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 교수의 "로마시대의 문학" 


베르길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극 이해 


(대우재단 시민문학강좌) (2017.11.25)




차례 

1. 베르길리우스의 Aeneis에 그려진 경건(敬虔)한 우수(憂愁)

2.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극 이해 


 

1. Vergilius의 Aeneis에 그려진 경건(敬虔)한 우수(憂愁)


다음 pptx를 열면 이하에 라틴어 시문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줄거리가 먼저 이미지로 간추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2.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극이해'"를 산문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로마시대의 문학(배경넣어수정편집) (1).pptx


 

1. 비극 문학: 고() 앞에서 부르짖는 비명 

   Quo numine laeso? 

 

(1) Aeneas, quo iustior alter nec pietate fuit

    '경건으로 그보다 의로운 이 없었는데...'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의 주인공 아이네아스Aeneas(에네앗)은 여신 비너스Venus 와 트로야의 왕자 앙키세스Anchises 왕자 사이에 태어난 영웅’(heros)으로서 대인관계에서는 '정의'(iustitia)무공’(belli labores)으로, 대신관계에서는 무훈’(virtus)경건’(pietas)으로 걸출한 인물로 칭송받는다트로야의 함락 후 트로야인들의 신주를 모시고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로마 제국을 세우라는 사명을 운명(fata) 혹은 대시 유피텔Iupiter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는 아킬레스Achilles 또는 오디쎄우스 Odysseus라는 한 인간의 운명(res familiaris),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한 국가적 운명(res publica)을 종교적 설화의 줄거리로 전개한다. 한 인간의 정치적 사명과 한 국가 사회의 세계사적인 역할을 주제로 삼았기에 이 작품이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와 나란히 인류의 정신 유산으로 전수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구전을 집대성한 신화적인 서사극이 아니고 로마의 전성기 아우구스투스 시대라는 역사적 시점에서 철학적인 반성을 거쳐서 엮어진, 새로운 창작이다.


명계에서 앙키세스가 들려주는 '인간 운명에 대한 연설'(6.724-51)에는, 비록 신피타고라스 사상에 입각한 비관주의와 인간 육체에 대한 이원론적 적대감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세계사의 시각으로 영원한 로마의 역할을 본 사관(史觀)이라든가,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를, 전설적 황금시대를 복원할, 영웅으로 묘사한 점은 이미 체화된 역사철학이 아닐 수 없다.

 

카르타고 해안에 파선한 아이네아스의 부하들이 카르타고 여왕 디도에게 주군 아이네아스를 소개하는 장면에는 그의 신원을 표현하는 두 덕성, 무공과 경건(virtus[bello et armis] et pietas)이 한데 나온다.


rex erat Aeneas nobis, quo iustior alter

nec pietate fuit, nec bello maior et armis (1.544-545)

우리 왕은 에네앗으로 그는 누구보다 의롭고

충직과 전쟁의 용맹으로 그만한 분이 없으니

(아이네아스가 우리 주공이었는데, 경건으로 그보다 의로운 이

없었고 전쟁과 군사에서 그보다 출중한 이 없었더이다.)

 

서사시 후반부에 라티움인들과 트로야인들 사이의 격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양편의 전사자들을 매장하는 휴전을 청하러 투르누스 편에서 사자가 온다. 그는 외교상의 수식이지만 아이네아스의 덕목을 이렇게 칭송한다.


quibus caelo te laudibus aequam?

iustitiaene prius mirer belline laborum? (11.125-126).

무슨 찬사를 바쳐 그대를 천계에서 견주리요?

정의의 덕목을 먼저, 아니면 전쟁의 수고를 탄복할 것인가?


장차 아이네아스가 명계 (冥界)에서 부친 안키세스에게서 신탁으로 들을 사명도 이렇게 묘사된다.


tu regere imperio populos, Romane, memento

(hae tibi erunt artes), pacique imponere morem,

parcere subiectis et debellare superbos. (6.851-853).

로마인이여, 기억하라. 그대는 뭇 백성들을 주권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평화에로 법도를 부과하는 일 (이것이 그대의 예술이어라.)

속민에게는 관용하고 오만한 자들은 정벌하는 것이다.

 

카르타고를 건설한 여왕 디도에게 주어진 사명도 iustitia gentis frenare superbas("오만한 백성들을 정의로 제압하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o regina, novam cui condere Iuppiter urbem

iustitiaque dedit gentis frenare superbas (1.522-523)

여왕이시여, 유피테르께서 새로 나라를 세우도록

드센 족속들을 정의로 제압하도록 그대에게 승낙하시니.


(2) 인생과 역사의 비극


올림포스산의 불사자들이 운명의 뜻을 이루면서 대대적 살륙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인간사와 영웅들의 수고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도 사멸할 존재들이 겪어가는 인생과 역사의 비극에 깊은 연민이 서려 있다. 영웅으로 태어나 제신들의 내분과 훼방으로 겪어내야 하는 눈물겨운 시련과 방랑과 충돌이 시인에게 연민을 자아낸다.


di Iouis in tectis iram miserantur inanem

amborum et tantos mortalibus esse labores (10.758-759).

유피테르 신의 전당에서는 사멸하는 인간들에게 헛된 분노와 수고며

그토록 많은 수고가 끼쳐져 있음을 가련하게 보고 있었다. 

 

만토바의 땅을 아우구스투스의 직업군인들에게 몰수 당하고서 로마와 나폴리, 칼라브리아와 아테네로 유랑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인생고와 내전의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닦아가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카르타고 해안에 난파 당하여 밀려온 트로야사람들을 맞아주는 디도 여왕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sunt lacrimae rerum et mentem mortalia tangunt (1.462).

세상의 눈물, 사람 일은 사람 마음을 적시는 법

(눈물겨운 사건들이며 사멸할 인생들의 비운은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니...)

 

me quoque per multos similis fortuna labores

iactatam hac demum uoluit consistere terra;

non ignara mali miseris succurrere disco (1.628-630).

비슷한 운명은 수많은 고초에 시달린 나 또한

마침내 바로 이 땅에 정착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베풂을 배웁니다


(3) 비극에 대한 물음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인간이 너무 탁월하거나 어느 백성이 지나치게 강성하면 신들의 질투 (phthonos theon, invidia deum)를 사서 돌연히 그 세가 꺾이고 만다는 착안을 하였다. 옥타비아의 아들로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젊은 나이에, 황실과 제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요절한 마르켈루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베르길리우스는 헤로도투스와 같은 논리를 편다.


", 천계의 신들이여, 당신들에게는 로마 후예들이 너무도 강성해 보인다는 말입니까?

너무도 오랜 세월을 그 은덕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6.870-871)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베르길리우스가 풀어보고자 하는 종교철학적 주제는 여신 유노가 파리스의 사과를 베누스에게 빼앗긴 질투심과 복수심(thymos theon, ira deum)이 극중의 파토스를 끌어가는 주선율로 삼고 첫 줄부터 정식으로 의문을 제기한다(1.8-11):


Musa, mihi causas memora, quo numine laeso

quidue dolens regina deum tot uoluere casus

insignem pietate uirum, tot adire labores 

impulerit. tantaene animis caelestibus irae? (1,8-11)

무사여, 제게 사연을 말하소서, 어찌 속이 상해

신들의 여왕은 어인 양심에, 몰락에 휘말려

빼어나게 충직한 사내가 저런 고난을 겪게끔

강요했는지. 하늘 뜻의 분노는 그런 것인가? 

(무사여, 내게 까닭을 일깨워 주오. 어느 신령을 범하였기에,

신들의 여왕이 무엇을 아파하기에, 저토록 우여곡절을 엮어내는 것이며

경건이 극진한 인물로 하여금 그 많은 고생을 겪도록 몰아 세웠던가?

천상 존재들의 심정에 그토록 심한 분노가 있다는 말인가?)


Arma uirumque cano, Troiae qui primus ab oris

Italiam fato profugus Lauiniaque uenit

litora, multum ille et terris iactatus et alto

ui superum, saeuae memorem Iunonis ob iram,

multa quoque et bello passus, dum conderet urbem 

inferretque deos Latio... (1,1-6)

무기와 사내를 노래한다. 그는 처음 트로야를

도망쳐 운명을 쫓아 이탈랴와 라비늄에 왔다.

그는 뭍에서 끔찍이 당하고 바다에 내던져져,

하늘 뜻의 핍박, 성난 유노의 분노 때문에

전쟁 또한 모질게 겪었으니 


id metuens ueterisque memor Saturnia belli,

prima quod ad Troiam pro caris gesserat Argis

necdum etiam causae irarum saeuique dolores 25

exciderant animo; manet alta mente repostum

iudicium Paridis spretaeque iniuria formae

et genus inuisum et rapti Ganymedis honores:

his accensa super iactatos aequore toto

Troas, reliquias Danaum atque immitis Achilli, 30

arcebat longe Latio, multosque per annos

errabant acti fatis maria omnia circum. (1,23-28)

사툰의 따님은 두려웠다. 기억 속 옛 전쟁도,

트로야를 친 아르곳을 도와 앞장섰던 전쟁,

애초 분노의 이유, 지극한 고통으로 사무친

파리스의 심판, 여신의 미모를 조롱한 불의도,

밉살스런 혈통, 가뉘멧에게 앗긴 명예까지도

늘 기억에 남아, 마음 속 깊이 삭지 않았건만. 


cum Iuno aeternum seruans sub pectore uulnus

haec secum: 'mene incepto desistere uictam

nec posse Italia Teucrorum auertere regem!

quippe uetor fatis. (1,36-39)

그때 유노는 가슴속 영원한 상처를 돌이키며

혼자 말했다. ‘내가 생각을 접고 물러서야 하나?

테우켈 족의 왕을 이탈랴에서 못 떼놓는가?

운명이 거부한다고? 

 

(4) 제신의 분노


시인이 가장 처절하게 그려내는 것은 제신들의 배신과 그리스인군의 계략 속아(timeo Danaos et munera ferentes) 트로야가 함락되고 프라아무스를 비롯한 장수들이 쓰러지고 여인들이 유린당하고서 죽어가던 트로야 최후의 밤을 회고하는 아이네아스의 격분에 찬 언사, 소리 내어 낭송할 적에 라틴문학의 최고봉(라오콘의 비극, 프리아무스의 죽음, 크류사의 당부)에서 누누이 ? ? ?’.

이 힐문은 트로야의 멸망은 유피텔의 분노에서 기인한다는 판투스의 절망에서 드러나고:


uenit summa dies et ineluctabile tempus

Dardaniae. fuimus Troes, fuit Ilium et ingens 325

gloria Teucrorum; ferus omnia Iuppiter Argos

transtulit; incensa Danai dominantur in urbe (2,324-327)

최후의 날과 벗어날 수 없는 때가 이르렀소.

달다냐에, 우리 트로야, 일리온은 사라졌소.

테우켈의 영광도, 성난 유피테르가 아르곳에[

모두 양도했소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으로 뛰어드는 아들 아이네아스를 만류하는 베누스 여신의 해명에서 드러난다:


non tibi Tyndaridis facies inuisa Lacaenae

culpatusue Paris, diuum inclementia, diuum

has euertit opes sternitque a culmine Troiam.

aspice (2,601-604)

네가 증오하는 튄다르의 딸, 스팔타의 여인도

죄 많은 파리스도 아니다, 신들이 무자비함이

번영하던 트로야를 정상에서 밀어버렸다 


넵툰의 트로야가 송두리째 마치 산정에 우둑 솟은 고령의 물푸레나무가 쓰러지듯멸망할 적에 제신들이 벌목군들처럼 몰려드는(2,625-633) 광경, 거기 덤벼드는 것은 누구보다 끔찍한 유노를 비롯해 트로야를 건설케 한 넵툰’, 다달루스 후예들이 그토롣 떠받들던 팔라스, 심지어 아버지대신마저 덤벼드는데 어느 인간군상이 버티겠는가!


Neptunus muros magnoque emota tridenti 610

fundamenta quatit totamque a sedibus urbem

eruit. hic Iuno Scaeas saeuissima portas

prima tenet sociumque furens a nauibus agmen

ferro accincta uocat.

iam summas arces Tritonia, respice, Pallas 615

insedit nimbo effulgens et Gorgone saeua.

ipse pater Danais animos uirisque secundas

sufficit, ipse deos in Dardana suscitat arma.

eripe, nate, fugam finemque impone labori;

nusquam abero et tutum patrio te limine sistam.'(2,610-620)

넵툰이 커다란 삼지창으로 내리찍어...

여기 누구보다 끔찍한 유노가 스카야 성문을

먼저 차지하려고,...

보라, 팔라스 아테네가 벌써 보루의 꼭대기를

구름으로 장악했다...

아버지는 다나웃의 용기와 기운을 넘치도록

북돋으며, 친히 달다냐군에 신들을 맞세운다.

도망쳐라 나의 아들아, 노역을 그만 접어라

곁을 떠나지 않고 무사히 널 집에 데려가련다 

 

Heu nihil inuitis fas quemquam fidere diuis!

ecce trahebatur passis Priameia uirgo

crinibus a templo Cassandra adytisque Mineruae

ad caelum tendens ardentia lumina frustra, 405

lumina, nam teneras arcebant uincula palmas.(2,402-406)

남의 신을 억지로 모시는 건 언제나 불경한 일.

프리암의 딸 카산드라가 머리채를 잡힌 채

미넬바를 모시는 신전 성소에서 끌려나가고

애타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만 헛된 일.

결박된 고운 손을 들 수 없어 두 눈을 들었으나 

  

두 백성과 집안들은 오로지 평화와 화친을 도모하려는 마당에서도 여신 유노의 불길한 저주가 떨어지면서, 신성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사악이 날뛰고 불화와 전쟁이 닥칠 조짐이 보인다. 제신이(ira deum, invidia deum) 적어도 운명의 도래와 실현을 지체시키려 백방으로 손을 쓴다.


"허나 나도야 이 대사를 끌고 지체시킬 수야 있겠지.

적어도 두 임금의 백성들이야 내 몰살시킬 수가 있겠지.

사위든 장인이든 부하들의 [피를] 예단으로 삼아 맺어지라지.

처녀야, 너는 트로이아 피와 루뚤리아 피를 지참금 삼을 테고

벨로나가 네 겨시를 서리라." (7,315-319)

 

interea ad templum non aequae Palladis ibant

crinibus Iliades passis peplumque ferebant (1,479-480)

한편에서는 공평치 못한 팔라스의 신전을 향해

산발한 일리온 여인들이 옷을 제단에 바치고

탄원하며 슬퍼하며 손으로 가슴을 내리친다 

 


이때 퀴레네는 새로운 책략, 새로운 계획을

가슴에 품으니...

광염이 여왕에게 사무치게 만들라 일렀다

여신은 말을 바꾸는 튀리아 종족이 무서웠고

모진 유노의 불씨가 살아, 밤이면 속 끓였다. (1,657,660-662)

 

네 동생 에네앗이 바닷가로 이리저리 밀려가

지독한 유노의 미움으로 떠돌고 있음을 네가

알 터인즉, 너 도한 종종 내 아픔을 함께하였다(1,667-669)

  

신들의 횡포 앞에 무너져 가는 인간의 비극은 라오콘의 경고(2,40-56)구 좌절되고(201-233) 팔라스 여신의 악행이 노골적으로 발휘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at gemini lapsu delubra ad summa dracones 225

effugiunt saeuaeque petunt Tritonidis arcem,

sub pedibusque deae clipeique sub orbe teguntur.(2,225-227)

한편 쌍둥이 뱀은 제단 꼭대기로 미끄러지듯

도망쳐 잔혹한 팔라스의 성채로 올라가더니

여신상의 발아래로, 방패 아래로 몸을 숨겼다 

  

2. 신들의 횡포에 대한 제우스의 결정


(1) '운명이 길을 찾아내리라' fata uiam inuenient


선과 운명을 대표하고 해석하는 유피터는 지상의 전투가 신의 뜻에 어긋남을 지적한다(10.5-9) 그 고통은 대신의 뜻이 아니고 하급신들의 선동이라는 유피터의 입을 발려 시인의 항의가 나온다.


caelicolae magni, quianam sententia uobis

uersa retro tantumque animis certatis iniquis?

abnueram bello Italiam concurrere Teucris.

quae contra uetitum discordia? quis metus aut hos

aut hos arma sequi ferrumque lacessere suasit? (10.5-9)

"천계의 위대한 주민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의 뜻을 돌이켜 

불손한 마음으로 서로들 그리 쟁론하는가?

내 이딸리아가 떼우끄리아인들과 겨루는 것을 일찌기 금하였도다.

무슨 불화가 있어 나의 금령을 거스리며,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들 무기를 찾아 싸움을

일으키게 선동하는가?

싸움을 할 정당한 때가 오리니 부디 이를 앞당기지 말지어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역사에 대해 신들과 운명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유피터의 다음과 같은 유권해석이 있다(10.107-113).


quae cuique est fortuna hodie, quam quisque secat spem,

Tros Rutulusne fuat, nullo discrimine habebo,

seu fatis Italum castra obsidione tenentur

siue errore malo Troiae monitisque sinistris. 110

nec Rutulos soluo. sua cuique exorsa laborem

fortunamque ferent. rex Iuppiter omnibus idem.

fata uiam inuenient.' (10.107-113).

"각자가 오늘 맞고 있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각자가 품는 희망이 무엇이든 

또 그가 트로이아사람이든 루뚤루스이든 나는 전혀 차별하지 않겠노라

진지가 이딸리아인들의 포위에 에워싸이는데 그것이 운명으로 되든

트로이아인들의 불길한 잘못이나 사악한 징조에 의해서 되든(상관 않겠노라

그렇다고 루뚤루스들을 보아줌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업과가 각자에게 수고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니라

임금 유피터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니라. 운명이 길을 찾아내리라.'“(10.107-113).



두 백성과 집안들은 오로지 평화와 화친을 도모하려는 마당에 여신 유노의 불길한 저주가 떨어지면서, 신성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사악이 날뛰고 불화와 전쟁이 닥칠 조짐이 보인다. 제신이(ira deum, invidia deum) 적어도 운명의 도래를 지체시킬 수는 있었다.

"허나 나도야 이 대사를 끌고 지체시킬 수야 있겠지. 적어도 두 임금의 백성들이야 내 몰살시킬 수가 있겠지. 사위든 장인이든 부하들의 [피를] 예단으로 삼아 맺어지라지. 처녀야, 너는 트로이아 피와 루뚤리아 피를 지참금 삼을 테고 벨로나가 네 겨시를 서리라." (7,315-319)

 

(2) 고()의 의미 (catabasis)


요컨대 베르길리우스가 하는 설명대로는, 인간의 고통과 역경은 그 사명의 수행과 섭리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말을 달리 하자면 고통은 학교요 인간의 완전함을 달련시키는 수련장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차원에서는 악이라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극복된다. 인간 양심을 좌우하는 것이 이 인륜 도덕이며, 그 양심 속에는 종국적인 최고의 정의가 존재하리라는 희망이 깃들어 있을 것이니, 영웅서사시는 그 한 편 한 편이 바로 이 궁극적인 선의 승리를 위하여 나약한 사나이 vir 하나가 인간다운 용기 virtus를 품고서 한 걸음씩 옮겨 놓는 고뇌와 수고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 자신은 거의 초연한 자세로 임하고 있지만 그를 창조하고 기술하는 시인은 에피쿠루스적인 감수성과 훈계로 영웅을 연민과 사랑의 시선으로, 그의 수난을 함께 짊어지는 연대의식에서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다.

 

3. 인간들의 체념과 fata에의 순종


신들의 세계에서도 이치가 그렇다면 사멸하는 인간들이 추종해야 할 최고의 법적 권위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주인공 아이네아스가 한때 의기소침하여 망설일 때에 연로한 신하가 격려하는 말마디가 있다(5.709-710).

 

여신의 아들이여, 우리야 운명이 어디로 끌고 되끌어가든 따르기로 합시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갖 숙명을 견뎌내어 이기는 수밖에 없으리다.

nate dea, quo fata trahunt retrahuntque sequamur;

quidqud erit, superanda omnis fortuna ferendo est! (5.709-710).

 

아이네아스와 그 일행은 자기들이 남의 땅 라티움에 상륙한 명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nos fata deum vestras exquirere terras

imperiis egere suis. (7.239-240).

신들의 운명이 그 명령으로 우리를 떠밀어 그대들의 땅을

찾아오게 했소이다.

 

sua cuique exorsa laborem

fortunamque ferent. rex Iuppiter omnibus idem.

fata viam invenient. (10.111-113).

각자의 창의(創意)가 각자에게 수고와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임금 유피터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니라.

그러니 운명이 길을 열어주리라.


parce metu, Cytherea, manent immota tuorum

fata tibi;  (1,257-258)

걱정 마라. 퀴테레, 네 자손의 운명은 여전히

그대로니... 

 

hic tibi (fabor enim, quando haec te cura remordet,

longius et uoluens fatorum arcana mouebo)

bellum ingens geret Italia populosque ferocis

contundet moresque uiris et moenia ponet, (1.262-264)

운명의 서책을 펼쳐 더 멀리까지 열어 보겠다-

이탈랴에서 큰 전쟁을 치르고 거친 족속들을

제압하고 백성에게 도리와 도시를 세우리라

 

Romulus excipiet gentem et Mauortia condet

moenia Romanosque suo de nomine dicet.

his ego nec metas rerum nec tempora pono:

imperium sine fine dedi. quin aspera Iuno, (1,277-279)

이들을 불러 로마인이라 제 이름을 붙이리라.

이들에게 나는 영토와 세월의 끝을 두지 않고

무궁 광활한 제국을 허락했노라  

 

운명을 따르기로 한 안키세스의 결심


'iam iam nulla mora est; sequor et qua ducitis adsum,

di patrii; seruate domum, seruate nepotem.

uestrum hoc augurium, uestroque in numine Troia est.

cedo equidem nec, nate, tibi comes ire recuso.'(2,701-704)

더는 지체치 않고 이끄시는 대로 따르겠나이다

조국의 신들이여, 가문과 자손을 보호하소서.

당신들의 징조, 트로야는 그 뜻에 달렸나이다.

가련다. 아들아! 함께 길 떠나 길 마다치 않겠다 

 

크류사의 유언


'quid tantum insano iuuat indulgere dolori,

o dulcis coniunx? non haec sine numine diuum

eueniunt; nec te comitem hinc portare Creusam

fas, aut ille sinit superi regnator Olympi.

longa tibi exsilia et uastum maris aequor arandum, 780

et terram Hesperiam uenies, ubi Lydius arua

inter opima uirum leni fluit agmine Thybris.

illic res laetae regnumque et regia coniunx

parta tibi; lacrimas dilectae pelle Creusae.

non ego Myrmidonum sedes Dolopumue superbas 785

aspiciam aut Grais seruitum matribus ibo,

Dardanis et diuae Veneris nurus;

sed me magna deum genetrix his detinet oris.

iamque uale et nati serua communis amorem.'(2,777-789)

사랑하는 이여, 이는 오로지 신들의 뜻에 따라

벌어진 일이니. 예서 크류사를 데려가는 일은

불가하며, 지고한 올림폿의 왕도 불허할 일.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일구는 길고 긴 망명 길.

장차 저녘땅에 닿을 것이니, 거기 뤼디아의 강

튀브릿이 유유히 농부들의 옥토를 흐르지요.

게서 좋은 일이 생긴즉, 왕국과 왕녀를 아내로

얻겠죠. 크류사를 그리는 눈물일랑 거두세요.

저는 뮐미돈의 혹은 돌로펫의 오만한 궁전을

보거나 그래웃 여인을 시중들지도 않으리다.

달다냐의 여자, 베누스의 며느리.

저를 위대한 퀴벨레께서 이 땅에 묶으셨지요.

이제 떠나세요. 우리의 아들을 사랑해 주세요

 

세 번이나 나는 아내를 안으려고 시도하였고

세 번이나 안긴 환영은 헛된 손을 빠나갔다.

가벼운 바람처럼, 덧없이 날아가버린 꿈처럼. (2,792-794)

 

4. 인간의 자유와 책임

 

물론 여기서는 신들이 정한 운명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언급된다.

유피터신은 더할나위없이 공정한 입장을 내세우면서 운명과 신들의 개입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묘하게 공존하는듯한 선언을 내어놓는다(10.111-113).


sua cuique exorsa laborem

fortunamque ferent. rex Iuppiter omnibus idem.

fata viam invenient. (10.111-113).

각자의 창의(創意)가 각자에게 수고와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임금 유피터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니라.

그러니 운명이 길을 열어주리라.


베르길리우스는 영웅이 명계에 갔을 때에 그의 부친 앙키세스의 입을 빌려 이 신비를 다음 한 마디로 피력한다(6.743).



quisque suos patimur manis (6.743).

인생은 누구나 자기 분수를 겪어가게 마련이라.


아이네아스가 명계를 찾아갔을 때에 인간 비운과 신적 불의의 표본적인 피해자 플레기아스를 만난다. 그는 일찌기 군신 마르스의 아들로 태어난 영웅으로 아폴로신이 자기의 딸 코르니데를 사랑하여 임신시킨 뒤에 변심하고는 죽여버리자 딸을 위한 복수로 델피의 아폴로 신전을 불질렀다가 아폴로의 화살에 맞아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는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영겁에 이르도록 고통받는 처지가 된다. 프로메테우스같은 항거와 발악을 기대하는 독자들이지만 플레기아스가 내놓는 발언은 너무도 의외롭다. 사멸할 인간들 사이에서 통하는 인정법이나 도덕에 비추어보면 자기는 오로지 피해를 당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플레기아스는, 자기한테 그토록 불의를 행하였지만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앞에서는 역부족임을 인정하라고((델피의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GNOTHI SAUTON의 본뜻이 그러했으리라), 인간은 아무리 저항하고 발악하더라도 결국 운명의 힘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굴종의 자세를 보여준다(6.20)


discite iustitiam moniti et non temnere divos (6.20)

그대들 나를 본보기로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것이며

신들을 경멸하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은 누구나 역사의 부조리한 흐름 속에서 희생되어 감은 어쩔 수 없다. 주역을 하는 아이네아스도 유유부단한 성품으로 인하여 번번히 (신성의 개입과 협박과 격려를 통해서) 결단(決斷)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을 당하지만, 배역을 이루는 영웅들도, 그리고 별반 눈에 띄지 않는 역사의 엑스트라들도, 심지어는 여인들까지도 같은 길로 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시의 구성이다. 여인들마저도 뚜르누스의 동맹군으로 온 여걸 까밀라의 용맹과 전투, 트로이아의 화염 속으로 사라진 크레우사 같은 자기헌신, 흡사 메데아를 연상시키는 여왕 디도는 아이네아스를 향하는 애정과 더불어, 자기의 순수한 애정을 신들이 이용하였다는 데에 분개하고서 신들이 정한 운명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고함과, 홀홀이 떠나버린 아이네아스에 대한 복수심에 찬 분노로 인하여 자결하고 만다. 그리고 두 진영에 남편과 아들들을 출정시키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의 운명을 통곡하며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여인들의 군상을 본다.

 

인생고를 해설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설교는 머나먼 항해의 모험을 앞둔 아이네아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토로된다(1.198-209):


'O socii (neque enim ignari sumus ante malorum),

o passi grauiora, dabit deus his quoque finem.

uos et Scyllaeam rabiem penitusque sonantis 200

accestis scopulos, uos et Cyclopia saxa

experti: reuocate animos maestumque timorem

mittite; forsan et haec olim meminisse iuuabit.

per uarios casus, per tot discrimina rerum

tendimus in Latium, sedes ubi fata quietas 205

ostendunt; illic fas regna resurgere Troiae.

durate, et uosmet rebus seruate secundis.'

Talia uoce refert curisque ingentibus aeger

spem uultu simulat, premit altum corde dolorem.(1.198-209):

"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나간 고난을 모르는 바 아니다.

갈수록 힘겨운 걸음이나 이것도 신은 언젠가 끝을 보게 해 주리라.

어느 날인가는 이 일도 오히려 달콤한 추억이 되리라.

하여튼 우리는 라띠움, 운명이 우리에게 편한한 처소를 보여주는

그곳으로 간다. 거기 트로이아 왕국이 다시 서기로 되어 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순경이 닥치는 동안 자신을 가다듬으라!"

이렇게 말하면서 크나큰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얼굴에는 억지로 

희망의 빛을 띠우고 깊은 슬픔일랑 가슴에 묻었다. 

 

갈수록 힘겨운 걸음 passi graviora이지만 그 모든 것을 신은 언젠가 끝을 보게 해 줄 것이고, 운명이 지워준 그 방랑을 끝내고 나면 오히려 지나간 그 모든 세월을 달콤한 웃음 속에 회고하기까지에 이르리라는 것이다.이것은 예언에 가까운 종교적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훗날 라띠움에서 영웅 스스로 적장 메젠띠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영웅이 자기 아들 아스까니우스 Ascanius에게 유언삼아 들려주는 말은 좌우명도 같은 초연함을 보여준다(12.435-436):


"아이야, 용맹은 내게서 배우고 참 수고가 무엇인지는 나한테서 배워라.

그러나 행운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려므나."

disce, puer, virtutem ex me verumque laborem

fortunam ex aliis. (12.435-436)

 

인간은 누구나 자기 숙명이 있어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서 그 숙명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 숙명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용하는 용어로는 일종의 예정설(豫定說)이 되는데, 그렇게 예정된 법칙에 인간의 참여가 있음으로 해서 운명은 자유의 법이 되는 것이다. 하데스에서 앙키세스가 들려주는 신비스러운 한 마디가 이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quisque suos patimur manis (6.743)

"인생은 누구나 자기 응보를 겪어가게 마련이다.“

 

일찌기 해안에 난파하여 목숨을 부지한 아이네아스의 무리에게 비극의 영왕 디도가 하는 말, "내 일찌기 불행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가엾은 이들을 돕는 법은 배웠소이다" (non ignara malimiseris succurrere disco 1.630)는 그 말은, 만또바에서 조상 대대로 부쳐오던 토지를 옥따비아누스의 베떼랑에게 몰수당하고서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며 살아온 베르길리우스의 심경, 불행을 당한 사람 모두에게 향하는 그의 연민을 토로하는 말이자 이 서사시 전편에서 보이는 시인의 애잔한 시선이기도 하다.


"눈물겨운 사건들이며 사멸할 인생들의 비운은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니..."

sunt lacrimae rerum et mentem mortalia tangunt (1.462).


이 마지막 구절에는 그래도 인간들의 한 가닥 연민과 동정심을 믿어 보는 시인의 희망이 서려 있다.

 

지고한 운명 앞에서 사멸할 인간들이 무력함을 절감하고 <아이네이스>의 독자들이 시인의 숙명론(결정론) 앞에서 불안에 허덕일 때에 시인은 눈물어린 따스한 시선으로 그 약자들의 슬픔과 불안, 공포와 죽음을 지켜 봄으로써 말없는 보상을 하고 있다.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하찮은 전사들의 최후를 묘사하는 장면 하나만 들겠다. 일찌기 헤라클레스의 모험에 동반했다는 안토르 Antor, 이 전설의 용사는 에반드루스에게 식객이 되어서 이딸리아에 자리잡아 살고 있었다. 그도 아이네아스를 도우러 에반드루스의 군대와 함께 싸움터에 나왔다가 적장 메젠띠우스가 아이네아스에게 던진 창에 맞아 이역땅에 쓰러진다.


Herculis Antoren comitem, qui missus ab Argis

haeserat Euandro atque Itala consederat urbe. 780

sternitur infelix alieno uulnere, caelumque

aspicit et dulcis moriens reminiscitur Argos. (10.779-782)

"아르고스에서 파견 나온 안토르, 에반드로스에게 얹혀서 

이딸리아 도성에 자리잡았던 그는 불운하게도 

남이 입었어야 할 상처로 쓰러져 하늘을 우러르면서 

사랑하는 땅 아르고스를 회상하면서 숨져간다." (10.779-782)

  

거대하고 저항할 길 없는 운명의 위력과 신들의 일방적인 개입 앞에서(12.895: di me terrent et Iuppiter hostis무력하게 쓰러져가는 영웅 투르누스의 최후 비명으로 붓을 던지는 소리에 우리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악과 불의에 던져오던 "?"라는 물음이 거대한 의문표로 눈앞에 확대되는 여운에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12.952).


vitaque cum gemitu fugit indignata sub umbras (12.952).

투르누스의 넋은 한맺힌 절규를 내며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명계 그것도 Elusium 아니고 Lugentes campi ‘통곡하는 들에서 만난 Dido

에네앗의 간곡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illa solo fixos oculos auersa tenebat

nec magis incepto uultum sermone mouetur 470

quam si dura silex aut stet Marpesia cautes.

tandem corripuit sese atque inimica refugit

in nemus umbriferum, coniunx ubi pristinus illi

respondet curis aequatque Sychaeus amorem.

nec minus Aeneas casu percussus iniquo 475

prosequitur lacrimis longe et miseratur euntem.

 

 

3.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극 이해

고백록: 악의 헬라적 격정’(pathos)을 

              히브리적 공감’(sympatheia)으로 전환한 문학 작업

 

1981513일 바티칸 광장에서 울린 두 방의 총성! 그 총상으로 1년 넘게 사경을 헤매던 교황은 병상에서 어째서 세상에 악이 있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보다 대자연으로부터, 타인들에게서 오는 데도, 인간은 고()와 악()에 대한 물음을 세계를 향하여 묻지 않고, 왜 하늘을 향해, 하느님께 묻는가?”(요한 바오로 2, 구원에 이르는 고통9)라는 의문에 더 시달렸다. 인류역사에서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천착한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생을 두고 씨름하여 얻어낸 몇 가닥 해답은 이렇다. 그는 지적인 해명 못지않게 감성적 호소가 중요하다고 여겨 고백록형식의 저술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告白錄)을 왜 썼을까? 바울로 사도 이후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이 교부는 아프리카 히포의 주교가 된 후, 자기가 그리스도교로 회심한지 10여년이 지난 서기 397년경, 자기 과거를 밝혀 독자들이 "내 선업을 두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악업을 두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선업은 당신의 업적이자 당신의 선물이며, 나의 악업은 내 죄악이자 당신의 심판입니다.”(10.4.5)라는 심경을 밝힌다.

 

그리스 문학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고통과 행악을 가정해내면서, 행복 추구가 본능인 인간에게는 모순처럼 파악되는 ()의 실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고해(苦海)’에 던져진 인간이 고통을 당해서는 안될 무엇으로, 생자필멸의 이치를 알면서도 자기는 죽어서는 안될 존재로 의식하는 심리적 기제가 어디서 유래하는가? ‘를 인과응보로 체념하지 않으면서 ?’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것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신들에게 힐문을 제기한데서 비극이 발생한다. 악은 타인에게서 당하는데 왜 질문은 신들에게 하는가? 인간의 지성만으로서는 악 혹은 고의 문제가 해답을 얻지 못하고 그 의문 앞에 인간정신의 고뇌는 끊이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에서도 거기 저질러지고 묘사되는 모든 악행은 인간들이 자행하면서도 피해자들은, 심지어 가해자들마저, 신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비극작가들은 흔히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못 보는 신들의 질투’(phthonos theon, invidia deum)나 인간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지 못하고 과도한 징벌을 가하는 신들의 분노’(thymos theon, ira deum)에 손가락질함으로써 그 질투와 분노에 불의하게 희생당하는 존재들에 대한 동정(sympatheia)이 더욱 격앙된다.

라티움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심각한 철학적 사색은 이해도 못했고, 그들의 비극적 파토스도 공감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고유의 신랄한 해학(acetum italum)으로 다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Vergilius, Seneca, Ovidius에게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비극적 소감이 심화되기도 한다.


악을 죄와 결부시키는 히브리문화와 접촉한 다음에야 비로소 인류는 인간이 개인적이나 집단적으로 저지르는 악의 가공스러움과 비극성을 바닥까지 들여다 볼 안목과 그 심연을 직시할 용기가 생긴다. 악과 고통의 대양에서 그 심해에까지 잠수해 보는 사유적 경험이 가능해진다.(고전시대 후로도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 셰익스피어의 비극들,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로 그 질문과 사색은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첫머리에서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1,1,1)라고 실토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은 신을 외연 둘러 포괄할 만큼(모든 인식은 포괄이요 파악이다, 우주, 무한자, 영생, 무한한 행복의 추구: homo capax dei) 위대한 심연이므로, 고통과 죄악이라는 이 심연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책에서 우리 주제에 관해 세 가지 고찰을 연역해낼 수 있다.

 

1. 첫째: ‘()’()’을 구분하는 일


현대 서구문화의 두 주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합류지점이 서기 5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에 이르러 악을 규탄하는 인간의 비극은 (히브리 사상 덕분에) 인간의 책무를 부각시키면서도 신적 자비와 은총에서 해답을 모색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와 거의 동치되는 ’(malum)을 생노병사의 형태로 겪는 ()’ 물리악’(그는 poena peccati: 죄벌(罪罰)이라고 부른다)과 인간이 의도적으로 감행하는 ()’윤리악(그는 peccatum 죄악(罪惡)이라고 부른다)으로 구분한다. 정말 악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이고, 생노병사와 자연재해를 응보로 받는 죗값으로 절감하는 것은 인간의 죄의식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통칭하는 헬레니즘에서는 악은 고통과 동일시되고 nemo gnoscens peccat 라는 명제처럼 죄악은 무지에서 오는 실수나 어쩌다 저지르는 동티로 인식되었고, 정화(淨化) 개념은 있었지만 존재론적 의미의 죄책(罪責)이나 사죄(赦罪) 개념은 미약했던 듯하다. 그와 달리 히브리인들에게서 사유의 초점은 ()’에서 ()’으로 옮겨진다. () 개념 없이는 악의 문제와 그 원천적 신비가 해명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의 인류사에 끼친 공헌을 안식일죄의식이라고 꼽는다면, 구약은 그 첫권(창세기)부터 인류의 범죄가 고통의 시원이라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렇게 물리악()과 윤리악()를 구분하고, 물리악의 죄벌(罪罰)로 윤리악은 죄악(罪惡)으로 명명하고, 자유의지에서 죄악의 발원을 끌어냄으로써 선악이원론과 신에 대한 질책(에피쿠로스 딜레마)을 극복하였다(마니교 논쟁). 따라서 의지의 구사로 악의 극복 역시 가능해지는데 역사적 경험(구세사(救世史)로서의 역사)으로는 인간과 신의 합작 또는 육화한 신인의 중재로만 구원의 희망이 보인다는 주장이다(펠라기우스 논쟁).

 

2. 둘째: 배나무에서 무화과나무까지 (인간의 초인(超人)의식)


악은 인간에서 유래하였다, 그것도 개인적 집단적 의지에서!” 이 해답이 우리 귀에 아무리 억울하게 들리더라도 한 가지는 가능해졌다, 적어도 인류의 개인적 집단적 노력으로 악을 청산하는 일이! 선과 더불어 악이 우주를 지배하는 원초적인 원리라면 사멸할 인간이 무슨 수로 악을 이긴다는 말인가?


이원론이나 숙명론에서 해답을 찾지 않고 악의 기원이 피조물(천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다고 규명함으로써, 인간은 신들의 분노나 질투라는 횡포에서 유래하는, 비극의 객체에서 주체이자 비극의 해결자(結者解之)로 위치를 바꾼다.


, 넘어지기야 제멋대로지만 무르팍이 깨지고 갈비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으면 자기 힘만으로 못 일어난다. 넘어진 자는 구세주라는 제3자를 덕 봐야 한다. 그의 생애 후반의 신학성찰인 은총론이다. 그럴 경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색은 선한 신의 피조물인 선한 인간이 신의선한 선물인 자유의지를 어떻게 악용할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 Ovidius의 탄식대로 video meliora proboque et deteriora sequor(Ovidius, Metamorphoses 6,20-21)라는 명제를 해명하는데 몰두한다. 인류 사상사에서 아폴로신전의 gnothi seauton!이 소크라테스의 gnothi seaton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해당한다.

 

유다인들이 인류사회에 끼친 사상적 공헌이 ()에 대한 의식이었다면 철학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은 ()의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평생을 두고 악의 문제를 천착한 계기가 열여섯 살에 저지른 배서리였다면 믿어질까?(2,4,9) 유희에 빠져 진지함의 절도를 넘어서서 갖가지 감정의 허랑방탕함 속으로 고삐가 풀린(2,3,8) 타가스테 일진들이 밤이 이슥해 이웃집 배나무를 싹 털었다. 그러고서 그걸 자루에 담아다 돼지들에게 던져주었다!(2,4,9) 맛있게 먹자는 쾌락도 팔아서 돈을 벌자는 이익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저지를 악이 있다니! ‘악을 악으로 즐길 수 있다는 신기함이 그의 사색을 온통 사로잡는다(2,4,9~10,18). , 나의 도둑질, 내 나이 열여섯 살에 밤중에 저지른 나의 저 죄악이여, 가련한 내가 너 안에서 사랑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2,6,12)


불혹의 나이가 되어 그 시절의 치기어린 장난을 회상하던 그에게 인간의 심각하게 비뚤어진 심연이 들여다보였다. “그 과일은 아름다웠습니다만 가엾게도 제 영혼은 열매 자체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더 좋은 과일이 얼마든지 있었고 훔친 것들은 그냥 버렸습니다. 그저 도둑질을 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과일을 서리해서 그냥 버렸으니 제가 배불리 맛본 것은 오로지 악의(惡意) 뿐이었고, 그 악의로 하는 도둑질이 재미있었습니다. 하느님, 지금 저는 도둑질에서 저를 재미있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실상 아무 멋도 없습니다.”(2,6,12) 저 순간 그 마음이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그저 악인이 되고 싶었고 제 악의의 원인은 악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악의가 추잡했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자멸하기가 좋았고, 파렴치하게 무엇을 탐한 것이 아니라 파렴치 자체를 탐하는 영혼이었습니다.”(2,4,9)


그의 고찰은 여기서 악의 신비로 넘어간다. 해서는 안 될 짓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니, 그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니, 과연 그럴 수가 있습니까?” (2,6,14) 인간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의 자유의지는 최고선에 동의하는 자유뿐임에도 그에 역행할 적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곧 선이다!”라는 초인(超人) 사상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본질은 오만인데, 문제는, 교만조차도 지고함을 본뜨는 무엇, 당신 홀로 만유 위에 지존하신 하느님을 본뜨려는 무엇(2,6,13)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다만 그 모방은 하찮은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의 전능을 흉내 내는 음울한 모방, 비뚤어진 모방일 수밖에! 그러니까 당신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은 모조리 당신을 본뜨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저 도둑질에서 제가 좋아한 것은 무엇이며, 비록 못되게 또 비뚜로 본떴다고 할지라도 저의 주님을 어떤 방식으로 본떴다는 말입니까? 제가 능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으니까 속임수로라도 당신의 법에 대항해서 그 짓을 저지르고 싶었던 것입니까? 아둔하게 전능을 모방하고서는, 안 될 짓을 하고서도 벌을 받지 않으니까, 포로가 되어서도 기형이나마 자유를 모방했다는 말입니까?”(2,6,14) 일찍이 낙원에서 인간을 유혹하던 악마의 음성,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창세 3,5)는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악의 세력을 쳐부수는 대천사의 이름이 미카엘(Mi-ka’-el: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교부의 눈에 바로 그 모방에 구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본뜨고 있을지라도 그자들은 당신을 떠나서 갈 곳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2,6,14) 선행은 물론 저 모든 악행에서도 인간이 무의식으로 추구하는 바는 하느님이라는 절대선, 절대지평이었다! 죄악마저도 무구함을 동경하고 하느님 안에 안식을 찾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다. “누가 있어 이처럼 비비꼬이고 얼키설키한 실타래를 풀어내겠습니까? 더럽습니다. 거들떠보기도 싫고 들여다보기도 싫습니다. 당신을 원합니다, 선량한 눈에 아름답고도 멋진 무구함이시여, 만족할 줄 모르는 만족감으로 당신을 원합니다.”(2,10,18)

 

인간이 왜 악을 저지르는가 하는 범죄의 심리를 최초로 천착한 사상가가 어려서 배서리를 해본 심보(2)로 미루어, 교부가 어림잡은 풀이는 이렇다. 선과 악은 하느님이 정하시고 피조물은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며 성삼위께서 머리를 짜서 지어내신 종족이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을 본뜨는(2,6,14) 짓이 참 대견키만 하셨으리라. 달려가거라, 얼마든지! 내가 안고 데려오리라!”(6,16,26) 하시던 하느님의 자신감! 인간에게 그 위험한 자유의지를 주시고 세상에 악이 창궐하게 허락하신 모험심!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4)는 말씀대로, 개인이든 전 인류든 구원의 역사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되만드시는 당신의 손길(5,7,13) 생산자 책임을 절감하시는 창조주의 리콜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은총의 박사다운 결론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심취하여 속세문학에 몰두하던 소년시절은 훗날 많은 것을 회상케 한다. 자신을 가엾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네아스를 사랑하다 죽어간 디도의 죽음을 통곡하면서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지 않다가 죽어가는 자기의 죽음은 통곡할 줄 모르는 인간보다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3,21) 인간 속습의 강물이라 부르는 속세 문학과 예술이 유피터를 비롯한 제신들의 외설스러운 야담을 미화시키노라면 얼마나 훌륭한 신인가! 하늘 신전들을 지고한 천둥으로 뒤흔드는 분이야. 그러니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그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래 난 했지. 그것도 기꺼이!(16.26)라는 탕아들의 핑계로 실행된다.

청년시절의 방탕으로 미루어 욕정에 찬 상태에 있음으로써 당신 얼굴에서 멀어지는 것(18.28)이고 하느님은 비록 숨어계시고 드높이 침묵 중에 계시지만 불법한 욕정 위에다 맹목을 징벌로 뿌리시므로(18.29) 도덕적 질서를 어긴 모든 영혼은 본인에게 자기 벌이 된다(12.19)는 조숙한 실존적 고백을 낳는다. 이렇게 악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파괴한다’(nocet facienti quam patienti malum)는 명제는 고백록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3. 셋째: ‘하늘 사냥개와 맞닥뜨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깊은 자국을 준 것은 우정이었다. 여자에게서든 남자에게서든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제일가는 행복으로 여기던 아우구스티누스 곁에는 늘 친구들이 있었다. 육체적 쾌락이 제아무리 넘치더라도 친구들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던 기분... 친구들만은 무작정 사랑했고 아울러 그들에게서 제가 무작정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6,16,26)는 고백처럼, 그가 주고받은 서신 중 300편 넘게 지금까지 간수될 정도다. “우정에는 이성으로도 확실하게 밝힐 수 없는 신비로운 무엇이 있었다.”(믿음의 유익 10) 그래도 일평생 속을 터놓고 지낸 고향친구 알리피우스가 가장 가까운 인물로 꼽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카르타고에서 여자와 동거하면서 훈장 노릇을 할 적에 그의 강의를 한번 들어보고서는 당장 그의 문하생이 된다, 자기 부친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리피우스를 황당한 점성술로 꾀고 마니교에 끌어들인 것도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여자에게 도통 흥미가 없으면서도 여자 없인 못 살겠다던 아우구스티누스 말에 친구의 의리 땜에 호기심 삼아 오입도 해보고 결혼이라는 걸 해볼까도 했다.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에서 다시 만난 알리피우스에게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자네처럼 지각 있는 사람이 내가 꾄다고 해서 왜 마니교에 빠져들었나?” “자네가 내 인생의 길잡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딴 사람을 못 만나리라는 예감도 들었어. 마니교는 늘 나를 찜찜하게 만들어. 내가 마니교도가 된 것은 자네를 믿기 때문이야. 자네가 설혹 길을 잘못 들어도 자네 뒤를 따라가노라면 기어이 나를 진리에다 데려다 주리라 확신한다구, 자넨 그토록 진리를 갈구하고 있으니까.이러한 무한신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로 가자 로마의 관직을 사임하고 따라나섰고, 카시키아쿰의 은둔, 387년 부활절의 세례, 심지어 아프리카 귀향과 타가스테 수도원생활도 함께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시기에 사제가 되고 둘의 고향 타가스테의 주교가 된다. 그와의 우정은 고백록

(6,7,11-16,26)에 길게 묘사되어 있다.


스물한 살에 잠시 고향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해에 또 다른 우정을 맛보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또래인데다 청춘의 꽃으로 함께 피어오르던벗을 만났다. “제 일생의 모든 환락 가운데서 가장 달콤한 우정(4,4,7)이라고 회고한다. 로마인들은 친구를 자기 영혼의 반쪽이라고 했. 그러던 우정이 겨우 한 해를 다 못 채웠는데 하느님이 이승에서 거두어가버렸다! 고백록4권 전반부는 사랑하는 벗과 사별한 아픔을 하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고전문학에서 빼어난 우정론으로 꼽힌다. (고백록 4,4,7-8,13).


그때 제 마음은 크나큰 고통으로 암울했으며 어디를 둘러보아도 죽음뿐이었습니다. 고향은 그야말로 형극이요 아버지의 집은 기괴한 불행이었으며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이 그가 사라짐으로 해서 거대한 고문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를 간직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미워졌습니다.”(4,4,9) 벗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평안도 없고 분별도 없이, 갈기갈기 찢기고 선혈을 흘리는 영혼을 끌고 다녔으며, 영혼 둘 곳을 찾아내지 못하던”(4,7,12) 나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자기가 자기에게 커다란 수수께끼”(4,4,9)가 되고 만다.


하느님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안달을 하는”(1,1,1)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할 줄 모르는 광기, 인간사에 절도 없이 안달하는 어리석음”(4,7,12)을 문득 체득한다. 인간에게 지상사물은 사용하는’(uti) 대상이고 하느님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향유할’(frui) 대상이기에 무릇 사멸하는 사물들에 대한 우애에 사로잡힌 마음은 모두 불행하고, 사랑하던 것을 잃고 나면 비참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도 이미 그것으로 비참한 법”(4,6,11)임을 감 잡는다.


이치는 분명했다.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저 모든 것으로 저의 영혼이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되, 사랑으로 그것들에게 끈끈하게 들러붙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은 가던 곳을 향해서 가게 마련이고 가던 곳이란 비존재를 향해서입니다. 영혼은 그런 사물 안에 존재하고 싶어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물들 안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들에는 안주할 만한 어디라고 할 것이 없으니 머물러 서지 않는데도 말입니다.”(4,10,15)


이처럼 인간은 절대지평(絶對地平)을 눈앞에 두고 부단히 그 지평선으로 걸어나가야 하는 운명인지, 친구 잃은 참담한 슬픔과 비통에서 섬뜩함을 느끼그 그 정체를, 당신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들의 등 뒤를 바싹 쫓으시는 복수의 하느님의 묘한 솜씨”(4,4,8)라 불렀다! 그분 말씀이 폐부에 박혀 있어서 어디로나 그분께 포위되어 있다는 실감(8,1,1), 현대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이 묘사한 하늘 사냥개의 콧김을 목덜미에 느끼고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는 항복!

 

온갖 과일나무가 밀림을 이루는 낙원에서 하느님이 딱 한 그루만 따먹지 말라는 금령은 왜 내리셨을까, 따먹지 말라 말리실수록 걸음마를 할 줄 아는 이상 무등을 타고서라도 기어이 그 나무를 서리해 먹고서 모조리 울타리 밖으로 내뺄 게 뻔한데, 자유의지라는 것은 뭣 때문에 갖추어주었을까?


우스개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천상에 자문회의가 열렸단다. 진흙으로 손수 빚으신 사람에게 콧김을 불어넣으시면서 신령들에게 있는 자유의지를 나눠줄 것인가 물으시자 천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더란다. “그놈들은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써먹을 것입니다.”(괴테, 파우스트, 서곡) 천사들의 극구만류에도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은 자신만만하셨는지 아우구스티노에게도,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오리라. 내가 데려오리라. 거기서 내가 안고 오리라!(고백록 6.16.26) 하시더란다. 그래선지 그가 하느님께 드리는 말투는 좀 외람되게까지 들린다. 도망쳤습니다. 지켜보시는 당신을 안 보겠다고 도망쳤고, 스스로 눈멀어 당신께 거역하겠다고 도망쳤습니다.... 악인들이 불안하면 떠나가고 당신께로부터 도망치게 놓아두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피해 달아났을 적에 과연 어디로 달아났습니까?”(5,2,2)

 

4. 끝으로: 하느님의 승부욕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 직전 불만스럽고 죄스러운 처지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면서도 한사코 미적거리던 심경(고백록 8)현실인간으로서 하고 싶다할 수 있다’(velle et posse)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실감케 하고, 인간이라는 심연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율법과 하느님의 율법의 투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미세레레 시편으로 읽혀오고 있다. 입으로는 주님, 어서 하십시오! 몰아세우십시오! 불러주십시오! 타오르게 만드시고 끌어당겨 주십시오! 달구어 주시고 애무해 주십시오!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치닫게 해 주십시오!”(8.4.9)라고 호소하면서 내심의 기도는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8.7.17)였다. 주님께서 기도를 당장 들어주실까 두려웠단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잠꼬대처럼 느릿한 말로 금방’, ‘, 금방’, ‘조금만 놔두십시오.’였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금방 또 금방은 아예 대중이 없었고 조금만 놔두십시오.’는 오래도 갔습니다.’”(8,5,12)


고백록8권에 이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에서 얻어낸, 악에 관한 네 번째 답이 나온다. 명예욕과 성욕을 떨쳐내고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만드신 어떤 손길, 천둥벌거숭이 인간들에게 자비를 한없이 투자하시다 외아들마저 서슴없이 담보로 내놓으시는 하느님의 승부욕을 간파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기에, 절망한 영혼의 구원을 두고, 보다 큰 위험에서 구출된 영혼의 구원을 두고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까?”(8,3,6) “적이 어떤 사람을 보다 철저히 장악하고 있고 그 어떤 사람을 내세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는 터에 그 어떤 사람이 패하고 만다면 적의 패배가 그만큼 큰 법인가요?”(8,4,9) 이런 힐문에는 신자들 체포영장을 들고 다마스커스로 달려가던 사울을 걷어찬 발길이 머지않아 자기한테 떨어지리라는 예감을 담고 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그런 심경을 짐작했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에제 36,22)


하느님 이런 승부욕을 믿고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이던 자세는 "악이 충만한 곳에 은총이 충만하다"는 치기 어린 신뢰였으며, "아무려면 어때? 모든 게 은총인 걸?"(Qu'est-ce que cela fait ? Tout est grâce.: George Bernanos)이라는 독백이었다. 

 

애초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조물이기에 감히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몸부림마저 대견해하시는 창조주! 그래서 타가스테 포도밭 옆집의 배나무에서 시작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방황은(악의 문제를 두고 속고 속이는 마니교에 떨어져 8년의 긴 세월을 외돌기는 했지만) 밀라노 정원의 무화과나무밑에서 집어라! 읽어라!”는 동요로 끝을 본다. 낙원의 선과 악을 아는나무 밑에서 출발한 인류의 구세사가 골고타의 십자나무밑에서 대단원을 보듯이!

 

문제는 전능한 분의 승부욕이 보여주는 결말이 그리스도인들의 파토스를 더욱 격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승부를 위한 도박에는 결국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승부에는 모든 것을 건다.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신이 악과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거는 모습을 지켜본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범죄를 O felix culpa!‘(Exsultet paschalis: O felix culpa quae talem et tantum meruit habere redemptorem)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 Augistinus, Enchiridion 8: Melius enim iudicavit de malis benefacere, quam mala nulla esse permittere. John Wycliffe. John Milton, Paradise Lost 12...: O goodness infinite, Goodness immense!/ That all this good of evil shall produce,/ And evil turn to good; more wonderful/ Than that which creation first brought forth Light out of Darkness!)

 

악을 몸소 당함으로써 이기려는 그리스도의 해법이었을까?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악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과연 그 승부의 절정은 갈바리아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와 거기 매달린 신이 아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최후로 터져나온 비명이었다. Elio eloi lemmasabacthani 십자가는 악 앞에서 완전하게 패배한 신의 형상 내지 당신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건 신의 도박이었다그의 비명에서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비극의 파토스는 절정을 이룬다


신약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악의 심각성과 고통의 절박성 설명 및 부각. 파리채를 들고 노려보는 올린포스 신들이 아니고 인류가 특히 고통으로 잘망 속에 죽어가는 피해자가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면, ?’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자기 예언자들의 죽음, 콜로세움의 광기를 용납한 신, 더구나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대속물로 내놓은 신이라니!


모든 죽음은 생자필멸의 이치임에도, 사랑하는 대상은, 사랑할수록, 죽어서는 안 되는 이유?

그들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사랑의 상대는 불멸한다고통의 의미: 상처를 키우지 말고 이 모두가 내게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 의미물음이어야 한다는 해법을 암시한다.

 

5. 결론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문학은 아케론과 스틱스를 건너서 지옥의 맨바닥까지 훑어내려가는 명부 여행이다,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왜 악을 저지르는가?”라는 비극적 물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서 ?’라는 물음을 내뱉을 적에는 동정어린 해답을 기대해서고 그런 대답을 건네줄 존재를 하고 있다. 더구나 그리스-로마 비극의 주인공들은 대개 영웅(heros)’이다. 부모 어느 한편이 불사불멸의 신이고 한편이 사멸하는 인간일 경우에 영웅으로 태어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해답의 표본으로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신인(神人), 즉 육화한 신이다. 천계와 지상에 양다리를 걸친 그런 존재만 답변이나 대응이나 해탈을 이뤄내리라는 희망을 담은 등장인물이다.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인류가 제1,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에서 바라본 악의 늠름한 얼굴, 한반도의 겨레가 해방후에만도 한라산 발치나 지리산 방치에서 목격한 악의 가장 잔인하고 포악한 얼굴에 소름끼치면서도 어디론가 시선을 돌리고 비명을 지르고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곳이 없다면, (에피쿠로스를 뒤이어 빅톨 위고가 Le Dieu 라는 장편 서사시에서 내린 결론처럼 신은 없다. 신은 없다. 절망이 있다.” C’est ne pas Dieu, c’est ne pas Dieu, c’est desespoir!) 그것을 표상하여 단테의 신곡에서 악의 최초 발원자인 악마 루치펠은 kokytos 바닥의 어름(사랑과 희망이 모조리 꺼져버린 상태)에 갇혀 있다.

 

우리 고통의 저 바닥에서(De profundis: 시편 129,1-2)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울부짖음이 공허하게 메아리로 돌아오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처럼, 당신 외아들의 비명 앞에서도(Elio, Eloi lemma sabactani) 침묵하는 하느님, 숨어있는 하느님, 심지어 십자가에 처형된 하느님에게서만, 아마도 해답은 아니더라도 신에게 공감(共感)’ 내지 동정(同情)(sympatheia)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불멸하는 신들의 일방적 농간과 사멸하는 인간들의 격정(pathos)이라는 도식에서 일단 출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강자가 위력을 발휘하여 악당들을 소통하는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강도만이 비명을 지르며 숨져가는 죄수의 정체를 구세주로 알아보던 시선. 하느님이 자기 세도를 과시하여 인간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고통 받는 인간에게, 더구나 신의 몸에까지 악을 감행하고 조롱하는 악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인간이 저지르는 악은 당하는 자보다 행하는 바를 먼저 파괴하기에: Augustinus), 고통받는 인간과 죄짓는 인간 곁에서 함께 걸어가는 (엔도슈사쿠 사해의 침묵)


하느님이 더 이상 나를 돕지 않는다면, 나를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차라리 하느님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허약함과 하느님의 고통받음에 착안한 Moltmann, Levinas) 그래서 많은 인간들이 자기 민족, 나라 혹은 인류 전체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짊어지고서 신과 법정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