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理 앞세운 自己 합리화 없는지…

 

                                                                                                               [한국경제신문 1989.7.23]

 

지금 시중에서 상영중인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는 옴베르토 에코라는 이탈리아 소설가의 동명소설을 영상화한 것이다. 작품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치부를 파헤친 명작으로 전세계에서 절찬을 받고 있는데, 저자는 중세 그리스도교를 한마디로 <웃음이 없는 신앙>이라 단정한다. 정확한 평가이다.

 

철학이 희랍어로 "지혜에 대한 사랑"임은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지혜라는 것이, 살아가는 재주나 돈을 모으는 요령이나 남을 속이고 빼앗는 "꾀"로 통하는 지금 세태에서 필자는 철학이란 차라리 "진리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런데 추상적인 진리만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도 없다. 역사상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를 유린하는 사례가 허다한데, 움베르토 에코는 이것을 일컬어 "진리에 대한 추잡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진리에 대한 추잡한 사랑을 대표적으로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 본다. 사람들은 악한 짓을 하면서 좋은 명분이 생기면 더욱 신나서 그 짓을 저지른다. 소설가는 악마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에, 주인공 굴리엘모 수사의 입을 빌려 "한번도 의심을 받지 않은 진리"라고 서슴없이 선언한다.

 

진리를 내세워 종교들은 정통과 이단을 가른다. 이단자라 하여 같은 신도를 불살라 죽이면서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 종교인들이다. 중세기 서양의 십자군이나 신․구교의 종교전쟁을 보면 자기네가 서로 받드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편의 마을과 도시를 불사르고 아녀자들을 유린하고 학살하였다. 해방후 6․25 전쟁 발발까지 한반도에서는 수십만 명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살육되었다고들 한다. 젖먹이, 늙은이, 여자들까지 "빨갱이", "반동"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 살해당했다.

 

사람은 대개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진리라는 것을 써먹을 따름이다. 진리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필자로서는 학생들에게 제발 진리를 함부로 떠벌리지 말고 진실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진실은 실존적 진리이며 그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까닭이다.

 

광신도가 아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종교신앙과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지 않겠지만, 진실을 사랑하고 사실을 알고자 노력하느냐의 여부로 자신의 사람됨을 재보는 것이 좋겠다. 예를 들어 안기부가 발표한 "徐敬元의원 간첩사건"을 듣고 보는 우리의 자세이다.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받아들이는 그릇은 그릇의 모양새대로 받아들인다"라는 명제를 남겼다. 정부의 발표나 매스컴의 보도나 이웃의 소문까지 합쳐져 우리가 어떤 소식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적에는 각자의 생김새대로, 아니 마음씨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맹목적인 이데올로기, 기존체제에 영합하는 심정, 특정 지역이나 정당에 대한 까닭 없는 증오를 품은 사람은 마음대로 단정하고 맹신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진실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수가 더 많다. "진리는 수난을 당하지만 결코 사멸하지 않는다"고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말했다. 은폐되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밝혀져 그동안 왜곡된 사실을 맹신해 왔던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듯이, 지금 우리가 맹신하는 사건들도 10년 후면 그 진상이 밝혀져서 우리를 한없이 치욕스럽게 만들리라는 점도 내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경제신문 1989.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