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라이의 실꾸리

 

[외대학보 (명수당) 1990.11.27]

 

 

흘러간 60년대 사랑의 칸조네 한 구절:

Se non corri, tu potrai trovare, in mezzo ai sassi un diamante tutto per te.

(그대 무작정 뛰어가지 않는다면 발견하리, 돌무더기 가운데서도 그대 몫의 다이아몬드가 있음을!)

 

우리네 인생은 지독한 뜀박질이다. 더 어렸을 적은 잊어버리더라도, 고등학교 3년은 오로지 대학교 입학을 위하여 달려왔다. 대학교 4년은 오로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훌륭한 직장에 취직하자고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예비역들은 군대 3년을 오로지 제대날을 바라보면서 견뎌왔었다. 졸업하여 회사에 들어가서는 계장, 과장, 이사를 바라보면서 부지런히 뛸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마도 18평에서 24평, 32평에서 60평 아파트로 정신없이 건너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일은 "모이라이"라고 부르는 세 자매 여신들이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서 각 사람의 수명을 다스린다. 여신 클로토는 사람이 현재 살아가는 수명을 실로 짜주고, 라케시스는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주며 제우스가 정한 시각이 되어 그 실을 끊는 것이 아트로포스다.

 

언젠가 일에 싫증난 모이라이 자매들은 아기 하나가 잉태되자 운명의 실꾸리를 아예 아기에게 맡기면서 마음대로 풀어보게 하였단다. 아기는 엄마 뱃속이 갑갑하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어 실타래를 부지런히 풀었다. 태어나서는 기저귀가 부끄럽고 젖보다 밥을 먹고 싶어 금방금방 실꾸리를 풀었다. 다음에는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것이 싫고 남들처럼 뛰놀고 싶어서,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서, 귀찮은 공부를 빨리 마치고 싶어,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어, 집을 장만하고 싶어, 빨리 승진하고 싶어 급하게 풀다 보니 실끝이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살아가는 세월로 치면 석 달 하고 열흘만에 평생의 실꾸리를 다 풀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각자가 받은 운명의 실타래 길이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는 성공의 절정에 섰다고 자부하며 이렇게 혼자서 독백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날을 향하여 달려왔다. 마침내 내 인생의 리허설은 끝났다. 아이, 막이 오르는구나. 관중의 갈채. 드디어 내가 등장한다. 로렌스 올리비에만큼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를 시작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 그런데 말이다. 하필 그 순간 갑자기 내 인생이 정전(停電)되면서 아트모포스 여신의 가위가 내 수명의 실끈을 자른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지금 우리네  "보통" 대학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스포츠신문만화 보다는 "한겨레신문"을 읽고, 최루가스가 교정을 메워도 바르고 의롭고 꺼림칙한 것이 무엇인지 속으로 분별할 줄 아는 상식인들과 대화하고 있다. "민중"이니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낱말들이 그래도 여운을 남기는 귀들, 체제의 발톱에 채여간 40여 명의 학우가 고문기술자들의 손에 넘어감을 애타는 심장들, 안면도의 충청도 섬 양반들이 봉기한 사건에서 민족사의 표지를 보는 눈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닫기는 내 한 몸의 출세를 향해서 무작정 뛰는 이들에게 "우리 잠깐 멈추어 서자. 속도를 조금 줄이자. 무엇을 향해서 뛰는지 살펴보자"고 호소하는 참이다.

 

무릇 우리가 사랑한 것만이 영원으로 도금(鍍金)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사랑한다면 우리 인생이 어느 순간에 정전(停電)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문제는 사랑의 폭이다. 우리 팔이 어느 정도까지 넓게 펼쳐지느냐는 것이다. 누구나 연인과 친구는 보듬을 줄 안다. 피붙이와 동아리는 어차피 끌어안기 마련이다. 헌데 이 땅의 지지리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동포를, 민중을, 겨레를 껴안자면 팔을 웬만큼 펴서는 안된다. 운명의 실꾸리가 잘리는 순간에 자기 인생이 얼마나 성숙했나를 알고 싶거든 자기 팔 길이를, 팔 넓이를 보자.

 

나사렛 목수의 십자가에 못박힌 두 팔을 볼라치면, 자꾸 안으로만 굽고 오그라드는 팔을 주체 못하여 아예 두 팔을 못질해 버린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철창으로 치닫는 내 제자들의 팔이 그렇게나 길어 보이는 것도 그 까닭이겠다.

(외대학보 1990.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