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증언

 

                                                                                               [인천정평위, 정의평화 18.  1988.5.1]

 

여기 세계 최강에서 제4위를 기록하는 대한민국 군대, 그 중에서 제일 힘들고 철저한 훈련을 받고 최신예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공수특전단(최정예부대)이 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두 동강 난 조선 땅에서도 저주받았다 할 만큼 역사적으로 소외되고 멸시받는 가난한 광주(전라도!) 시민들이 있다. 농민, 근로자, 학생, 시민, 어린이들의 손에는 돌멩이 하나 쥐어져 있지 않았다.

 

공수특전단 뒤에는 제주도사건, 여수순천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이 6․25의 희생을 상쇄시켜 버리고 있었다. 민주당 집권 ‘첫날’부터 음모를 시작하였다는 5․16반란이 있었고, 유신정권과의 오랜 민중투쟁을 꺾어 버린 5․17반란이 바로 전날 있었다.

 

광주 시민들 뒤에는 동학운동, 3․1운동, 광주학생운동, 이데올로기의 채색으로 은폐되어 버린 기나긴 항쟁의 역사, 거창 양민학살, 4․19 의거, 군부독재와 겨룬 18년의 역사가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금남로에서 이 두 세력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것은 각자의 정체가 폭로되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광주를 비롯하여 전남의 곳곳을 피로 물들인 그 충돌에서 우리는 보았다. 군부의 실체를, 총검의 악마적 포학성을, 체제악의 극악한 정체를! 그 날 대검으로, 총알로, 소각장에서 죽임당하는 시민들의 눈에 비친 것은 ‘군인’이었지 공산군, 국방군의 구별이 없었다. 이것이 5월의 증언이다.

 

그리고 그 날 이 땅의 지성인들은 간파하였다. 미국 정부라는 정치집단의 본질을! 이 땅을 동강 내어 나눠 먹고, 남․북 분단을 저지하려는 민주인사들을 제거하고, 전두환 군벌의 군사작전을 재가하고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규정한 자들을! 인권정책의 대명사 카터 행정부의 결정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도살당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때 무수한 종교인들이 그 정체를 폭로하였다. ‘전라도 것들’은 당해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주에서 죽은 자들은 빨갱이들이라고 외신 기자들에게 공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유야 여하튼’ 화해하라고 종교인은 죽은 자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마저 월남의 처지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설명이 제일 설득력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증언도 그리스도의 논리는 아니었다.

 

끝으로 광주 시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자유’ ‘민주’ ‘평화’ ‘인권’ 같은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목숨으로 증언하였다. 최강 군대의 최정예부대의 최우수작전으로 도륙당하면서도 힘, 체제악, 총검이라는 악마에게 굴종하지 않았다. 군부독재 20년간 지배해 온 논리, 배달겨레의 정신세계를 황폐시킨(그것이 회복되려면 최소한 60년은 걸릴 것이다) 윤리, 즉 ‘강자의 윤리’, ‘흑백의 논리’에 저항하여 그들은 ‘약자의 윤리’, ‘십자가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수유리 묘지의 망령들, 망월동의 영령들은 오늘도 증언을 한다. 악의 정체를 폭로하고 선에 대한 사랑을 증언한다. “…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앞서 말했듯이 ‘순교자’(殉敎者)와 ‘증언자’(證言者)는 희랍어로 똑같은 Martyr이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인들의 씨앗이다“라고 하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처럼 광주의 증언자들은 땅에 묻혀 썩어 간 밀알들이 되어 우리에게서 소생하여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처럼 어리석은 죽음이었다. 그들을 학살한 자들은 대를 이어 정권을 잡고 온갖 번영을 누리는데, 그들은 죽어 흔적도, 이름도 없지 않는가?”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너희는 그 무덤을 꾸미고 있다“(루가 11, 47)는 질책이 우리에게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무죄한 아벨의 피로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리키야의 아들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무죄한 피 값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마태 23, 35)는 저주를 우리는 두려워한다.

(정의평화  1988.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