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디아스 대주교님께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 1989.7.23]

 

“여러 주교님들께는 교회법이 요구하는 바 교회 권위의 필요한 사전 인가도 없이 스스로 ‘가톨릭’이라 자처하는 일부 단체들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단체들은 또 최근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30항)에서 언명한 ‘교회성의 기준’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단체들은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흔히 주교님들의 사목적 권위를 감히 침해하려 하고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도 오해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지난 3월 7일자 한국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대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 베드로의 유산을 계승한 영광스러운 로마 교회의 사절로서 한국 교회와 민족의 고뇌를 함께 나누시는 사목적 배려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선 대주교님께서 걱정하시는 이들은 교회가 낳은 자녀들입니다.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가난한 이들이 이웃이라고, 정의구현이 복음 선포의 본질적 요소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저 ‘어수룩한’ 사람들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침묵의 교회’에서 나오는 소리들입니다. 국토의 분단, 이데올로기의 대립, 6·25 전쟁, 전쟁 후 40년 가까이 정치적 민주와 사회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연연히 계승되는 독재정권하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해 온 교회에 예언자다운 발언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이리떼가 양떼를 물어 죽이는 판에 목자들이 잠들어 있다고 보이면 개라도 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리 못내는 약자들을 위하여, ‘어머니이신 교회’의 목소리가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이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한 많은 비명이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어머니의 귀가 어두우면 자녀가 귀가 되어 드립니다.

 

교회성의 기준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성의 기준’을 어느 단체보다 분명하게 갖추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주교님의 염려와는 달리, 그들은 ‘교황과 지역 주교와의 자녀다운 관계 속에서와 교회 내의 여타 사도직 형태들에 대한 상호 존경 속에서 확고하고 진정한 친교를 증거’하고자 노력합니다. 주교님의 협조자들인 사제들과 더불어, 그 지도하에 일합니다. 성령께서 일으키신 사람들이니 교회가 묵인하다 멀지 않아 거두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교황님은 교회성의 기준들이 여하히 지켜지느냐 하는 점은 ‘구체적인 열매’에서 평가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이 해방되는 과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고수하는 일과 남의 몫을 지켜주는 일은 사뭇 다릅니다. 국민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눌 이들은 많이 있으므로, 그들은 민중의 ‘슬픔과 번뇌’를 함께 나눕니다. 혁명이라는 최후의 비극을 향해서 굴러 가는 이 나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맨손으로 붙들면서, 그들은 카사롤리 추기경의 말처럼 민중이 ‘무기를 들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마의 십자표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는 십자표가 있습니다. 그들이 혹시나 세력을 이루어 교회 내에 분열을 일으킬까 하는 염려는 거두셔도 됩니다. 교회가 나서기 전에 그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손에’ 모조리 제거될 것입니다. 그들의 어깨에 메어진 십자가만으로 족하니, 예수살렘 안에서나마 죽을 수 있게 잠자코 버려 두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쇠하고 교회는 흥할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 위에. 그들이 ‘빨갱이’로 낙인 찍힐 때에 저희는 기뻐하고 희망을 갖습니다. 이 땅의 모든 의인들이 같은 명패를 걸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갔습니다.

 

나라의 통치자들이 악인으로 몰아 죽이는 교우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을 낳아준 교회가 장차 민중의 교회로 살아남을 전조입니다. 그런 희생자들을 보고서 한국 민중이 천주교에 와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들에게 침해받지 않을까 염려하시는 사목적 권위는 이런 시각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교회법 300조를 내세우면서 그들이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이들을 보시거든, (굳이 법조문을 고집하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들은 교회법에 나오는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아니고 “천주교”라는 모국어를 쓰더라’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올 디아스 대주교님, 1989년이라는 시점에서 주교님은 반만년 전부터 저희를 가르치고 구원해 오신 ‘배달겨레의 하느님’을 뵙고 계십니다. 백의민족을 온갖 외세에서 해방하시고, 갈라지고 짓밟힌 민족을 남북으로 하나 되고 빈부 없이 하나 되어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한 마음 한 몸으로 외치는 날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계십니다. 대주교님의 조국 인도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오니, 한국 교회 전체가, 목자와 신자들이 함께 번민하는 이 역사의 방향일랑 저희 손에 맡기시고 저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