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경향잡지 2012. 4월호)
“당신 창조계의 한 몫이 당신을 찬미코자”
「고백록(Confessiones)」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로 간주되고 그의 주저로 평가되는 삼부작(三部作)이 있다. 교부가 자기 개인 인생여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묘사한 「고백록(Confessiones)」, 인류가 구세사(救世史)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정리한 「신국론(De civitate Dei)」(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04),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啓示)와 육화(肉化)로 인간을 만나러 오시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인 자기 내면을 성찰하여 삼위일체 신비를 만나 뵙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근간)이다.
「고백록」, 진리께 바치는 연서(戀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합류시키면서 고중세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이 "내 작품 중의 그 어느 것이 「고백록」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라고 할 만큼 「고백록」을 자기 대표작으로 간주한 만큼, 문학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이 교부의 가장 독창적인 대표작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성서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혀 온 이 책이 고전세계의 지식과 작가의 심미적이고도 열정적인 기질과 독창적인 문체 덕분에 종교 영역을 넘어 “세계문학전집”에 필히 들어가는 고전이 된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한 지성의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나 헤겔에게서처럼, 형광등의 밝고도 차가운 빛을 내는 지성들과는 달리 시뻘건 불꽃으로 넘실거리면서 자신과 타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삼키는 ‘마음의 논리’에 접하게 된다.
「고백록」은 그가 세례 받은 지 11년이 지나 나이 43세에 기록한 글이다. 출생(354)에서부터 33세의 나이로 개종한 다음 모친 모니카가 오스티아에서 별세하기까지(387), 다시 말해서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로마 고전 문학과 철학을 배우고, 로마와 당시 제국의 수도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를 하다 성경의 진리에 접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여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自敍傳)이 아니다. 한 인간의 정신적 여정을 엮은 ‘기도서’다. 일평생 탐구하는 진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 그분을 대화자로 삼아서, 그분을 찬미하고 감사하여 짓는 기도문을 엮고 있다. 「고백록」 13권 중 처음 9권까지는 자신의 도덕적 사상적 방황을 회고하고, 제 10권에서는 현재의 자기 심경을 차분히 정리하고 있으며, 11권부터 끝까지는 「창세기」를 펴들고 창조신학을 전개한다.
이 책을 쓴지 25년 후 본인이 "나의 고백록 13권은 나의 악행과 나의 선행을 들어 의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책이었다"(재론고 2.6.1)고 회고하는 바 있어, 우아한 시적 문체로 번역본을 펴낸 최민순 신부님은 이 책에 “님 기림”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하느님과 인간"
아우구스티누스가 한평생 탐구하던 진리는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사랑을 바칠 인격체였다. ‘당신’이라는 진리 앞에서 “당신한테로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입니다”(고백록 1.1.1)라고 고백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당초부터 인간 실존을 규정하여 ‘신에게 방향 지워진 긴장상태로 신 앞에서 선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는 ‘하느님’과 ‘영혼’이 두 주역을 이룬다. 그리고 철학사의 가장 큰 이 두 실재에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 갔었다. 자신의 도덕적 부패와 죄상을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하였으므로 그러한 실존적 한계에서 물음을 던진다. “당신께서는 내게 누구십니까? 내가 당신께 무엇이기에 나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께 미미한 불행이라도 됩니까?”(1.5.5) 이런 과감한 질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듣고 싶은 답은 오직 한 가지였다. “아아! 주 내 하느님, 당신의 자비를 들어, 나에게 당신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너의 구원이다!’고. 내가 들을만하게 말씀해 주십시오.”(1.5.5)
그래서 이 글은 독백도 아니고 자기 악행을 열거하는 자백도 아니다. 철학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악의 문제를 깊숙이 사색한 인물이 없었고 그의 예리한 심안은 보드랍고 연약하면서도 뿌리 깊이 파괴하는 인간 내면의 와해를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못된 인간을 너무도 선하게 대하시는 하느님을 얘기하고 싶었으므로 그의 죄는 자책의 빌미라기보다는 찬미의 구실이 되었다. “우리의 비참도 우리 위에 내리는 당신의 자비도 한데 고백하여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비참하기를 그만두고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는 일을 시작하신 까닭입니다.” (11.1.1) 인간의 악행마저도 기실 영원을 향하는 어떤 몸부림임을 깨닫는다면, 그 흉물스러운 죄까지도 구원받을 인간에게는 우리가 성토요일, 저 '빛나는 밤'에 노래하는 ‘행복한 죄’(o, felix culpa!)가 된다.
“님 기림”에서 “우주찬가”로
이 교부는 자기의 생애를 들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한 다음, 우주의 창조를 들어 창조주를 찬미하는 '우주찬가(宇宙讚歌)'로 옮겨가, 자기 노래 가락을 삼라만상의 합창에 합친다. “당신의 업적이 당신을 찬송하여 우리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업적이 당신을 찬송하라고 합니다.”(13.33.48)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와 인간을 ‘창조된 존재’(esse creatum)로 확립한 철학자이며, 「고백록」 11-13권에서 「창세기」에 입각하여 세계의 기원을 논한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당신께는 그것들을 당신께서 보시기에 그것들이 존재합니다.”(13.38.53) 무(無)로부터의 창조, 창조와 더불어 피조물과 시간이 존재한다는 이론, 선한 하느님이 오로지 선한 사물을 놀이삼아 만드셨다는 창조론의 근간 역시 이 부분에 확립되어 있다. “만물이 시간으로 인해서 시작과 끝을 갖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에 의해서 무로부터 생겨났으며, 그렇지만 당신에게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것이 아닌 무엇에서, 또는 이전에 존재하던 무엇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당신에 의해서 한꺼번에 창조된 질료(質料)에서 비롯합니다.” (13.33.48) 시간은 실존의 한 차원이기 때문에 인간 의식에 의해서만 파악된다는 이론을 정립하고 있다.
책을 마치면서 교부는 개개인의 삶의 역정과 인류 전체의 역사가 종결되는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안식일을 그려 본다. “주 하느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으니 정묵(靜黙)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 저녁 없는 평화를 주십시오.” (13.35.50)
로마 제국이 붕괴하는 조짐으로 반달족이 430년 북아프리카 전역을 파괴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병들어 죽어가던 히포를 포위한지 한 달이 넘던 8월 28일, "나는, 미련하게도, 모든 것을 다 내 머리로 알아듣고 싶어." 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서 숨을 거둔다. 그 순간까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오, 진리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10.27.38)던 한숨도 그렇게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