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백성의 길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 1989.7.1]

 

방주의 창은 위로 나 있다. 위로 난 창으로는 하늘만 보인다. 40주야를 두고 폭우를 내리쏟던 칠흑 같은 하늘, 그리고도 1백 50일 동안이나 검은 회색을 드리우던 음울한 하늘, 한 해가 기울 즈음에 구름 새로 언뜻언뜻 푸른 창공을 보이는 하늘이다. 노아는 까마귀도 날려 보고 비둘기도 날려 보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

 

방주 속은 안전하다. 밖에는 천둥번개가 치고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터져’ 폭우와 노도가 휘몰아친다. 온갖 짐승과 인간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바깥에서 들리지만, 그 속에는 먹을 것이 있고 대를 이어 갈 짐승들이 한 쌍씩 있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부모 처자가 고스란히 살아 남았다. ‘우린 살았다.’

 

교회를 노아의 방주로, 암흑과 죄악의 바다를 헤치고 승객들을 천국으로 실어 가는 배로 상징하던 시대가 어제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는 교회를 ‘민족들의 빛’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사는 주변에 봉사하러 나서고 있다. 체제악과 윤리악의 대홍수에 휩쓸려 가는 저 가난한 민중의 비명과 공포를 곧 자신의 슬픔과 번뇌로 삼는다. 동서남북으로 찢겨진 우리 민족에게 기쁨과 희망을 일깨우고자 동분서주한다. 혹시나 교회가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에서 짓밟힐까 염려되어 충정어린 비판도 삼가지 않는다.

 

교회에도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땅의 기득권자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독재 유지와 민주화, 분단 고착과 조국 통일의 선상에서 보지 않고 좌우익의 사상 대결, 보수 혁신의 세력 충돌이라는 간편한 도식으로 해석하는 풍조가 교회에도 고스란히 유입되고 있는 듯하다.

 

유럽 역사에서 대혁신이 있을 적마다 보수세력의 주축을 이루어 온 것이 그리스도교였고, 반세기 한국사에 ‘반공의 보루’를 자처해온 것이 가톨릭교회이다. 그렇지만 농민들과 노동자들과 도시 기층민의 저 몸부림이 좌경불순분자들의 충동을 받은 일시적인 현상인지, 배달겨레의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새 역사로 몰고 가시는 혁명의 한 단계인지 신중히 분별할 일이다.

 

시국에 대한 해석이 다르더라도 신앙을 함께 하는 교우들로서 우리가 양시론(兩示論)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성경과 교도권의 문서들을 인용해 가며 자기 행동에 명분을 내세우는 지식 정도는 누구한테나 있고, 누구든지 자기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복음과 교회정신에 투철하다고 자부한다. 극히 임의적이지만,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세우고 있다.

 

첫째는 ‘평화와 사랑’이다. 애덕을 직접적으로 손상하거나 하느님의 백성의 평화를 파괴하면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있다. ‘참평화가 정의의 열매’라면 정의 없는 평화는 죽음의 고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고요 속에 무죄한 이들의 피가 하늘에 소리치고 있다. 사랑도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음이 좋다. 자기의 기득권을 위협하거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두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 54)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인들이다.

 

둘째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십자군이라는 창칼에 꽂힐 물건이 아니고, 빈민촌에 높이 솟은 대성전의 꼭대기에 세울 것도 아니다. 영양 좋은 부인네의 가슴팍에 걸릴 십자가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어깨에 메어져 있어야 한다. 누가 관변언론에 매도당하고 관권에 박해받고 교권에 단죄받고 일신의 안전과 생명과 가정이 파괴당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는 십자가를 지고 있다. 십자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 누가 처자식 무난히 건사하고 집 한 채 든든하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부를 쌓는다면, 교회가 매사에 당국의 특혜를 받고 부유층에게 향응을 대접받고 교회 행사라면 관의 협조를 아낌없이 제공받는다면, 적어도 십자가는 지지 않았다.

 

끝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 본당에는 저런 가난뱅이들이 없다구요!” 이건 초대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빈민들이 강제로 철거당한 터전에 세워졌고 주일미사의 화려한 자가용 행렬에 주눅이 들어 가난뱅이는 얼씬도 못하는 어느 ‘중산층 교회’ 여교우의 자랑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가난한 이들을 편든다면 그들은 믿을 만하다. 가난한 이들은 인류의 성사(聖事)라고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가 없는 교회,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사랑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에는 성사 하나가 없다.

 

노아의 방주를 타고 살아남는 짜릿한 쾌감은 하나의 유혹이다. 교회가 집단적 이기주의와 풍요에 사로잡히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쳐 대는 예언자들을 내쫓으면서 민족사의 저 엄청난 죄악을 묵인하고 야합한다면, 하느님은 또 다른 어느 노아를 불러 방주 하나를 새로 마련하실지도 모른다. 두려운 것은 우리와 교회가 방주 안에 드느냐, 역사의 흙탕물에 휩쓸려 가느냐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