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메시지

 

                                                                                          [인천정평위, 정의평화 17.  1988.4.1]

 

누이의 죽음이 서러워 피를 토하며 우는 접동새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의 발치에 뿌리는 진달래도, 언제부터인가 오누이와 연인간의 사연에서 이 겨레의 비극적인 민족사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수유리 골짜기에는 올해도 접동새가 피를 토하고 남녘 땅 야산마다 불붙어 오르는 핏빛 진달래는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모골을 송연케 하고 젊은 혼들의 핏물로 스며든다. 지난 서른 해를 두고 4월이면 한국 사회에는 묵시록적인 기운이 감돌며 5월로 6월로 뻗쳐 가곤 하였다.

 

묵시록을 보면(5, 1~14)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손에 인류의 운명이 담긴 두루마기가 맡겨지고 그가 이 책의 봉인을 뜯게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 나오지만(12, 23; 13, 31~32; 17, 1~5) 예수는 죽음을 거쳐서 영광에로 건너가신 것이 아니고, 수난과 죽음이 곧 그의 영광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다 보니 아버지의 스타일대로 행동하여 가난한 이, 죄인들, 사회의 쓰레기들을 위하다 보니, 불의와 영합하는 대신에 정의를 외치고 세도를 휘두르는 대신에 평화를 사랑하다 보니, 십자가의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4․19의 첫째 메시지를 본다. 그 날 서울의 아스팔트 바닥에 피 뿌리고 숨져 간 젊은 넋들은 정의의 승리를, 선의 우위를 믿었다. 권력의 하수인인 경찰들의 총탄에 목숨을 빼앗기지만, 그 뒤로도 경찰과 군부와 독재자들이 수십 년을 두고 민족을 수탈, 억압하고 학살하며 조롱하였지만, 국제정치의 음모로 보아 도저히 배달겨레에게 밝은 희망이 안 보였지만,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불의한 정권은 언제인가 반드시 쓰러질 것임을 믿었다. 역사는 여전히 모순과 악을 안고 흘러가지만 죽은 의인들, 살해당한 어린 양이 천계에서 내려다보기에는 하느님이, 사랑과 정의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사실 공포에 질려 전경과 백골단, 보안사와 안기부, 공수특전단으로 민중을 위협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자들, 관제언론이 짖어 대는 허위라는 어둠 속에 숨는 자들, 돈과 협잡, 파괴와 살인 밖에 모르는(묵시 6, 15~16) 자들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패배자들이다. 그들의 사악하고 허구적인 정체를 폭로시켜 버린 것이 저 젊은 의인들의 죽음이다.

 

4․19와 그 뒤의 혁명사에서 악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체제와 타인들의 악뿐만 아니라 나의 악이 노출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에게 던져지는 그 날의 둘째 메시지가 이것이다. 어느 사회체제의 악이 정체를 드러내면 사람은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자기를 그 악과 분리시키고 손을 씻고 악을 척결함이 선의 선양이라고 믿거나, 선으로 악과 대결하고 자기가 죽어 남을 살리고 선이 악보다 강하고 궁극적인 것임을 증거하거나 한다. 나는 어느 대열인가? 남들에게 악의 책임을 돌리고 그들을 ‘악마의 자식들’로 명명하고 입으로 떠벌이면 다되는가?

 

묵시록을 읽어 보면, 하느님 앞에서 어린 양은 ‘진실한 증인’이시고(1, 5) 그 대신 사탄이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을 고소하고 있다(12, 10). 인간의 구원이 민족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고발자"보다도 "증거자"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증거자를 뜻하는 희랍어 martyr가 교회에서는 언제나 순교자를 가리켰다. 한자 殉(순)의 의부가 ‘죽을 사’라는 부수임은 의미심장하다. 목숨 안 내놓고서는 증거가 안 된다.

 

궁극에 가서가 아니면 악이 ‘척결’되지는 않는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상기하자. 30년 오욕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진실을 말하라. 그러면 허위가 폭로된다. 약자와 억압당하는 자를 사랑하자. 당장 불의의 정체가 드러난다. 정의에 발 벗고 나서 보라. 사방에서(교회 내에서도) 그대에게 포화가 쏟아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선 자체가 증거가 되며 증거를 하는 사람은 필히 순교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스승이 그러하셨고 4․19의 젊은이들이 그러했고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정의평화  1988.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