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사람


(“행복포럼”)    (2013.12.18.)

 

.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삶(De beata vita)

 

1. 행복함 삶 De beata vita저술 계기

 

서기 386년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밀라노 근교의 조용한 시골 카시키아쿰에서 휴양을 보내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문하생들은 철학함’(philosophari)이라는 것을 두고 토론을 갖는다. 진리 탐구(眞理探究), 행복(幸福), 이 둘에서 이성(理性)이 차지하는 역할 셋을 차례로 토론에 부친다. 그래서 첫 번 대화집 Contra Academicos(아카데미아학파 반박)에서는 진리 탐구의 개념”, 본서 De beata vita(행복한 삶)에서는 행복의 개념”, 후속 대화집 De ordine(질서론)에서는 이성 내지 이치의 개념이 집중 다루어진다.


구체생활과 행동철학을 우선시하는 로마 철학자들에게는 행복한 삶은 평소 즐겨 다루는 대화 주제였으므로 키케로나 세네카 같은 일반학자는 물론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도 이에 관한 성찰을 하였다. 자기 나이 열여덟에 키케로의 저서 Hortensius를 읽고 철학연구와 진리탐구에 열을 올린 바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탐구에 행복이 있다.”는 명제를 자기 자신과 문하생들에게 다짐하고 싶어 이 주제로 대화를 갖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행복한 삶은 원천적 행복을 찾는 인간의 열망을 대화로 분석해 보는 책자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을 찾는 인간 보편 심정에서 출발하고,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는 선에서 그치며 추상적으로만 나가지 않고 실존적 차원을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지성인으로서의 진리 갈구와 더불어 행복을 찾는 원천적 동경이 단일한 인간에게 존재한다면 진리의 발견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념이다.

 

2. ‘향연(饗宴)’ 형식의 대화

 

본서는 고전철학에서 자주 보는 향연(饗宴 symposium, convivium) 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대화를 스스로 향연이라고 불렀을 뿐더러 주제, 토론식 대화, 의식(意識)에 대한 고찰도 향연의 요소로 보인다. 고대의 지성인들은 인생의 무상하고 취약하고 빈곤함을 절감하면서 충만완성을 희구하는 대화를 즐겼다. 실제로 행복을 주제로 하는 이 대화 직전의 점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일잔치였고 식탁에는 과자도 나왔다. 그 소박한 식탁도 인간 실존 저변에서부터 무한을 동경하는 심리의 근거를 탐색하는 계기가 된다.


행복한 삶에는 잠시 출타한 알리피우스만 빼고 시골 별장에 내려온 모든 식솔들이 다 참석하는 점이 독특하다. “정작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나였습니다. 당신은 내게 가르친 바 있었습니다. 큰 사람 노릇을 하는 법을 가르쳤고, 다 말씀드리자면 참 사람의 역할을 하라고, 그런 잔치에서 손님을 초대한 초청인답게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2.16) 특히 어머니 모니카가 끼어들어 여성의 직관적 통찰을 드러내기도 한다(2.13-16).


이 대화에서는 당초부터 나비기우스에게 자기가 살아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지성찰하라는 권유가 나올 만큼(2.7) 토론자 각자의 자의식(自意識)에 대한 내성(內省)을 중시하고 각자가 성찰한 바를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사의 입장에서 간추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대화자들은 여러 가정(假定)을 내세우면서 남의 진술과 대조하고 합치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지만 전번 모임에서 이뤄진 토론이 반드시 그 다음 대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논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는 응당 바다’, ‘항해’, ‘포구’, ‘고향같은 상징이 등장한다. 대화가 끝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초청한 주인답게 참석자들이 토론에 각각 기여해 준 바에 고맙다는 의사표시를 마지막으로 한다(4.36).

 

3. 행복함 삶의 내용

 

테오도루스에게 바치는 헌정사 (1.1-5)


행복한 삶(De beta vita)의 서문은 만리우스 테오도루스에게 바치는 헌정사 형식으로 철학의 소명을 논한다. ‘행운’(fortuna)을 거론하여 삶을 좌우하는 것이 운수(運數)인지 신의 섭리(攝理)인지 헤아리게 유도한다. 당시에 행운이라는 여신은 이성(理性)이나 인간 정신과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인생 여정을 가리켰고, 로마인들은 여신의 이름을 순경(順境 fortuna secunda)과 역경(逆境 fortuna adversa)으로 나누어 불렀다. 그런데 행운의 호의를 받으면 사람이 철학에 헌신할 만한 여유와 자유를 확보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으로 바뀌면서 인생은 바다 위의 항해로, 행운은 역풍이나 순풍으로, 현세 욕망은 파도로 비견하는 직유(直喩)가 나온다. 그렇다면 철학 또는 지혜는 인생의 항구, 본서의 주제인 행복(幸福)’은 정신의 고향으로 비유된다.

 

향연 무대의 설정 (1.6-2.9)


헌정사가 끝나면, 대화가 일어난 시간과 장소, 참석자의 소개로 향연의 고유한 무대가 설정되고 행복이 무엇인가?”가 발제되는 등 첫날 토론이 준비된다. 잔치와 잔치 음식을 비유로 인생의 목적인 행복을 찾아가는 정신자세를 논한다. 열망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고, 모든 인간이 천성적으로 행복과 진리를 찾고 있으므로, 그 목적은 이루어질 만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본격적 토론(2.10-3.22)


본격적 토론에서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명제와 원하는 바를 갖지 못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보이는가?” 라는 물음이 교차한다(2.10). 정말 행복해지려면 행운에 까불리지 않는 불변하는 선을 획득해야 하고(스토아 철학) 최고선으로 개념 되는 하느님 홀로 그 열망을 채워줄 존재로 부각된다(플라톤철학의 개념). 그렇다면 행복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 habere deum’하느님과 함께 있음 esse cum deo’으로 귀결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4.23-35)


셋째 날은 불행은 삶의 최고선을 결여한 데서 성립하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열망이 삶을 끌어가는 추동력임을 설명하는 자리가 된다. ‘결핍의 문제를 내세워 스토아의 금욕으로 아무런 궁핍을 안 느끼든 오라타라는 부자처럼 없는 게 없이 부유하든 지혜가 결여되면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리라. 행복은 열망의 충족이고 충만이다. 그런데 경험상 이 충족은 나름대로 한계를 가지므로 신적 지혜를 척도로 삼아서 행복을 추구함이 인간답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 개진된다. 진리 자체이고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그 경지가 정신의 충일한 만족, 즉 행복한 삶이며, 바로 그것이 경건하고 완전하게 아는 앎이다.”(4.35)라는 결론으로 향연이 파한다. 에필로그(4.36)에서 초대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대화에 참여한 일동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말로 맺는다.

 

4. 인간은 행복을 향하여 배 저어 가는 사람(homo navigator)”

 

첫 날의 토론(1.1-2.16)에서 인간은 행복해지고 싶은 본능을 충실히 추구하는 가운데 자기의 존재 의미를 구현해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참된 철학, 따라서 유일한 철학은 자기 인생에 삶의 명분을 제공하고 의미를 밝혀 주는 지혜를 얻는 길이며 행복은 그 결과로 얻어질 것이다. 토론은 현자가 되기 위해서 지혜를 찾아가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지혜는 순수한 탐구에 있지 않고 진리의 발견에 있다.”는 토론을 끌어낸다. 행복을 행운의 여신’(Fortuna)의 선물로 보던 고대 세계의 대중적 사고를 정화하여 그 선물의 주체를 하느님으로 대체하는 일도 첫머리부터 시도하고 있다.


테오도루스에게 바친 헌정사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염원이 근원적임을 항해(航海)라는 유비로 나타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졌고 행복의 항구를 향하여 배 저어 가는 사람(homo navigator)’에 암시된다. 다만 항구를 발견하고 곧장 뭍을 향해 저어가는 사람, 철학을 한다면서 항구에서 멀리 헤매는 사람, 떠나온 고국에 대한 막연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로 안개 속을 노 저어 가는 사람으로 나뉜다. 다만 철학의 포구에 들어서는 사람도 항구에 있는 해협에 부딪쳐 좌초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니 속된 지혜를 자랑하는 오만(傲慢)이라는 봉우리가 그 위로 솟아 있는 까닭이다(1.2-3).


행복의 추구를 섭생(攝生)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플라톤의 향연처럼 본서의 토론자와 독자들은 지식의 성찬에 초대받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영혼의 먹이가 지식이라고 보이지 않는가?’ 그러자 어머니가 나서서 물론 그렇지. 영혼이야말로 사물에 관한 이해와 지식 외에 딴 것으로 양분을 얻지 않지.’라고 대답하셨다.”(2.8) 자기가 젊었을 적에 마니교의 유물론적 합리주의에 빠지고 신아카데미아의 회의론에 떨어진 일을 상기하듯이 정신의 양식도 두 종류, 건강에 좋고 유익한 음식과 병들게 하고 해독을 끼치는 음식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2.8)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지식(知識)’ 또는 지혜(知慧)’를 추구하는 철학함이 행복과 긴하게 연관되면서 지식’(scientia)은 두 가지 의미를 띠고 본서의 대화에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 사회에서 전수되는 가르침을 학습하여 얻어진 학문적 인식인데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사로서 자유학예 특히 철학적 변증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습득시키려고 노력하는 범위이다. 둘째 의미의 지식혹은 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대화편들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근원적인 물음과 답을 포함하는 내용이다. “그대는 자기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대가 살아 있음을 안다. 그대가 인식하고 있음도 안다. 단지 그대는 이것들이 미래에도 항상 존재할 것인지, 그렇지 않고 [미래에는] 이 중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고 어떤 것은 항상 존속하고 어떤 것은 사멸할지, 아니면 모두가 존속한다고 한다면 이것들이 감소하거나 증대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아울러 사람이 자기에게서 가변적인 육체와 항속적인 영혼이라는 두 차원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들이 자아(自我)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각성해야 한다. 단일한 자아라는 구심점이 없다면 인간은 다() 속으로 분산되어버린다. 사람이 추구할 행복은 이 단일한 자아를 완성시키고 충족시킬 만큼 커다란 선()이어야 한다. 그런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물음이 나올 적에 좋은 걸 바라고 그걸 갖는다면야 행복하지. 못된 걸 바라면 비록 갖는다고 해도 불행하다.”(2.10)라는 어머니 모니카의 의외로 쉬운 답변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추구하는 목표는 한 마디로 선()이며 악()이 아님을 밝혀준다. 그 선은 어떤 선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항속하는 선(bonum semper manens), 불행이나 역경으로 훼손되지 않는 선이라고 답하면서 교부는 이런 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본문에서는 우리는 누가 행복하기로 작정하였다면 항상 지속하는 것, 행운이 변덕을 부리더라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을 마련해야 한다.” “하느님이 영원하시고 항상 존속하는 분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을 모신 habere deum 사람이 행복하다.”(2.11)는 논지로 정리되어 있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하느님을 모신 사람인가? 세 토론자가 상이한 답변을 내놓는다. 리켄티우스는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트리게티우스는 하느님이 이뤄지기 바라시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아데오다투스는 부정한 영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고 답변한다. 적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음’(habere deum)에 인간의 행복이 있음은 셋 다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카데미아학파는 이런 선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견지하는 회의론에 의하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테고, 항속하는 진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한 행복을 결하고 있다(2.14).

 

5. “최고선(最高善)만 인간의 염원을 충족시킨다

 

둘째 날(3.17-22)에 들어가면서 전날의 토론 내용이 인간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인간 소망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앎이 행복이다.”라는 두 명제로 정리된다. 누구든지 종교적 감정과 이성적 탐구 둘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득할 수 있다. 단지 거기에는 세 가지 장애가 있으니 지적인 무능력(imbecillitas), 현세적 자기만족(saturitas), 일상의 분주함(negotium)이고, 그에 대한 대안지성의 훈련’(exercitatio animi), '겸손한 신앙‘(fides), 철학에 헌신하는 '정신적 여가'(otium)가 꼽힌다(3.17).


누가 하느님을 모신 사람인가?” 라는 물음에 전날 아데오다투가 부정한 영을 지니지 않은 사람곧 순결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사실을 들어 그럼 누가 순결한 사람이냐?”는 물음이 뒤잇는다.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에게만 몰두하는 사람곧 오로지 진리 탐구에 헌신하는 사람(3.18)이라면 단지 육욕을 멀리하는 사람만 아니고 지성의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본서에서는 하느님을 모심’(habere deum)이라고 일컫는다(2.11). 같은 이념이 De ordine(질서론)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있음‘(esse cum deo)라고 표현된다. 만유가 존재론상으로 하느님 안으로 회귀해야 하는 이상, ‘하느님을 모시지 않음’ non habere deum, ‘하느님 없이 있음’ esse sine deo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실제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고 할 만하다. 불행이라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지 못함, 자기 존재 밖에 존재함을 의미하게 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deum habere)는 말 다르고 하느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non esse sine deo)는 말 다르다.”(3.21)는 모니카의 명제를 채택하면서 하느님은 만유와 함께 계시면서 모두에게 당신 호의를 보이고 만유에 당신 섭리를 베푸신다는 쪽으로 대화가 기울어진다. 이렇게 둘째 날의 토론에서는 행복(felicitas)은 갈구하는 대상의 향유(frui)에 있고 불행(miseria)은 그 대상의 결여(egestas)에 있음이 밝혀졌지만(4.23) 하느님을 찾지만 아직 못 찾은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호의를 보이시므로 나름대로 행복이 있다고 격려한다.


셋째 날의 토론(4.23-36)부족(不足)함에 불행이 있다면 과연 무엇의 결핍이 불행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느 부호(Sergius Orata)의 예를 들자면 소유(所有) 외에 더 바라는 것 없으니 그에게 결핍은 없지 않은가? 모니카가 지혜의 결핍이 불행이라고 못 박는다. “저 사람은 부자인데다 언변도 좋았고, 너희들 말마따나, 그 이상 욕심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겁냈다니까 그에게는 지혜가 빈궁했다. 은과 돈이 빈궁하면 빈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지혜가 빈궁하면 빈궁한 사람이라고 안 할 생각이냐?”(4.27)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말씀에서 두 가지 진실을 배운다. 지혜에 도달하는데 꼭 대단한 학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고 있고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지혜가 갖추어져 있고 하느님께 비추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4.27).


어리석음을 두려움(timor)이라는 심리문제로 본다면(2.11), “불행이라는 것은 빈궁 외에 무엇도 아니라는 결론”(4.27)이 맞다면, 인간은 비록 재산과 지식이 부요하더라도 어떤 근본 결핍을 가진 존재로, 근원적으로 갈망하는 바가 있는데 결코 갖추고 있지 못하는 존재로 단정된다(4.29). 어리석음이라는 빈궁을 느끼는 순간 사람은 불행하고, 그 불행을 극복할 지혜를 모색하는데 그것이 지혜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현자는 궁핍을 느끼지 않으니까 곧 행복하다. 현자는 행복을 보장하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아무런 빈궁을 느끼지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인간의 궁극 목적은 궁극 진리를 인식하고 인정함에 있고 거기 행복이 달려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부분적 진리로 일시 희열을 느끼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삶 전부와 우주 전체에 의미를 상정하는 궁극진리에 도달해야만 행복감을 만끽하게 만들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불행, 결핍은 최고선(最高善)의 결핍으로 밝혀진다.

 

6. “우리 내면의 이 광체를 향해서 저 숨은 태양이 빛살을 쏟는다

 

본서 말미(4.34-35)에서, 우리가 추상적으로 상정하는 저 지혜가 실제로 어떤 사물과 동일하냐는 물음을 내놓는다.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기 직전이던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철학자들이 로고스’(logos)라고 언급해왔고 신약성경에 말씀(Verbum)’이라고 불리는 존재,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그 지혜를 보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평생 동안 그리스도, 우리의 지혜(Christus, sapientia nostra)라는 신념을 견지하며 철학적으로 입증하려고 애쓴다. “지혜를 말하자면 하느님의 지혜 아니고 무엇을 얘기하겠는가? 우리는 신적인 권위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지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4.34)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대화가 상당히 종교적 방향으로 흘렀다고 자평하는 이유가 한다.


만유가 하느님을 기원으로 하여 존재하고, 하느님에 의해 소유됨으로써(a deo haberi) 존재가 지속하므로 만유가 하느님 없이 존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non est sine deo). 그러나 지성으로 하느님을 최고선 혹은 진리로 인식하고, 하느님을 향유할 목적에서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존재자들만 참된 의미로 하느님을 모시는(habere deum)’ 위치에 있다. 저 신성한 지혜가 진리의 원천으로서 인간에게 부단한 부름을 보내어 인간 측에서 자기 처지에 존재론적 결핍 곧 불행을 느끼고 불행의 원천을 탐색해 나가면서 궁극적 행복을 동경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리를 통해서 최고의 법도에 이르는 자는 누구든지 행복하다. 정신에게는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들은 비록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다."(4.34)


우리가 사유하고 언술하고 철학하면서 긍정하는 모든 진리들은 비록 편린일지라도 바로 진리 자체의 편린이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히 진리를 향유하면서 행복해지는 것은 후세의 일이다. “바로 그 경지가 정신의 충만한 만족, 행복한 삶이며, 바로 그것이 경건하고 완전하게 아는 앎이다. 바로 그에 의해서 그대가 진리로 인도되고(a quo inducaris in veritatem), 바로 그 진리를 그대가 향유할 것이며(qua veritate prefruaris), 바로 그것을 통해서 그대가 최고의 법도에 결속되기에 이를 것이다(per quid connectaris summo modo). 온갖 미신의 허황한 곡절을 배제하고서 인식을 하는 자들에게는 이 셋이 유일한 하느님이요 단일한 실체임을 보여준다.”(4.35)


모니카는 아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을 듣고서, 본서에서 토론된 행복을 다시 정리한다. “이거야말로 아무 거리낌 없는 행복한 삶이다. 곧 완전한 삶이다. 그러니 우리 굳센 믿음으로, 유쾌한 희망으로, 타오르는 사랑으로 [그 삶을] 손에 넣을 것으로 여기고 서둘러 그리로 인도받았으면 좋겠다.”(4.35)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카데미아학파 반박과 본서 행복한 삶두 편의 대화를 거쳐 진리 탐구와 행복 추구를 철학함의 궁극 목표로, 무엇보다 자기와 문하생들의 인생 목표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까닭은 지성이라는 우리 내면의 이 광체를 향해서 저 숨은 태양이 빛살을 쏟는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든 진실이 다 이 분의 것이다.”(4.35)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 사상

(Cf., “Happiness” in Allan D.Fitzgerald ed., Augustine through the Ages. A Encyclopedia)

 

비록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아이 적부터 조그만 잔에 담긴 물을 보고도 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Epistola 7 ad Nevium 3.6) 조숙한 소년시절부터 시작해서 성애와 갖가지 쾌락에 탐닉하고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 탐닉해 가면서 그 어느 것도 그만하면 됐어(sufficit!)”라고 할 만큼 욕망의 기갈을 채워주지 못함을 소년은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행복이란 언제나 무한한 폭을 갖는 지평(地平)으로 나타나는 무엇이었다.


교부 이전의 유럽 철학계의 행복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Ethica Nicomachaea 1.7-8)에 간추려져 있다. 행복은 최고선(summum bonum)'을 대상으로 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충족시킨다:


행복은 궁극적이다. 가장 선택할 만한 목적이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상이며, 인간이 언제나 어디서나 그것만 선택하고,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선택하며, 다른 무엇 때문에 수단처럼 선택하지 않는 그러한 대상이다.


행복은 포괄적이어서 모든 덕성과 모든 내면 선들과 모든 외적 선들을 내포한다. 곧 인간에게 좋은 것 전부를 망라하며, 덕성이란 그것을 지향해서 다른 것들을 자제하는 노력이다.

 

(1) 행복은 열망(熱望)에 있지 않고 향유(享有)에 있다.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원하는 바를 가져야 행복하다. 다만 원하는 바가 선한 것이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행복은 열망(熱望)에 있지 않고 향유(享有)에 있었으므로 자력으로든 은총으로든 열망하는 바를 소유 혹은 향유해야만 인간은 행복하다. 그리고 옳은 것”(honestum)을 바라는 욕망이 채워져야만 참으로 행복하다는 단서가 붙는다. 그의 행복 개념에는 욕망, 만족, 쾌락 셋이 한데 수렴되는 까닭이다. 교부의 행복론은 선한 것의 향유, 항속적인 것의 향유, 결국 하느님의 향유로 상승한다.

 

행복과 향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 하나만을 극진한 사랑으로 추구한다는 것도, 그 밖의 모든 것은 오로지 이 하나를 위해서 추구한다는 것도 참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모두 당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행복한 사람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지 못하거나,

자기가 바르게 원하지 못한 그것을 갖는 사람은 그 자체로 가련하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동시에 아무것도 악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행복하지 않다. (삼위일체론 13.5.8)


원하는 바를 갖지 못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보이는가?” 모두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원하는 바를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가?”

어머니: “좋은 걸 바라고 그걸 갖는다면야 행복하지. 못된 걸 바라면 비록 갖는다고 해도 불행하다.” (행복한 삶 2.10)

 

그러니까 참된 선의 향유가 참 행복을 초래한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모두 당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행복한 사람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갖지 못하거나, 자기가 바르게 원하지 못한 그것을 갖는 사람은 그 자체로 가련하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동시에 아무것도 악하게 원하지 않는(nihil vult male) 사람이 아니면 행복하지 않다.” (산위일체론 13.5.8)


각자가 자기를 제일 즐겁게 해준 것에다 행복한 삶을 설정하였다. (에피쿠루스가 쾌락에, 제논이 덕성에, 그리고 다른 인물은 다른 것에)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면 아무도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성싶다.


키케로: “철학자들만 아니고 토론할 자세가 서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가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 온당하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짓이다. 본인이 그릇되게 원하던 바를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다면 차라리 덜 가련해졌을 것이다. 누구든 악한 의지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가련한 인간이 되지만 악한 의지의 원의를 채울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으로 인해서 더 가련한 인간이 된다(산위일체론 13.5.8)

 

(2) “최고선을 향유하는 자가 행복하다.”

 

고대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내적 선(honestum 바름, 정직)과 외적 선(utile)을 구분했었고, 그런 구분에 따라서 교부는 인간이 추구하는 선()을 항유할 대상(bonum fruendi)과 사용할 대상(bonum utendi)으로 나눈다.

 

향유할 선과 사용할 선의 구분

 

사물은 향유하기 위한 것과 사용하기 위한 것와 향유하고 사용하기 위한 것이 있다. 향유하기 위한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용하기 위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게 우리를 돕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물에 도달하고 매달리게 붙들어준다.... 만일 우리가 사용해야 할 것은 향유하려고 한다면 우리 갈 길이 막히고 때로는 비뚤어진다. (그리스도교 교양 1.3.3)

 

두 선의 구분은 목적과 수단에 비견할 만하다. 향유(frui)와 사용(uti) 사이의 대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을 cupiditas (욕정)caritas(애정)로 구분하는데서 온다. 행복의 객관적 성격은 덕이라는 것, 향유해야 할 것을 향유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희구하는 데서 구분된다. 신플라톤 철학자들의 말처럼 덕은 지성과 영혼을 정화하여 그렇게 질서에 대한 사랑을 조성함으로서 궁극적인 것 곧 하느님을 사랑하게 유도한다. 그러니까 덕은 행복을 성취하는 수단이고 결국 하느님을 보고 소유하고 향유하게 만든다.

 

향유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 그 자체 때문에 그 사물에 애착함이다. 사용한다 함은, 용도로 쓰이는 사물을 우리가 성취하기 원하는 것에,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에 결부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당한 사용은 남용이나 오용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양 1.4.4)

 

덕과 질서


고대철학의 행복은 인간에게 갖추어진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을 덕스럽게구사하는데 있었고, 그래서 덕을 갖추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해지는데 충분하다고 하였다. 덕은 우리가 사용할 것과 향유할 것의 차서와 질서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스토아의 주장대로, 행복은 행운(fortuna: 요행)과 상관없고 외적 선으로부터도 독립된 무엇이다. 교부도 은 그 자체로 선이라고 하면서 다만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질서라고 덕을 정의한다. 덕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기(ordo... perducet ad deum) 때문에 행복을 준다는 언명은, 스토아나 신플라톤사상이 만유를 통치한다고 말하는 질서가 우주적(宇宙的) 차원을 넘어서 대신적(對神的) 차원으로 승화하게 만든다.

 

(3) 진리에서 오는 행복

 

교부의 행복론에서 최고선(summum bonum)처럼 언급되는 지혜’, ‘진리’, ‘영원등의 개념은 지복의 삶과 인간의 안식은 그가 하는 모든 활동의 질서 있는 합리성에 근거한다.”(De Genesi contra Manichaeos 1.20.31)는 사실을 전제로 하며, 그런 논리의 배경은 지성[지혜]과 인식[진리]과 사랑[영원]이 단일하다는, 지성의 삼위일체다.

 

지성이 전체이고, 지성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이나 지성이 자기를 인식하는 인식이 지성의 부분들이어서 이 두 부분들로 저 전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성, 사랑, 인식] 셋이 동등한 부분들이고 이 부분들로 어느 단일한 전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하지만 어느 부분도, 자체가 부분을 이루는 그 전체를 내포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성은 자기를 전체로 인식할 때에, 말을 달리 하자면 완전하게 인식할 때에, 지성의 인식은 지성 자기의 전체를 통해 존재한다. 또 지성이 자기를 완전하게 사랑할 때는 자기를 전체로 사랑하는 것이며, 지성의 사랑은 지성 자기의 전체를 통해 존재한다.” (삼위일체론 9.4.7)

 

지성과 인식과 사랑, 이 셋이 갖는 어떤 단일성이 행복은 진리의 발견과 향유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지성은 자기를 전체로 인식할 때에, 말을 달리 하자면 완전하게 인식할 때에, 지성의 인식은 지성 자기의 전체를 통해 존재한다.

또 지성이 자기를 완전하게 사랑할 때는 자기를 전체로 사랑하는 것이며, 지성의 사랑은 지성 자기의 전체를 통해 존재한다.

지성 자체가 자기를 사랑한다. 또 그 자체가 자기를 인식한다.

그래서 이 셋이 존재하되 지성이 [지성 아닌] 어떤 다른 사물에게서 사랑받거나 인식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셋은 필히 단일하고 동일한 존재의 무엇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위일체론 9.4.7)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학파를 존중하는 까닭은 최고선 개념 때문이다. 행복을 최고선에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진정하고 영구한 행복을 추구하게 독려하는 것이다.

 

윤리[철학], 그리스어로 ethike라고 부르는 것은 최고선(最高善)에 관하여 탐구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이 최고선에 결부되며, 이 최고선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최고선 자체 때문에 추구된다. 최고선을 일단 획득하면, 우리가 행복해지기는데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또한 목적(目的)이라고 하는데 목적 때문에 그밖의 것을 우리가 원하고 최고선 자체는 오로지 그 자체 때문에만 원하는 까닭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 최고선이] 혹자는 육체에, 혹자는 정신에, 혹자는 양편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신국론 8.8)

 

따라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육체를 향유(享有)해서도 아니고 정신을 향유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을 향유해서라고 말한 저 [플라토]철학자들에게 모두 자리를 비켜서야 한다. [다만 하느님을 향유한다는 말은] 정신이 육체를 향유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정신이 정신 자체를 향유한다는 것도 아니며, 친구가 친구를 향유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만약 [가견적인] 것으로부터 [가지적인] 것으로 소급하는 유비(類比)를 든다면, 눈이 빛을 향유하는 그런 것이다. [이 유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만일 하느님 친히 도우신다면 다른 데서 힘닿는데까지 다시 논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당장에는 플라토가 선의 목적을 덕성(德性)에 따라서 사는 것으로 정의하였다는 사실과, 런 일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갖고 하느님을 모방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지적한 사실, 그리고 다른 명분으로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지적한 사실을 상기시키킴으로 족할 듯하다. (신국론 8.8)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그래서 [플라토는] 철학함이란 본성이 비물체적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다시 말해서 철학자)은 하느님을 향유하기 시작할 때에만 비로소 행복해지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말은 사랑하는 무엇을 향유할 적에 당장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것이 아닌 바를 사랑함으로써 불행해지고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도리혀 더 불행해진다.) 단지 사랑하는 바를 향유하지 못하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사랑할 것이 아닌 바를 사랑하는 사람들마저도 그 대상을 사랑함으로써가 아니라 향유함으로써 행복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바를 향유할 적에 행복하다면, 참된 최고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최고선을 향유할 적에 행복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참으로 가련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플라토는 참된 최고선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철학은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향유함으로써 행복해지는 까닭이다. (신국론 8.8)

 

진정한 행복은 현세의 오감으로 향락하는 행복에서도 유추할 만하다

 

그대가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는 우리 지성과 이성보다 숭고한 무엇이 존재함을 그대에게 증명해 보이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다. 진리 자체이다! 힘닿으면 진리를 얼싸안으라! 진리를 향유하라!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려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시편 36,4).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청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고 지극히 탁월한 진리를 향유하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크나큰 열정으로 탐하던 아름다운 육체를, 배우자의 육체 심지어는 창녀의 육체를 얼싸안고서 사람들이 자기는 행복하다고 소리치거늘 우리는 진리를 포옹하고서도 행복을 의심할 터인가? 사람들은 목에 기갈이 심하여 시원하고 물많 은 샘에 이르거나 굶주린 몸으로 멋지게 꾸미고 음식이 풍성한 점심이나 저녁을 들면 행복하다고들 큰소리치는데, 우리는 진리로 목을 추기고 진리로 보양되면서도 행복함을 부정할 셈인가? 장미와 다른 꽃으로 꾸민 침상에 누워서, 또는 향기 높은 향수를 만끽하면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의 목청을 자주 듣는 우리지만 진리의 영감보다 향기로운 것이 무엇이며 그보다 유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진리에 취하여있으면서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겠는가? (자유의지론 2.13.35)

 

진리 곧 지성의 빛에서 최고선이 인지된다.

 

진리 속에서 최고선이 인식되고 견지되며, 그 진리가 곧 지혜이니, 우리는 진리 속에서 최고선을 식별하고 견지하고 최고선을 향유토록 하자! 최고선을 향유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다! 바로 이 진리가 저 모든 선들을 [선한 것으로] 밝혀주는데, 저 선들은 곧 참된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역량에 따라서 [저 선들을] 인식하면서 [저 선들 가운데] 하나씩 또는 여럿을 골라서 향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태양의 빛 속에서 자기가 쾌히 바라보고 싶은 것을 고르듯이 (그 사람들 가운데서 만일 참으로 기운 좋고 건강하고 아주 막강한 시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태양 자체를 관조하려고 할 것이니, 그보다 허약한 눈들이 즐기는 모든 것들도 실상은 태양이 비추어 보게 해 준다) 강렬하고도 강건한 지성의 정곡(正鵠), 확고한 이성으로 무수히 많은 참되고 불변하는 사물들을 관조하면서도, 모든 사물들이 드러나게 만드는 저 진리 자체에로 시선을 돌릴 것임에 틀림없다. 또 나머지 다른 것들은 마치 다 잊어버린 양 진리에 애착하고, 진리 안에서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을 향유한다. 다른 참된 사물들 속에서 유쾌함을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진리 자체에 의거하여 유쾌함을 준다. (자유의지론 2.13.36)

 

지혜가 우리 내부에서 무엇을 이루어내기에 지혜에 최고선 곧 궁극 행복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지혜로워지려고 힘쓸 때에, 지성으로 우리가 포착하는 바에다, 어떻게 해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또 흠쾌하게 온 영혼을 결속시키고 유지시키며 거기에 단단히 고착시키는 일 말고 다른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되 더 이상 자기 사유물처럼 두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며, 비록 그것을 지나가는 사물들에 관련시키기는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벗겨내어 하나이요 항상 여일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아니겠는가? 육체의 온 생명이 영혼임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행복한 삶은 곧 하느님이시다. 우리로서는 [하나요 여일한 사물에 결속하는] 작업을 행하는 중인데 그것을 완결하기까지는 여전히 중도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이 어두운 여로에서 아직 흔들리면서도 그나마 참되고 확실한 선들을 향유하도록 허용되었다면, 성경이 지혜에 관해서 기록한 내용, 곧 지혜가 자기를 사랑하는 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연인들이 지혜를 찾고 지혜에게 올 때에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야기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 아닌지 보아야 한다. 또 지혜는 그것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지 그대가 깨닫게 만들고, 그대가 그대 안으로 돌아오게 만들며, 육체의 감관으로 그대가 포착한 바를 인정하거나 부정함은 어디까지나 그대 앞에 아름다움의 어떤 법칙을 두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만든다. 밖앝에 무엇이든지 아름답다고 그대가 느끼는 것이면 그 [법칙]에로소급시켜 [아름답다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대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청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고 지극히 탁월한 진리를 향유하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것이 무엇이겠는가?”(자유의지론 2.13.35)

 

(4) 결국은 하느님에 대한 영적 소유가 행복이다.

 

하느님 도성의 최고선은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이다. 사멸할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음으로써 그 평화 속을 통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불사불멸하는 인간으로 그 평화 속에 머물게 되며 거기서는 더 이상 아무런 역경도 겪지 않는다. 저런 생명이 극히 행복하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군가? (신국론 19.20)

 

하느님만 인간이 무한하게 추구하는 그 삶, 초월적이고 종국적인 그런 삶을 이루어주실 만하다. 불사불멸이 없으면 인간에게는 행복한 삶이 없는 까닭이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가 무엇을 원하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멸할 인생에서는 이런 처지가 오지 않는다. 불사불멸이 함께 존재할 적에만 이런 처지가 올 것이고 또 가능할 것이다. 그런 처지가 인간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행복을 찾는 것 자체가 헛될 터이니, 불사불멸 없이는 행복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삼위일체론 13.7.10)

 

행복의 첫째 조건은 사람이 원하는 바를 영구히 갖는데 있다

 

이 사멸할 인생, 오류와 환난이 가득 찬 인생에서 신앙, “하느님을 믿는신앙이 특히 요긴하다. 무릇 일체의 선은 하느님이 아니면 딴 데서 발견할 수 없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선해지는 선, 그리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선은 하느님 아닌 딴 데서 사람 속으로 오거나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불행 중에도 신실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이 현세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에 이를 경우에,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 곧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경지가 이루어질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가 무엇을 원하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멸할 인생에서는 이런 처지가 오지 않는다. 불사불멸이 함께 존재할 적에만 이런 처지가 올 것이고 또 가능할 것이다. 그런 처지가 인간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행복을 찾는 것 자체가 헛될 터이니, 사불멸 없이는 행복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삼위일체론 13.7.10)

 

그렇다면 참 행복은 초월적이고 순수하고 영적이며 그런 경지는 종말에서만 달성된다. 구원(救援)과 동일하다. 이승의 부분적 잠시적 행복은 종말 행복에 희망을 북돋을 따름이다.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되었음 같이 우리는 또한 희망으로 행복해졌다. 또 구원이 그렇듯이 행복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손에 쥐고 있지는 못하며 장차 올 것으로 기다릴 따름이다. ‘참을성 있게기다린다는 말은 우리가 악에 에워싸여 있는 까닭이고 그 악을 참을성 있게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 선에 도달하기까지, 형언할 수 없는 향락을 누릴만한 것은 모두 다 있고 참고 견뎌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저 선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래야만 한다. 저 구원, 장차 올 세상에 있을 저 구원이야말로 최종 행복이 될 것이다. (신국론 19.4.5)

 

그리스 지성인들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은 교육과 수덕(허다한 인고忍苦를 포함한)이었지만 교부에게 참 행복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12)


이 새로움 때문에 교부의 행복론에서 그리스도가 중심 역할을 한다.

인간들을 지복(至福)의 불멸성으로 인도하므로 인간과 인류의 중개자가 된다.

 

인간은 사멸하고 비참하기 때문에 불멸하고 지복한 존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불멸성과 지복에 닿으려면 무엇을 중재로 택해야겠는가? 지복을 갖춘 자가 중간존재로서 들어서는데 사멸성을 제거하고 죽은 자들로부터 불멸하는 자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목적이 있고 비참한 자들로부터 지복의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죽은 자들로부터 불멸하는 자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자기가 부활함으로써 입증해 보였고, [비참한 자들로부터 지복의 인간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분 자신이 한번도 지복으로부터 멀어진 바 없었으므로 [가능하다]. (신국론 9.15.2.)

 

인간들을 지복의 불멸성으로 인도하므로 중개자가 된다

 

그렇지만 말씀이기 때문에 중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최고로 불멸하고 최고로 행복하여 사멸하고 비참한 존재들로부터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점에서 중개자가 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저 선에 이르기 위하여, 스스로 행복할뿐더러 행복하게 만드는 선에 이르기 위하여는 우리가 다른 중개자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 선에 도착하는 층계를 이루는 [다른 중개자들도 필요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스로 행복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성(人間性)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당신의 신성(神性)에 참여하는 담보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사멸성과 비참에서 우리를 해방한다면서 불멸하고 지복에 이른 천사들한테로 우리를 데려가서 그들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불멸하고 지복에 이르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도 않는다. 중개자가 되기 위하여 종의 형상을 취하여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을 때에도 그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는 여전히 천사들 위에 머물러 있었다. 동일한 한 분이 상위의 존재들에게 생명이 되고 하위의 존재들에게도 생명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신국론 9.15.2)

 

(5) 불멸하는 행복만 참 행복이다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 덕을 닦아서 이성과 욕망의 조화를 이루는데서 행복이 온다고 여겼다. 그러나 행복은 영원한 것이어야 참된 행복 곧 지복(至福)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이다(행복한 삶 11.11; 12.20; 14.25). 현세행복에 궁극목적을 두는 현세주의 쾌락주의나 영원회귀를 주장하는 이교도 윤리에 대항해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견지하기에 이른다. 사랑의 논리학을 따르면서 구원자의 은총과 중재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영원한 행복으로 눈을 돌린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대상을 꾸준히 추구하는 의지가 필요하고 그런 의지는 은총으로 온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바램이라면, 당연히 모두가 불사불멸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사불멸에 관하여 질문을 받는다면, 행복에 관해서 질문을 받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기는 불사불멸을 원하노라고 모두 대답한다. 하지만 불사불멸 없이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세에서는] 이 불사불멸이 절망적이므로, 현세에서 우리가 찾는 행복이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실제상의 행복이라기보다는 명목상의 행복일 터이므로, 그냥 행복이라고 가정(假定)할 따름이다. (삼위일체론 13.8.12)

 

불멸하는 삶만이 참으로 행복하다

 

원하는 대로 살고 무엇을 잘못 원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사하시어 인간 본성이 불사불멸을 누릴 능력이 있는 이상, 불사불멸을 원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결코 잘못 원하는 것이 아니다. 불사불멸을 누릴 능력이 없다면 행복을 누릴 능력도 없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고 하자. 이것은 [만고의] 진리가 선언하는 바이고, 자연본성이 추구하는 바이며, 최고로 선하시고 변함없이 복되신 창조주가 인간 본성에 심어주신 바이기도 하다. 내 다시 말하거니와, 만약 행복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의당히 싫어진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 싫다면, 행복한 그 처지를 소진하거나 상실하는 일도 싫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 살아있지 않는 한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니 살아있기를 상실하는 것도 싫다. 따라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나 참으로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은 불사불멸하기를 바란다. 원하는 대상이 거기에 없다면 그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삶이 영구(永久)한 것이 아닌 한 그 삶이 절대로 진정 행복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 13.8.12)


불사불멸은 신앙의 대상이다. 거의 전 인류가 인간, 혹은 인간의 영혼, 혹은 영과 육의 전인(全人)이 불사불멸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지만 어느 철학도 이의를 달지 못할 만큼 확증한 바 없으므로 그것이 인간 논리로 확실하게 증명하는 대상이 아니고 성서의 신성한 권위로 하는 약속이다.

 

[영구한 행복이] 바람직하다고 인정하더라도 과연 [영구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 본성이 파악할 능력이 있느냐는 얘기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신앙이라는 것이 있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신사람들에게 이 신앙이 갖추어져 있는 한,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 대신 인간 논리로 여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소수만, 그것도 영혼의 불사불멸을 탐구하는 데까지만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대단한 재능을 갖추고 여가(餘暇)가 넉넉한사람들, 치밀한 학문들을 연마한 사람들만 겨우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혼에 확고하고 행복한 삶, 그러니까 진정한 삶이 있음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저 사람들은 후세에서] 행복을 누린 다음 현세의 불행으로 되돌아온다는 말까지도 하였다. 저 인물들의 이런 사상에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들은 영혼이 정화되고나면 신체가 없이 영원한 행복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결국 영혼[의 영원한 행복에 관한] 이론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삼위일체론 9.12)

 

희망의 대상

 

그런데 신앙은 인간 전체가 불사불멸하리라고 약속하며, [후세에 불사불멸하는] 인간 역시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하리라고 약속하는데, 그것도 인간적 논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내세워 한다.

 

지혜로운 신앙인들은 이승살이에서도 희망을 품어 행복하다

 

하느님 도성의 최고선은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이다. 사멸할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음으로써 그 평화 속을 통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불사불멸하는 인간으로 그 평화 속에 머물게 되며 거기서는 더 이상 아무런 역경도 겪지 않는다. 저런 생명이 극히 행복하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군가?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삶이 제아무리 정신과 육체의 선 그리고 외적인 사물들의 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삶과 비교한다면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평하지 않을 사람이 누군가?

하지만 누가 현세 생명을 이용하여 저 [영원한] 생명의 목적으로 귀결시키고, 지극한 열정과 지극한 믿음으로 저 생명을 사랑한다면, 지금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자가당착은 아니리라. 물론 [지금 누리는] 현실 덕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저 희망 덕택에 행복하다는 뜻이다. [지금 누리는] 이 현실은 [미래에 대한] 저 희망이 없으면 거짓 행복일뿐더러 커다란 비참일 따름이다. 정신의 참다운 선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연고이다. 비록 현명하게 분별하고 용감하게 수행하고 절조 있게 삼가고 정의롭게 분배하는 그러한 [언행에서도] 자기의 지향을 저 목적에로 이끌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지혜가 아니다. 저곳에서는 과연 영원을 확보하고 완전한 평화 중에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신국론 8.8)

 

 

. 고백록에 따른 행복의 명상

 

* 행복에로 지음 받은 인간 실존

인간, 당신 창조계의 한 몫이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합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한줌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당신을 찬미하며 즐기라고 독촉 재촉하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한테로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합니다. 주님, 당신을 부름이 먼저인지 당신을 찬미함이 먼저인지, 또 당신을 아는 일이 먼저인지 당신을 부르는 일보다 먼저인지 내가 알고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누가 당신을 모르면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고백록 1.1.1)

 

내 하느님, 나의 자비시여,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지어내셨고, 당신을 잊어버린 나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 영혼 안으로 당신을 불러 모시오니, 당신께서 나에게 불어넣으셨던 그 열망으로 내 영혼이 당신을 받아들이게 미리 준비시키시는 까닭입니다. 지금 당신을 부르는 이 영혼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고백록 13.1.1)

 

당신의 선하신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당신의 의지가 감돌고 있었으며, 그 의지 자체로 자족하면서 당신께서 만드셨던 생명 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생명에게는 살아 있음이 곧 행복하게 삶이 아니니 살아 있으면서도 자체의 어둠 속에 떠도는 까닭입니다. 이 생명에게 남은 일은 자체를 창조하신 분에게 전향함이요 갈수록 더 자기 생명의 샘에서 살고 그분의 빛 안에서 빛을 보고 완성되고 비추임 받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고백록 13.4.5)

 

* 인간이 행복을 찾을 때 사실은 하느님을 찾는 것

주님, 그러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찾습니까? 내 하느님이신 당신을 찾을 때 나는 행복한 삶을 찾습니다. 내 영혼이 살겠다고 내가 당신을 찾겠습니다. 내 몸은 내 영혼으로 살고, 내 영혼은 당신으로 삽니다. 그런데 내가 어떡하다 행복한 삶을 찾게 되었습니까? 족하다. 바로 여기 있다.”라고 스스로 말하기까지 내게는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떡하다 내가 그것을 찾게 되었을까?”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유래합니까? 회상을 통해서, 그러니까 마치 행복한 삶을 내가 망각해버렸고 내가 망각한 사실을 아직 간직하고나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욕구를 통해서, 한 번도 안 적이 없었든, 그것을 까맣게 망각해버려서 내가 망각했다는 사실마저 기억 못하든 상관없이, 그냥 모르는 것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듯이 그렇게 된 것입니까? 누구나 원하는 것, 아예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디서 알았기에 그토록 행복한 삶을 원합니까? 어디서 보았기에 그토록 좋아하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갖고 있습니다. (고백록 9.20.29)

 

사람 행복해지기 원한다는 점은 더없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서 행복한 삶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떤 개념으로 그것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내가 탐색하는 중입니다. 그 개념이 기억 속에 존재하느냐는 점입니다. 만약 거기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언젠가는 행복한 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더라도 과연 한때라도 우리가 저마다 다 행복했었는지, 아니면 최초로 범죄한 그 사람(그 사람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죽었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불행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안에서 행복했었는지는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묻는 것은 행복한 삶이 기억 속에 존재하느냐 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알고 있지 못하다면 좋아할 리도 없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바로 그 사물이 욕심난다고 우리 모두 자백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고, 따라서 행복해지고 싶으냐고 한 마디로 물을 수 있다면 모두가 서슴없이 그러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낱말이 가리키는 사물이 그들의 기억에 간직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입니다. (고백록 9.20.29)

 

* 인간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건만...

그러면 내가 언제 어디서 내 행복한 삶을 경험하였기에 그것을 상기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기에 이르렀습니까? 나만 그런 것 아니고, 소수 인간들과만 그런 공감이 있는 것 아니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우리가 확고한 개념으로 안 대상이 아니라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경우는 어떻습니까? 군에 입대하고 싶으냐고 두 사람에게 물었을 경우 그 중 하나는 그러고 싶다 하고 다른 사람은 싫다고 답하는 일은 있을 만합니다. 그런데 행복해지고 싶으냐고 둘에게 묻는다면 조금도 주저 않고 둘 다 그게 소원이라는 말을 할 테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 말고는 전자가 다른 이유로 군에 입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후자가 싫다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혹자는 여기서 혹자는 저기서 기쁨을 찾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데는 이구동성이고, 기쁨을 누리고 싶으냐고, 그 기쁨을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느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여기서 저 사람은 저기서 얻어내려고 하겠지만 그 길로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은 오직 하나, 기쁨을 누리는 일입니다. 기쁨이 어떤 것인지 자기는 경험을 못 해 보았다는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런 것이니까, ‘행복한 삶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억에서 그것을 더듬어 찾아내 확인이 됩니다. (고백록 9.22.31)

 

*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하느님이 기쁨이 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 마십시오! 내가 어떤 기쁨으로 기뻐하든 그것만으로 내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불경스러운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기쁨, 당신을 거저 섬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이 따로 있으니 당신 친히 그들의 기쁨이십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두고, 당신 때문에 기뻐함, 그것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행복한 삶이 다른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딴 기쁨을 찾게 마련이고 참된 그것을 안 찾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의지는 기쁨에 대한 어떤 표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고백록 9.22.32)

 

* 진리에서 비롯한 즐거움을 모두 탐하면서도...

그렇다면 당신 홀로 행복한 삶이신데 당신을 두고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은 행복한 삶도 바라는 것이 아닌 셈이므로 과연 모든 이가 행복해지고 싶은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럼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오히려 육은 영을 거슬러 욕망하고 영은 육을 거슬러 욕망하다보니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러다 보니까 자기 힘이 미치는 데에만 빠져들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 아닙니까? 그 까닭은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을 두고는 그것을 얻어내기에 충분할 만큼 욕심을 안 내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진리를 두고 기뻐하고 싶은가, 거짓을 두고 기뻐하고 싶은가 모두에게 물음을 건넨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듯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는 진리를 두고 더 기뻐하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진리를 두고 기뻐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내 빛이시여, 내 낯을 살려주시는 내 하느님, 그것은 진리이신 당신을 두고 기뻐함입니다. 바로 이 행복한 삶을 모두가 바랍니다. 남을 속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나도 많이 겪었습니다만 속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못 만났습니다. 따라서 또한 진리를 알게 된 곳이 아니라면 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어디서 알았겠습니까? 속기 싫어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있으며, 행복한 삶(그것은 진리를 두고 기뻐함 외에 딴 것이 아닙니다)을 사랑할 적에는 진리 또한 사랑하는 것이고, 그들의 기억 속에 진리에 대한 어떤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야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진리에서 기쁨을 얻어내지 않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하고 있는 그것보다 아마도 사람을 차라리 불행하게 만드는 다른 것들에다 더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람들 속에는 아직도 약간의 빛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둠이 덮치지 않게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고백록 9.23.33)

 

* 사랑만이 진리를 알거늘...”

그렇다면 왜 진리가 미움을 낳고 당신의 사람이 진리를 설파하다 그들에게 원수가 된 것입니까? 행복한 삶이 사랑을 받고, 행복한 삶이란 진리를 두고 즐거워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아마도 진리가 사랑을 받기는 하는데, 사람들이 딴 것을 사랑하면서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진리이기를 바라며, 또 누구나 기만당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만큼 기만당하고 있으리라는 사실도 자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자기들이 진리라고 사랑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진리를 미워하는 셈입니다. 진리가 빛을 발할 때는 사랑하지만 진리가 꾸짖을 때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란 속기는 싫고 속이기는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진리가 자체를 손가락질 할 때는 좋아하지만 진리가 자기들을 손가락질 할 때는 미워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의해서 들추어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이렇게 되갚습니다. 본인들이 싫어도 진리는 그들을 드러내고 말며 그러면서도 진리는 그들에게 자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백록 9.23.34)

 

*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안에 계셨고 나는 밖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당신을 찾고 있었고, 당신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내가 추루하게 쑤시고 들어갔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나와 함께 계셨건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 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들이 나를 당신께로부터 멀리 붙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부르시고 소리 지르시고 내 어두운 귀를 뚫어놓으셨고, 당신께서 비추시고 밝히시어 내 맹목을 몰아내셨으며, 당신께서 향기를 풍기셨으므로 나는 숨을 깊이 들이키고서 당신이 그리워 숨 가쁘며, 맛보고 나니까 주리고 목이 마르며, 당신께서 나를 만져주시고 나니까 나는 당신의 평화가 그리워 불타올랐습니다.(고백록 10.27.38)

 

* 영원한 안식일의 평안

주 하느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으니 정묵靜黙의 평화 pax quietis 안식일의 평화, 저녁 없는 평화를 주십시오 pax sabbati. 아름답기 그지없는 저 질서, 참 좋은 사물들의 저 모든 질서마저도 제 정도를 다하고 나면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저 모든 것에는 아침이 되고 또 저녁이 되고 했습니다.

 

일곱 째 날은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날을 영구히 머물도록 성별聖別하신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참 좋을 일을 하시었고 그 일도 정묵 속에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신 다음 이렛날에는 쉬셨습니다. 당신 성경의 음성이 우리에게 미리 말해주기로는, 우리도 우리의 행업 다음에, 그러니까 우리의 참 좋은 일을 마친 다음에는(그 좋은 일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선사해 주신 것이니),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고백록 13.36.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