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대였소?

 

                                                                                              [평화신문 (시대의 징표) 1989.3.12]

 

 

우리 세대의 웬만한 도회지 사람이면 관람했을 영화 "의사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 적군에게 납치당하여 의사 노릇을 하는 지바고는 어느 날 설원으로 줄지어 오는 아녀자들의 참담한 무리와 부딪힌다. 주림과 추위와 죽음의 공포에 질린 그 군상들은 군대가 마을을 불지르고 남자들을 몰살시킨 자리에서 빠져 나오는 ‘생존자들’이었다.

 

“누가 그랬소?” 빨치산 대장이 분에 받쳐 노파 하나에게 묻는다.

“군인들이오.”

“어느 군대였소? 백군이오, 적군이요?”

“군인들이오.” 노파는 그 말 밖에 할 줄을 모른다.

 

저 1980년 5월 광주의 거리에서 우리 눈에 비친 살인자들은 ‘군인들’이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빼앗기는 그 초등학생, 중학생, 노인들과 여자들에게는 국방군이나 인민군을 구별하는 눈도 없었다. 세계 제4의 위력을 자랑하는 한국군, 한국군에서도 최강의 ‘공수부대’를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 뒤로 광주에서는 어린이들의 병정놀이에 “야, 계엄군 온다.” “계엄군을 잡아라!” 하는 구호가 생겨나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군인들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이 신문을 읽는 독자 중에 광주에 간 군인들이 있을까 해서, 한국군 장성 세 중의 하나는 가톨릭신자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같은 신앙인으로서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하여 말을 건네는 것이다. “하느님 날 구하시는 하느님이여, 피흘린 죄벌에서 나를 구하소서.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하는 기도를 함께 올리기 위함이다.

 

그래도 이제는 용서 받을 때가 되었다. 죽은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만사를 볼 테니까 우리를 용서하고 남을 것이다. 호남인들도 잘못을 고백하면 천 번이라도 용서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니 입으로 고백하자.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 애당초부터 한국군의 총검에는 겨레의 피가 묻어 있다. 외적을 상대하지 않고 동족을 죽이는 군대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비극의 역사는 1948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정시기였다. 가뜩이나 사내가 적다는 제주도에서 8만명의 사내들을 죽여야 했던 한국군 9, 11, 14연대에서 한국군의 부끄러운 운명은 시작된다.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말자. “저 놈들은 빨갱이요 너희 적이니 가서 죽여라!” 하고 명령한 자는 점령군 사령관이었다. 그때부터 미국인 정해준 이념의 자로 재어 우리는 골육상잔의 범죄에 말려 들었고, 그 범죄는 여순으로, 대구로, 6․25로 이어진다. 한국군이 국군 본연의 임무대로 국방을 한 것은 중공군과의 전투뿐이라고 하면 틀린 말일까?

 

이러한 원죄를 두고 하느님과 민족 앞에 참회하며 용서를 빌자는 것이 필자의 제언이다. 더 이상 겨레를 상대로 무기를 쓰지 않기로 다짐하자는 말이다. 국군 장성들이 그토록 국민을 적대시하는 언행을, 걸핏하면 나오는 퇴역장군, 현역장군들의 ‘싹쓸이’ 발언을 그치게 하자는 말이다. “이러저러한 경우는 나라도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망언을 말소시키자는 말이다. 국군과 국민이 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도덕적으로 거세당한 사령관들과 정치가들 휘하에서는 우리가 분별 없는 살인무기와 맹수로 전락한다는 것을 광주에서 배웠다. 그리고 우리가 광주에서 목숨 걸고 복종한 지휘자달은 사정이 불리하자 총사령관은 지역사령관에게, 그는 대대장들에게 대대장은 현장지휘관들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국회 조사가 더 진행된다면 사병들이 하나씩 법의 심판대에 서야 할 참이다.

 

국군은 다짐해야 한다. 광주학살이 민족사의 무서운 범죄인 것은, 그토록 편하게 써먹은 이데올로기의 구실도 통하지 않는 까닭이다. 겸허하게 사병에서부터 퇴역장성들에 이르기까지 광주 시민들과 민족과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자처하자. 그리고 우리가 방어할 것은 국토요 국민이지 정권이 아님을 다짐하자. 그리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라고 무기를 나누어 줄 때에, 제발 잊지 말자. 국민에게는 총맞아 죽을 맨가슴 밖에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오로지 국민을 지켜줄 총칼이 손에 있다는 것을!

(평화신문 1989년 3월 12일~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