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오는 새벽, 밝히는 역사

 

                                                                                                      [외대학보 (명수당) 1991.1.1]

 

시작이라는 것

새해가 새롭다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태양이야 어제 섣달 그믐에도 하릴없이 졌고 오늘 정원 초하루도 예사로 솟았는데 시간에 금을 긋고 달력에 색칠을 하고서는 마음을 새삼 가다듬고 어른들을 찾아뵙고 직장에서는 신년 하례회를 갖고 시무식을 치른다.

 

아마도 한 해의 시작이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숨쉬고 있기까지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간추린 말이다. 1991년 정월 이 글을 읽는 순간은, 어쩌면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저 태초의 대폭발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사 전체, 아메바로부터 진화하여 현대인이 등장하기까지의 인류사 전체, 단군왕검부터 오늘에 이르는 배달겨레의 한 많은 민족사 전체가 나의 숨결에 요약된 시점일 것이다. 거기다가 내가 태어나서 여태까지 살아온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생활의 이력, 내가 철들면서 목격해 온 이 땅의 한심스러운 정치사회사가 한데 결집된 포인트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인생, 내 처지와 상황을 "예!"라면서 받아들이는 순간, 태초부터 이 시각까지의 수 십억년 세월이 내 인격에 의해서 조립된 "나의" 역사가 된다. 이렇게 사는 삶을 철학자들은 실존(實存)이라고 부른다. 그 시점부터 내 나라와 민족, 나의 과거와 부모, 학교와 학과가 엄숙한 명령이 되고, 구차해 보이던 인생이 일종의 소명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곧 자유의 결단을 통해서, 타인들과 민족, 세계와 역사를 향해서 자기를 투신하는 가운데 완성시켜야 할 설계도요, 달성할 사명이 된다. 새해는 이 진리를 내게 깨우쳐 준다.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숭어 뛰니 망둥이 뛰고, 망둥이 뛰니 전라도 빗자루 뛴다." 더라만, 국제고 국내고 정치학이라고는 ㅈ자도 모르는 몽이 선생, 명수당에 비칠 금년 운세 한번 짚어 보고 싶다.

 

미국이라는 인류사의 괴물을 견제하던 동구 현실사회주의가 블럭채 무너졌지만 로마제국을 꿈꾸는 EEC 곧 서구가 언젠가 세계 경찰을 대신할 형세요, 미국의 페르시아만 점령은 어쩌면 미국에게 누가 적일지를 미리 내다본 사전 포석일 게다. 허나 땅 갈라먹기로 친다면 조선반도는 태평양권, 곧 미국의 안마당이라, 양다리 세다리를 걸쳐본들, 올가미는 갈수록 죄어들 게다. 지성인들의 몸에 배는 민족주의와 남북한 통일만이 미․일의 패권놀이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시골 한마당에, 대학가에, 책갈피에 어디서나 "흰색"이 되살아남이 보인다. 빨강색, 파랑색, 이데올로기 싸움도 민족의 흰바탕 무명천 바닥에는 동그랗고 예쁜 태극으로 비칠 따름이다.

 

수출 위주 공업정책으로 30년 묵은 횟배를 앓아 허해질대로 허해진 우리 경제야 우루과이라운드든 카라힐라운드든 한 라운드면 남미제국들의 종속경제 그대로다. 밥통과 간과 쓸개까지 모조리 내어주는 정치를 따를라치면 머지않아 어린애 숟가락 몽둥이까지 양대인과 왜분들이 싹 쓸어갈 게다. 그러나 꿋꿋이 번지는 농민운동과 노동자운동, 시민운동과 소비자운동으로 주체성이 가닥잡히는 중이니 어디 누가 먹히나 보자.

 

전두환 - 노태우 - 김복동으로 이어가는 군사정권으로 3김을 자연사시키고 일본식 내각제로 정권을 안정시킨다던 미국의 80년도 시나리오는 그대로 집행되고 있을테고, 복동세자 옹립이 가시화될 때가 되었음직도 한데 비빈들과 군짜들은 여전히 헛물을 켜는 성싶지 않은가? 88년 선거에 의한 혁명을 망친 김대중은 지자제 하나 얻어 놓고서 사라지는 운센가 본데, 지자제라는 두 번째 기회에도 국민이 민주주의 대신 애향심을 선택한다면 역사는 10년쯤 늦춰갈 게다. 하지만 광주시, 사북촌, 안면도로 이어지는 민중들의 봉기, 1천 5백명의 해직교사, 1천 5백명의 양심수들이 있다! 서울과 평양에 쏟아질 핵불을 막아주는 의인들이다.

 

어떻든 새해가 반가운 것은 배달네 각박한 삶에 무엇인가 희망을 비춰주기 때문이리라. 맑은 기쁨은 희망에서 온다. 기왕 손에 쥔 것을 흐뭇이 헤아리는 일은 희망이 아니라 계산이다. 워낙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천지의 새벽은 해가 솟으면 "밝아 오는" 것이지만, 민족사의 새벽은 참여하는 지성들, 투신하는 선구자들, 투쟁하는 민중이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외대학보 1991.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