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단의 침묵과 사제단의 발언

 

                                                                                  [생활성서 1995.12월호]

 

주교단은 다시 침묵하였다. 한국 민족사의 진로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5․18 광주민중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양심가책이 각종 시위와 서명 작업과 성명서로 표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보수적인 지식인들과 개신교 집단들까지 동참하여 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함성이 드높은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여 1995년의 추계주교회의(지난 10월 9일부터 12일까지)는 5․18 문제를 묵과하고 넘어갔다.

 

비록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의 입장 표명이 있었더라도 주교단의 침묵은 결국 6공의 5천억 원 부정축재도, 광주민중학살도, 군사 쿠데타도 신앙과 무관한 속세의 아비구환이요 구원과도 무관한 정치적 사건으로 각자가 알아서 생각하고 처신하면 되리라는 관념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지 않을까 염려된다.

 

물론 하느님은 영남땅 흙으로 영남인을 빚으시고 호남땅 흙으로 호남인을 빚으실테지만 다만 인간의 콧구멍에 불어 넣어주시는 숨결만은 하느님의 얼이라고 신앙인은 배운다. 따라서 5․18 문제나 통일 사목에 신중한 까닭은 아무래도 주교님들이 주로 이북과 영남을 출신지(호남인은 단 한 명)로 하기 때문이리라는 억측들은 삼갔으면 좋겠다.

 

이럴 때일수록 필자는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단체들의 존재와 역할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본다. 목자들도 양떼도 민족의 현안 문제를 앞두고 깊은 동면에 빠져 있을수록, 사제직에 담긴 예언자적 카리스마를 깨닫고 소리쳐온 분들에게 존경심을 느낀다. 5․18 학살자 처벌, 노태우씨의 5천억 원 부정축재, 공정한 사법권 행사를 두고 사제단은 부단히 또 용감하게 국민의 소리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년 한국 천주교 안에서 이 단체에 가해져온 공식적인 비난에 대해서 누군가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리라.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던 바로 그 주간 "가톨릭신문"(1979년 10월 20일자)에 성명서를 낸 ‘교회현실을 우려하는 연장 사제들’(44명)이었다. 그 중 세 분은 현재 주교가 되었다. 그들은 사제단의 활동으로 “교회 내의 불일치”가 조성됨을 안타까워하며 “성전과 거룩한 전례의 속화, 일치를 저해하는 교회 내의 탈선 단체, 교도권의 인준 없이 임의로 남발되는 모든 성명서를 근절시켜” 달라고 주교단에 청원하였다.

 

그 논거는 “성직자들은 평신도 교육이라는 제2선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사회 제1선에서는 평신도들 스스로가 복음을 증거하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문장에 나타난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인권을 옹호하려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마저 “내정간섭의 오해나 마찰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0․26 이후의 격동 속에서 이 사제들의 의견은 논의될 여유가 없이 잊혀진 것 같다.

 

6월 혁명을 앞두고 가톨릭신자들과 단체들이 정치, 사회문제에 참여하자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가 나섰다. 그는 1989년의 춘계주교회의(3월 7일)에서 행한 연설에서 “교회법이 요구하는 바 교회 권위의 필요한 사전인가도 없이 스스로 ‘가톨릭’이라 자처하는 일부 단체들이 한국 교회에 있고 … 그 단체들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흔히 주교님들의 사목적 권위를 감히 침해하려고 하고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도 오해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사제단을 위시한 진보 단체들에 제재를 가하라는 교황대사의 암묵적 요청을 주교단은 지혜롭게 묵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다 그해 7월 정의구현사제단이 임수경 양을 데리러 문규현 신부를 평양으로 파견한 사건이 터졌다. 때마침 통일관계 세미나를 갖고 있던 주교단은 즉각 성명서(1989년 7월 27일자)를 내어 문 신부 방북에 대해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인한 단체가 아니더라도 천주교 신부의 단체라는 점에서 주교단은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사제단의 행동은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각자가 행동하는 사람들의 자기 주장이 과도히 분출”한 것으로 단정되었고, 사법 처리를 망설이던 당국에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좀더 법질서를 확립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건넸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은 기자회견 중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정법 위반에 대해서는 사법처리가 마땅하다.”고 발언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사제단의 결정을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 수용하지 못할 행동”이라고 단정한 주교단의 평가는 복음과 교회가 앞장서서 이 사회의 분단의식과 당대의 공안정국을 해소시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상황을 뒤따라가겠다는 소극적 논리로 비쳐지기도 하였다. 어떻든 로마 교회의 카사롤리 추기경은 주교회의에 공문(Prot. no. 1510/89)을 보내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관련된 성명서에서 주교단이 공동입장을 취해주신 점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가입한 사제들이 자신들의 영적 사명에 대치되고 교회법에 저촉될 뿐 아니라 가톨릭 공동체와 국가에 혼란과 대립을 조장하는 그 단체활동”을 중지시키고 “필요하다면 단호한 조치도 취해야 할 것입니다.”는 주문까지 덧붙였다.

 

그래도 정의구현사제단이 주교단의 입장을 수긍하지 않고 문규현 신부 북한 파견을 추인하자(1989년 7월 31일), 한국 천주교 평신도협의회(당시 회장 박정훈)는 사제단을 공격하였다(1989년 8월 3일). “사제들이 주교에게 순명하지 않는 가운데서 평신도들이 사제에게 순명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겠는가?”라는 상명하복의 순진한 교회관을 드러내면서 “양심에 따라 정의사회구현을 외치면서 교회 내의 법과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과연 올바른 정의구현의 자세이냐?”는 물음을 평협은 제기하였다. 회장단의 이 행동은 평협의 추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황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의 우려는 1989년의 추계주교회의(10월 17일)에서 다시 나타났다. 사제단의 “최근 행동과 발언들이 신자들 가운데서 물의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수도 공동체들에까지 분열의 씨앗을 뿌렸으며, 한국 사회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평가하고, “때때로 그들이 강론대와 제단마저 순전히 정치적은 목적을 위해 오용해왔다.”고 매도했다. 사제단의 처신은 “어떤 정신적 마비 경련 증세”라는 특이한 병명으로 진단되었다.

 

주교회의는 교황대사의 주문에 대해서 “어떤 단체라도 교회 관할권자의 동의가 없는 한 ‘가톨릭(천주교)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교회법 제300조의 규정을 확인한다.”는 비교적 온유한 발표를 하는 데 그쳤다.

 

어느 학자의 말마따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주교들의 신중하고 지혜로운 처신이 있다면 예언적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성급한 쇳소리도 있다. 하지만 사멸할 인간들 사이에 오셔서 천막을 치신 말씀의 신비를 겨레에게 펼치자면 광야에서 울리는 소리가 결코 쇠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활성서 1995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