람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져도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내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신이 나서서 해결해 줄까요? 무조건 신에게 기도하고 매달린다고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질까요?

 

저는 사회적, 역사적으로 각자가 책임을 다 한 후에야 하느님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또 인간이 기울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후에는 역사에, 또 신의 손에 맡겨야 되겠지요. 그러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엄연한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종교분쟁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 아닌가?

 

멀지 않아 즐거운 성탄절이 다가오지요. 천사들의 영광과 노래가 온 천지를 덮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경사스러운 한편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성탄에 대한 모독이고,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든 종류의 전쟁은 비인간적인 겁니다. 특히 종교를 명분으로 한 증오나 전쟁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얼마전 신문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어린 소녀 사진을 봤어요.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요? 옷이라고 해봐야 헐렁한 헝겊을 걸친 것 같은 어린 소녀가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걸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전쟁은 하루빨리 끝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에요, 미국이 만약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10분의 1이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었다면 이 세상에 테러와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겁니다.

 

종교인일수록 모든 종교를 폭넓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로 인해 다투고 갈라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바른 사회 건설에 앞장서야 합니다.

 

(강윤경 기자 내외저널 200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