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에 새기는 의로운 죽음들

 

                                                                                          [성모기사 1994.11월호]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이 달은 죽음을 마주보는 계절이다. 유럽 성당묘지마다  HODIE MIHI CRAS TIBI 라는 경구가 입구에 적혀 있어 관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나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고 깨우쳐 준다. 쌀쌀해지는 날씨와 더불어, 우리에게 따스하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계절인 만큼 우리는 평소보다는 더욱 진지하게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죽음을 유난히 많이 이야기한다. 성모기사회원임을 자처하는 우리의 입에 달콤한 사탕처럼 자주 오르는 성모송이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맺는다. 중학교 1학년의 나이로 어머니의 죽음을 혼자서 지키던 필자에게는, 마흔이 넘어 외로이 숨져 가시던 분의 입에서 “어머니, 어머니!” 구슬프게 부르시던 마지막 두 마디가 지금도 뒷전에 선하다. 그러니 우리가 숨지는 두려운 순간을 천상 어머니의 손길에 맡기겠다는 가냘픈 심경을 알 만하다.

 

“예수께서는 무엇으로 온 세상을 구하셨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면 대답이 쉽지 않다. 고결하신 말씀으로? 아니다! 고매하신 인품으로? 아니다! 기막힌 기적들로?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아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주님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고 만민을 구하셨는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서이다!” 인간이 끝장나는 죽음에서 구원이 오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가르침인가!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죽음에 관한 교리를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죽음의 신비

죽음을 나그네 같은 인생살이의 끝이라고들 한다. 좀 어렵게 말한다면 ‘한 인간이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 도달해 있던 경지,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역사와 타인들 앞에 자기를 열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자기를 닫고 거절하느냐는 인간의 결단에 결말과 완료를 초래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하지만 늘 불완전하다. 길거리나 전철에서 거지나 맹인에게 백원짜리 동전 하나 주는데도 안줄 이유도 많고 핑계도 많다. “저 맹인이 가짜가 아닐까? 조직에서 다 빼앗아 간다는데 줘도 무슨 소용이람? 나보다 한달 벌이가 더 많다는데 …” 선행을 하려 해도 마음이 안 내키기도 하고 남의 시선이 쑥스럽고 용기가 안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죽는 순간에는 인간이 난생 처음으로 사리를 환하게 들여보고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을, 타인들을 진솔하게 대면하면서 영원한 운명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죽는 마당에 체면이 어디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핑계가 무슨 소용인가? 신학자들은 이것을 소위 ‘최종결단설’(最終決斷說)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도 일평생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 오셨다. 하느님 마음으로 사랑해 오셨다. 그러나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요한 15, 13)는 말씀을 실천하셔야 할 순간이 이르렀다. 겟세마니에서 죽음이 무서워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시면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이 죽음의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애원하셨다. 하지만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루가 22, 42)라고도 기도하셨다. 그러시다가 마음을 정하시고 “일어나 갑시다”(마르 14, 42)라고 하실 때에는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그 두려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최종결단을 하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라고 울부짖으시다가도 최후에 가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어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하시고 숨지심으로써(루가 23, 46) 최종결단을 내려 인류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목숨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 예수님은 성모님의 태중에서 입은 몸을 벗으셨다. 육체라는, 좁다란 시공점에서 벗어나서 당신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전 우주적 세계관계가 실현되어 우주 깊숙이 들어 가셨다. 그리하여 천상과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을 지배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위치에 서셨다.

 

그리스도를 닮아 선하게, 남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그 죽음으로 영혼이 다른 영육체들의 생명의 뿌리가 되며, 어려운 말로 세계 전체의 ‘공동규정소’(共同規定素)로 변한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고 구원에 이르도록 협력한다. 교리상으로는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라고 일컫는다.

 

우리는 여기서 안중근(토마스) 같은 분의 행동과 죽음을 왜 한국천주교회가 신앙인의 위대한 귀감으로 보는지 알 만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살인을 하고 사형을 당하였지만 신앙인의 눈으로는 민족을 사랑하여 거사를 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나라 역사의 저 밑바탕에 들어가서 민족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3․1운동, 4․19혁명, 5․18 광주의거 등에서 목숨을 빼앗긴 이들이 민족을 사랑하여 저 두렵고 무서운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 공으로 하느님 대전에서 지금 이 나라 역사를 끌어가는 작은 구원자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신앙 깊은 사람이라면 1960년 마산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혀 죽은 김주열군, 80년대 치안본부에서 고문을 받아 죽은 박종철군,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하다 백주대로에서 경찰에 맞아 죽은 이한열군이나 강경대군도 우주의 저 뿌리에서, 곧 하느님 앞에서 지금 작은 구원자들이 되어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고, 다른 젊은이들이 민족과 통일을 사랑하도록 충동하고, 한국이 올바른 민주국가로 서서 온 국민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한결같이 십자가상에 처형당하신 우리 주님의 죽음을 닮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1988년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외치며 명동에서 할복자살한 조성만(요셉)군의 죽음이나 1992년에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열 두 명의 죽음은 또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 것인가?

 

천주교는 로마 박해시대에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한 펠라기아를 성녀로 받들고 있다. 한국민은 6․25전쟁에서 아군을 살리기 위하여 폭탄을 안고 적군의 탱크 밑으로 뛰어든 군인들을 영웅으로 받든다. 동지들의 이름을 불면 모두 총살당하리라는 위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스파이는 영웅이라고 한다. 그들은 죽음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닥쳐올 고통이 무서워 자살한 것도 아니다.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였으므로 비겁한 자살자라고 욕하지 않고 순국의 열사하고 칭송한다. 그렇다면 저 젊은이들의 죽음도 하느님 눈에는 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성자의 죽음을 가장 많이 닮은 희생제사로 보이리라고 짐작할 만하다.

 

죽음의 밑바닥

죽음을 아무리 신앙에 입각하여 그럴듯하게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죽음은 인간의 눈에는 완전히 감추어진 영역이다. 사멸한 존재들에게는 절대 바닥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캄캄한 신비이다. 죽음 저 편에서 오셨다는 그리스도에게도 죽음은 그토록 두렵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인류 역사에서 죽음을 앞두고 땀을 핏방울처럼, 다시 말해서 땀 대신 피가 송알송알 흘러나온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하느님의 아들까지도 두려워 떨게 한 죽음의 이 어둠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더없이 적나라한 자세를 요구한다. 종교적 표현을 쓴다면,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의 구원이 결정된다. 그런데 이 땅의 의인들은 나사렛 사람의 뒤를 따라서 눈을 질끈 감고서 어둡고 두려운 죽음의 길을 갔다. 심지어 스스로 그 죽음을 결행하였다! 위령성월에 묵상할 크나큰 신비이다.

(성모기사 199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