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바라보며 민족화합 도모하자

 

                                                                                                                    [평화신문 1989.1.22]

 

남한 천주교 신부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미사를 올렸다. 서울의 추기경과 로마 교황이 북한을 방문하리라는 소식도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일깨우는 조짐들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작년 2월 29일자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하였고 11월 25일에는 남북한 교회 대표들이 <글리온 선언>이라는 역사적 문서를 만들어 냈다.

 

교회 내에서든 사회에서든 배달 겨레의 통일을 내다보고서 화해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만들어진 듯하다. 그런데 대화에는 조건이 있다. 맹세코 이북의 크리스천 형제들과 진정으로 민족의 화합을 도모하겠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첫째, “북녘엔 그리스도교가 말살되고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하느님의 권능을 멸시하는 말이다. 설혹 어디에 교회당이나 수도원 건물, 주교단이나 교회협의회, 주일집회와 성체대회가 없더라도 하느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이루신다. 하느님은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던가?

 

둘째, “조선기독교 연맹은 변절자들의 집단이거나 조직단체요, 평양에 성당이 있고 서고 로마에 신학생이 파견되었다지만 모두 정치적인 쇼다”라는 소리도 하느님의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성 싶다.

해방신학이야 있을 리 없지만 북한에도 해방철학은 있을 것이다. 60년대 이래로 해방신학이라는 성령의 바람(“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이 불면서 교회는 제3세계 크리스천들을 이데올로기의 신경성 편집증에서 완화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이 신학의 맥을 따르면 북한 교회를 바라보는 눈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크리스천이면서도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한때 천주교의 ‘애국회’ 사람들은 서방교회로부터 배교자나 빨갱이로 하시받았지만 지금은 바티칸도 구분 없이 그들을 중국교회로 존중하고 화해의 실꾸리를 풀어 나가는 중이다. 대화를 하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상대방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나오든간에 일단 이쪽 편에서 보일 자세는 ‘믿음’이다. 대화할 의사가 없다면야 그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뱀처럼 지혜롭기만 한 정치가들은 이 사회에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까 적어도 종교인들에게는 상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주는 비둘기의 순진함이 보여야 한다.

 

셋째, 남한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보일 자세는 하느님과 민족 앞에서 죄인으로서 뉘우침이다. 반공 크리스천들이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은 북한의 그리스도교 박해다. 그런데 종교박해를 운운할 때 한 가지 조심할 점은, “옳은 일을 하다가 받는 것”만 순교라는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 스페인 내란과 멕시코 혁명 중에 민중의 손으로 숙청된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 신도들 모두를 교회가 순교자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설령 무죄한 이들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고 숙청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나라의 군부가 이데올로기의 명분으로 제주와 지리산 일대와 보도연맹에게 저지른 죄악보다 더는 아닐 듯하다. 그들은 인민의 적이라고 하여 무고한 양민을 죽였고 이곳에서는 빨갱이라고 하여 시민들을 죽여 왔다.

 

개신교는 작년에 이런 엄청난 민족적 범죄에 “우리 탓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쳤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그러한 죄의식을 표명한 적이 없다.

 

아무리 나쁜 자들이라도 공산당보다 낫다던가 아무리 세상이 비뚤어져도 전쟁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는, 적어도 하느님과 그 손길을 믿는 신앙인들의 논리는 아닐 것이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무엇이든지 할 테니”는 순교자들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느 크리스천이 반공주의자라고 자처할 적에는 한 가지만 스스로 물었으면 좋겠다. “나는 크리스천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자이기에 반공주의자인가?” 해방신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평화신문 1989. 1. 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