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Talk 24회 고전특강 자료] 2021. 3. 6./아트선재센터

 

Homo capax dei (인간, 하느님을 포괄하는 존재)

아우구스티누스, 영혼의 불멸과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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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그리스도교 철학의 태동

 

서기 386년 가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A.D.354-430)는 로마 제국 황실에서 근무하던 수사학修辭學 교수직을 돌연 사임하고 황도 밀라노 근교의 카시키아쿰(Cassiciacum)이라는 시골로 은둔에 들어가 이듬해 부활절에 밀라노에서 있을 세례를 준비한다. 서구문화의 두 줄기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합류하는 지점에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작업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사도 바울로 다음가는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 생애의 이 전환점은 서구사상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 무렵 마니교 이원론과 회의주의를 이미 극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사유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의 신플라톤사상과 그리스도교 경전의 창조론을 바탕으로, 탈출기脫出記에 근거한 존재론’(‘나는 있는 나다’: ego sum qui sum), 진선미眞善美와 확실성確實性에 관한 인식론적 판단에 규범적 근거를 제공받는다는 조명설照明說’(‘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봅니다’: in lumine tuo videbimus lumen ), 그리고 신과 인간 두 의지意志의 합작으로 개진되는 두 도성 이야기’(‘두 사랑이 있어 두 도성을 건설한다’: duo amores faciunt duas civitates)라는 역사철학을 정립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 서구 사상사에서 근원에서 사유하는’(K.Jaspers) 사조 하나의 철학적 향방이 북이탈리아 시골 별장 카시키아쿰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문하생들과 나눈 철학적 대화(dialogi)에서 태동하였다는 사실은 유의미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철학을 경유하여 그리스도교 입교를 결심한 후 필생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이성과 신앙(ratio et fides)’을 채택한 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에 은둔하여 명상에 들어간 반년간의 사색은 혼자서의 독백獨白이나 문하생들과의 대화對話에서나 단독 집필執筆에서나 계시啓示와 성경聖經의 권위에 의존한 방증傍證을 전적으로 유보한 채로 오로지 자기가 그 동안 습득한 사변적 논증論證만을 따르면서 심포지움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독백獨白 Soliloquia서두에 의아스럽게도 기다람 기도문’(독백 1.2~6)이 나오는데 그리스 희곡의 프롤로그를 대체한 이 대목에서 독자는 시종일관 어느 철학자가 철학의 신에게 바치는 기도를 듣게 된다.

 

1. 철학자의 기도

 

실제로 387년 부활절,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서 자기를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규정하여 그의 실존적 성찰이 고백록告白錄으로 다듬어지기 전 10여년에 걸친 초기 작품들은 신앙에 입각한 신학적 명오明悟로 융합되기 이전의 철학적 고찰로 일관한 저서들이다. 당대 제국 최고의 수사학자修辭學者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로마인 특유의 웅변술(acetum Italum)을 전수받을 목적으로 문하생이 되어 따르던 청년들은 모든 면에서 실용적인 로마인들이어서 그리스인들의 번다한 논리학이나 추상적인 형이상학에 흥미를 갖기 힘들었으므로 그 중 몇이나마 아아,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도록 카시키아쿰의 여가(otium)를 함께 누리며 대화와 강연 같은 고전 학습방법을 통하여 철학적 향연에 친숙해지도록 학습시키면서 인간에게 가장 친숙할 영혼의 문제들을 다루었고, 속기사가 정리 제출한 초고를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듬어 대화편단행본들을 남겼다.

당시 밀라노 지성인들을 매료하던 신플라톤학파의 저술을 읽는 동시에 암브로시우스가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접하면서 회의론懷疑論을 극복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가 신적인 위상을 갖고서 인간 지성을 불러들인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고,이성적 동물인 인간의 영구적인 행복이 진리 발견에 따른 귀의歸依에 있다면서 자기 삶의 전향을 감행한다. 그러자 인간 영혼이 일자一者, 최고선最高善, 창조주創造主에게서 유래한다면 만유와 인간사회가 합리적 구조 하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여야 함에도 현실에서 목도하는 무질서, 인간의 의지에서 자행되는 물리악과 윤리악을 해명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2. ‘인간이란 그윽한 심연

 

인간이란 무엇이옵니까? 인간이란 실로 그윽한 심연深淵이로소이다(grande profundum est ipse homo: 고백록 4.14)라고 찬탄하면서 심연으로서의 인간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한 완성을 볼 수 없다. 그 목적이란 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아카데미아학파 논박 1.3.9)고 단언한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아폴로 신전의 전각殿刻대로 영혼에 관한 문제(quaestio de anima)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지만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무엇을 알고 싶은가?” “하느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독백 1.2.7)는 두 문답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자라면 절대자, 세계, 행복을 탐구하는 도구 곧 이성理性 혹은 자아自我 혹은 영혼靈魂에 관해서 먼저 알아야 하므로 많은 사상가에게 철학의 전단계 혹은 전체여정은 결국 자의식自意識을 반추하는 영혼론靈魂論 내지 인식론認識論으로 좁혀지곤 한다. 철학에는 두 과제가 있다. 하나는 영혼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다. 첫째 것은 우리 자신을 알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기원을 알자는 것이다.”(질서론 2.18.47)라고 전제하자 평생에 걸친 그의 사색은 신과 인간이라는, 델피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묶여 풀려나지 못했으니 하느님은 늘 숨어계셨고(deus absconditus) 인간은 알아갈수록 깊어만 가는 수수께끼(grande profundum)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들 대화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학이 발아하고 아우구스티누스 고유의 철학함이 드러난다. 그는 무엇보다 자기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사색의 출발로 삼으므로, 밀라노의 저 정원에서 깨달음을 얻은 순간 지금부터는 여생을 오로지 철학하면서 보내겠다는 각오가 모든 대화편에 나오고, 형이상학적 사변과 더불어 삶의 투신으로만 진리에 이른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으며 철학은 그에게 인생 전부를 걸만한 참된 종교(vera religio)였으므로 머지않아 그의 사색은 속세를 버리고 수도원으로 은둔하는 삶, 사제와 주교로서 성직에 헌신하는 삶으로 구현된다.

그렇게 알프스 산자락 카시키아쿰에서 젊은이들을 상대로한 철학 공부로 영혼의 문제를 풀어본 3부 습작이 Soliloquia(독백), De immortalitate animae(영혼 불멸) 그리고 De quantitate animae(영혼의 위대함) 세 편이다. 본고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세 권의 소품에서 문하생들을 지도하여 합리적 논변만으로 인간 영혼의 불멸과 위대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도록 어떻게 지도하는지 살펴보겠다. 청년시절 수사학적 수준이 낮다고 그토록 경멸하던 성경을 진리인식의 통로 하나로 받아들이고 세례 입교를 앞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과 영혼이라는 탐구 대상에서 하느님은 절대 진리絶對眞理로 명명되고, 우리 인간은 그 진리에 도달하여 합일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유享有할 수 있으리라는 영혼의 불사불멸不死不滅이 이런상으로라도 확립되어야 했다. 철학함은 결국 불멸하는 영혼이 절대 진리를 포옹하여 참여參與하는 도정(‘참된 철학자는 하느님의 연인’: verus philosophus amator dei)으로 개념된다.

본고의 후반은 387년 부활절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신자로 자기를 규정한 다음에 이루어진 사상적 성숙을 거쳐서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확대하여 숙고하였는지 조감하겠다. 욕망의 고해苦海를 항해하는 운명이면서도 생자필멸의 이치에 수긍하지 못하고 불사불멸,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 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거창한 욕망이 어디서 유래하기에 그것이 반드시 충족되리라는 예감을 품게 되었느냐를 천착해 보겠다. 방법론을 묻는다면 그의 저술과 문장을 방증으로 삼는 문헌학적 기술이 되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소품들을 학계에 소개하는 명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대화는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나 신아카데미아 학파의 현학적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로마 철학이지만, 철학 교육을 목적으로 순수하게 사변적 논제를 다루는 철학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재론고 Retractationes에서 일일이 언명하고 있듯이, 모처럼의 여가를 즐기는 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식솔과 한 자리에 모여서 철학적 주제를 꺼내어 토론을 가졌고 그 내용은 대개 속기사를 불러 기록하여 책으로 다듬어 만든 다음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친구 로마니아누스는 그 대화록을 받고서 자기 아들 리켄티우스가 얼마나 철학에 정진하며 학문에 몰두하는지 알게 되었노라고 답서를 쓴다.

 

I. ‘영혼의 불멸영혼의 크기

우리가 다루려는 대화편 3편의 주제는 신인식神認識과 인간이해人間理解 둘로 집중된다. 이 둘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이나 억견臆見 아닌 확실한 지식을 얻고 싶었고, 수학적 자명성에 버금가는 지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물론 두 대상이 무한자와 유한자, 창조주와 피조물, 원리와 결과라는 차이를 의식할 경우, 아카드 문명권의 인간 창조설화에 비해 정련된 헤브라이즘의 인간관을 받아들이더라도,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을 하게(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고백록 1.1.1) 만드는 실존적 견인력牽引力의 이유를 물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적이고 사멸하는 동물(homo, animal rationale, mortale)이라는 고전적 정의에 철학적 색채를 가하여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이성적 실체(homo est substantia rationalis constans ex anima et corpore)(삼위일체론 15.11)라고 규정하면서도 인간이란 육체를 지닌 영혼(anima habens corpus)”이라는 관념론적 정의와, 그래도 영육이 두 인격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단일한 인간을 구성한다(anima habens corpus, non facit duas personas sed unum hominem)는 상식 사이에서 오가기도 한다(서간집 137.11). 영혼이 신체에 생명을 주는 원리이지만, 인간 정신의 고유한 활동 곧 사유가 곧 영혼의 생명이라는 도식에서 이성혼(anima rationalis)이란 사유하는 영혼혹은 사유로서의 영혼(animus ut cogitatio)’에 비중을 둔다.

 

1. 독백(Soliloquia): 회의론의 극복과 자기 성찰

 

① 『독백 Soliloquia집필계기와 내용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 관한 물음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영혼)’을 알고 싶어서, 지혜를 포착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인간 영혼이 불사불멸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물음을 던졌노라고 술회한다. “내 연구에 준해서, 그리고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랑에 의거해서, 내가 무척 알고 싶어 하던 그 사안에 관해서 두 권의 책(아카데미아학파 반박 Contra Academicos행복한 삶 De beata vita)을 썼다. 하지만 그 저서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첫째 권으로는 지혜를 포착하기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탐구하였고, 그 지혜는 신체의 감관으로가 아니고 지성으로 포착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불사불멸한다는 점이 몇 가지 논증으로 파악된다. 둘째 권에서는 영혼의 불사불멸에 관해서 사안이 보다 길게 논의되지만 끝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묻고 내가 내게 답하고 하면서, 마치 이성理性과 내가 두 사람인 것처럼 썼다. 내가 나 혼자이면서도 그렇게 하였으므로 나는 그 책에 독백獨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제목 soliloquia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조어新造語로였다.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묻고 답하고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도가 없다.”(독백 2.7.14)고 하듯이, 비록 작은 책자이지만 서구문화에서 비중이 큰 편이니, 진리의 객관성 앞에서 자의식自意識을 반성하도록 훈련하는 문학형식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이성理性으로 확보하는 자명성自明性을 철학적 성찰의 기준으로 설정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지성이 그 자체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자의식自意識의 방법론을 구사하여, 존재 의미를 물으면서 진리 자체를 찾아서 어디론가 거슬러 올라가는 내면의 흐름을 반성하면서 지성의 정화淨化를 통해서(1), 사유의 변증법辨證法을 통해서(2) 그 소급활동을 추진한다.

 

③ 『독백에서는 진리의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어 철학의 난제인 회의론懷疑論이 극복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먼저 알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경험적 인식도 얻지 못한다. 모든 인식에는 진리 인식이 선행先行한다. 따라서 하느님 인식과 영혼 인식에도 진리에 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 권이 끝나면서 진리의 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먼저 알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경험적 인식도 얻지 못한다.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영혼] 이 둘을 알 수 있으니까.”(1.15.27) 아울러 학문과 지식에 들어있는 진리를 관찰하고 거기서 발견하는 진리의 편린들을 거쳐서 그것들을 이라고 조명해주는 본원적 진리를 찾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학문이 학문이라는 점에서 참이라면, 진리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래서 모든 학문들은 그 진리에 의거하여 참된 학문이 된다는 사실(2.11.21)을 바탕으로 삼는다.

일단 자명한 경험적 사실을 지성이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그의 논지는 그대가 존재함을 아는가?” “안다.” “어떻게 아는가?” “모르겠다.” “그럼, 그대가 생각하고 있음을 아는가?” “안다.” “그러니까 그대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참이다.”(2.1.1) 이렇게 의심을 허용 않고 자명하고 참된 명제 곧 나는 생각한다.”가 다른 모든 인식의 자명한 토대가 된다. 뭐든지 의심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못한다.”, 자의식(cogito)의 자명성은 훗날 만일 의심한다면 자기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한다. 만일 의심한다면 확실히 알기를 원한다. 만일 의심한다면 그는 생각한다. 만일 의심한다면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은 안다. 만일 의심한다면 그는 자기가 경솔히 동의해서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누가 무슨 사안을 두고 의심하든지간에 지금 말한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로 귀결된다(삼위일체론 10.10.14) 그리고 만일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um si fallor)는 명제로 확인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을 성찰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사유에서 인간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탐색한다. 인간의 의식은 자기가 존재함, 살아있음, 사유함을 일차적으로 직접 파악한다. 사람은 살아 있지 않는 한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한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 그대는 존재하고 싶고 살아있고 싶고 인식하고 싶다. 하지만 존재함은 살아 있기 위함이고 살아 있음은 인식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그대는 자기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대가 살아 있음을 안다. 그대가 인식하고 있음도 안다.”(2.1.1) 나의 존재함, 살아있음, 사유함이 내 의식에 직접 현전하는 사실로부터 단지 그대는 이것들이 미래에도 항상 존재할 것인지, 그렇지 않고 [미래에는] 이 중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고 어떤 것은 항상 존속하고 어떤 것은 사멸할지, 아니면 모두가 존속한다고 한다면 이것들이 감소하거나 증대될 수 있는지 알고 싶다.”(2.1.1)면서 그 능력의 주체인 영혼의 불멸을 추정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독백2권의 주제로 영혼은 불사불멸하는가?를 설정하는데 기본 논지는 다음과 같다(2.13.24): 주체 안에 내재하는 무엇이 항상 존속한다면 그 주체도 항상 존속한다.” 그런데 변증법[논리학]이라는 만고불변의 학문은 영혼 안에 있고, 진리에 상응하다는 점에서 항상 존속한다.” 따라서 영혼도 항상 존속한다.” 지성이 구사하는 만고불변의 법칙(동일률, 모순률, 배중률 등)은 지성이 창안하는 것이 아니고 발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형체들이 진리 안에 존재하든 진리가 그것들 안에 존재하든, 우리 영혼, 다시 말해서 우리 오성(悟性)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뜻에서 우리 영혼에는 진리도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어떤 학문이 마치 주체 안에 있듯이 영혼 안에 불가분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또 진리가 소멸할 수 없다면, 우리가 영혼의 영구한 삶에 관하여 뭘 여전히 의심하는지 묻고 싶다.”(2.19.33) 간단히 말해서, 진리가 항상 깃드는 인간 영혼은 진리가 항상 살아 있듯이 항상 살아있고 따라서 불사불멸한다.

훗날 본서의 집필의도를 영혼과 하느님이라는 두 대상을 놓고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랑에 의거해서, 내가 무척 알고 싶어 하던 그 사안에 관해서 책을 썼다고 회상하였지만, 하느님 인식이 그랬듯이 인간 인식도 교부가 서두에 바라던 확연한 결말에 이르지는 못하였고, 다만 나는 살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 안에 불멸하는 영혼이 거처한다.”는 결론까지만 이르렀노라고 자평한다(1.12.20-13.22; 2.13.23).

 

 

2. 영혼 불멸 De immortalitate animae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대화편 영혼 불멸 De immortalitate animae은 단권(liber unus)으로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 가운데서도 가장 길이가 짧은 단행본이지만 철학적 논변으로만 접근하던 방법론 때문인지 저자 본인이 이 책을 두고 논리 전개가 하도 번다하고 옹색하여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읽자면 내 주의력이 산만해지고 내 자신마저도 겨우 알아들을 정도”(재론고 1.5.1)라는 혹평을 남겼다. 소책자에다 너무 무미건조한 논리전개를 담았고, 카시키아쿰에 모인 문하생들을 상대로 영혼에 관한 철학사조들을 염두에 두고 학구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자기 고유한 사상을 개진하는데 미치지 못했다는 후기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체-영혼의 관계를 질료형상론으로 도식을 채택할 경우, 질료(신체)가 소멸된 후 거기에 깃드는 형상(영혼)도 소멸하거나 물체적인 무엇으로 변하리라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학파의 반론을 천착하면서 영혼불멸을 방증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또 인간의 삶을 관찰하면 신체의 감응에 반응하는(secundum corporis passiones) 영혼은 분명히 변화를 보이고 자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도덕에 따라서도(secudum suas affectiones) 변화를 보이므로, 그런 변화는 그 존재의 항속성의 감소를 의미하고 결국은 사멸을 예고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했다.

 

그러나 유사한 것이 유사한 것에 인식된다’(simile simili cognoscitur)는 인식론 공리에 따르면, 인식주체에 받아들여지는 피수용체의 존재 양상은 또한 수용체의 존재 양상을 전제한다는 추론도 가능하므로 본서에서도 첫머리부터 만일 학문disciplina이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살아 있는 어떤 수용체 안에서가 아니면 존재하지 못한다면, 그러면서도 항상 존재한다면, 그리고 항상 존재하는 주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어서 항상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학문이 그 안에 존재하는 그 주체는 항상 살아 있다.”(1.1)는 논지를 본서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영혼에 깃드는 이념의 영구성에 비추어 영혼 불멸을 논증하는 방식은 전래적이지만, 이성혼理性魂의 고유 활동인 사유思惟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사유 주체(영혼)의 불멸을 제기하는 논리전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유한 착상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육체의 형상인 영혼의 기능인 이성ratio, 그 작용인 사유cogitatio합성되지 않고 순수하다는 점에서 영혼은 신체처럼 외연外延을 갖지 않았으며, 따라서 분절分節과 손상損傷을 입지 않으리라는 전제를 내세워 영혼의 불멸을 유추하기도 한다. 인식주체인 영혼靈魂과 그 주체의 고유작용인 사유思惟는 반성적으로 고찰해 보면, 사실상 단일하며, 이념理念이라는 인식대상 자체가 불가분하므로 인식주체도 불가분하여(quidquid accipitur, ad modum accipientis accipitur) 쇠퇴와 소멸을 겪지 않는다는 논증(영혼의 불멸 5,7-6,11)이 축을 이룬다. "진리를 직관하는 영혼과 직관되는 진리 사이의 이 연계는 영혼이 주체고 진리는 그 주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로 진리가 주체이고 그 주체 안에 영혼이 존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진리와 영혼 둘 다 실체이거나 셋 가운데 하나다(6.11). 아우구스티누스가 영혼불멸을 입증하는 이런 지론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절하여 해설할 필요가 있다.

 

영혼의 고유한 인식대상인 이념理念이 상존常存하므로 영혼은 불멸不滅한다

영혼은 고유한 실체가 아니고 신체의 조화造化’(harmonia corporis)라거나 혼은 신체에 깃든 원소들의 조절調節’(corporis temperatio)일 따름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신체의 조화가 존재한다면 신체를 주체로 삼아 그 안에 신체와 불가분하게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 신체는 가변적인데 (영혼이 거의 선천적으로 파악하는) 기하학의 공리 같은 이념rationes은 불변한다. 주체가 변하면, 그 주체 안에 주체와 불가분하게 존재하던 것도 변해야 할 텐데, 저 불변하는 이념이 영혼에 항존하는 점으로 미루어 가변적인 신체의 조화가 곧 영혼은 아니다(2.2)는 논지로 답한다. 조화나 조절은 영혼 자체가 아니고 영혼이 신체에 현존하는 양상이다.

 

이념 혹은 진리는 지성이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발견할 따름이다

더구나 이성혼의 고유한 대상은 이념 혹은 진리인데 그 대상은 우리 지성이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발견할 따름이라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추리를 한다거나 어떤 자유학예에 관해서 제3자로부터 제대로 질문을 받을 적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른 곳 아닌 우리 영혼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발견한다는 것은 만든다거나 산출한다는 것과 같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인 발견을 통해서 영원한 것들을 산출하는 셈이 된다."(4.6)

 

영혼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나 변화는 오히려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방증이다

인간 영혼에 수면과 각성, 망각과 기억, 무식과 유식을 교차하는 현상을 관찰하면, 영혼도 변화생성을 겪는 물체라고 하거나 결국 물체로 변질되어 종국에 신체처럼 사멸하리라는 유물론적 입장들이 있다. 그런데 영혼은 공간空間에 속하지 않으므로수면, 무지, 망각으로 인해 자체로부터 소외되지도 않는다! 또 영혼은 연장延長이 아니므로양적인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지 않아 본성에 입각한 생성, 부패, 쇠퇴 과정을 겪지 않으므로 영혼에 우유적으로 발생하는 운동과 변화 때문에 물질적 존재로 변질하지도 않고, 자기 고유한 형상(‘사유로서의 생명’)도 상실하지 않는다! ‘영혼은 진리로부터 존재를 받는다.’ ‘그런데 진리의 상반자相反者는 허위이다.’ 허위는 영혼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고, 어리석음 진리에서 멀고 먼만큼 영혼의 존재를 덜하게 위축시키지만 그렇더라도 영혼을 사멸하게까지 만들 수는 없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그르칠 수 있고 우매해질 수 있다. 제목부터 De immortalitate animae(영혼의 불멸에 대하여)이므로 보다 상세한 반론과 답변이 열거된다.

 

3. 영혼의 크기’(De quantitate animae)

 

아우구스티누스가 아직도 신학적 언표는 삼가고 자기의 사색을 철학적 논지 범위에서 장차 평생의 토론 주제로 삼을 영혼의 문제를 다룬 삼부작에서 영혼의 위대함 De quantitate animae은 그래도 분량이 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서에서 다룰 소제들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예고한다. 영혼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영혼은 어떤 성질인가? 얼마나 큰가? 신체에는 왜 부여되었는가? 신체에 올 때에는 어떤 성질이 되는가? 또 신체에서 떠날 적에는 어떤 성질이 되는가?”(영혼의 위대함 1.1) 그리고 이런 탐색은 자기를 찾고 자기 하느님 곧 진리를 찾는시도이므로 실패가 없으리라는 희망도 숨기지 않는다. "신적 섭리가 있는 한, 경건한 영혼들이 자기를 찾고 자기 하느님 곧 진리를 찾는, 그것도 신심을 다해, 정결하게, 또 부지런히 찾는데 그 대상을 발견해 낼 기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14.24) 하지만 먼 훗날 본인이 수긍하듯이 영혼이 얼마나 큰가에 관해서... 책 전체가 이 한 가지 탐구에서 제목을 받았으며 영혼의 크기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영혼의 크기내지 위대함을 논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3.4-36.80).

 

본서는 세례 직후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가는 도중 로마에 머물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친구이자 문하생이기도 한 에보디우스 Evodius가 스승이 직전에 집필한 저서 영혼 불멸에서

제기했던 영혼의 문제에 좀더 상세하고 분명한 대답을 촉구하면서 시작된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합리적 추론으로 일관하던 영혼 불멸과 달리, 본서는 대화체로 상대방의 이해에 맞추어 진도를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33.70-36.81), 곧 영혼의 위대한 기능들을 다루는 핵심부분은 사제간의 대화 형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단독강연(oratio perpetua)으로 바뀐다.

본서는 단권(liber unus)으로 크기를 단순히 분량分量(quantitas)으로 논하자면 영혼은 연장체延長體의 범주에 드는 삼차원의 크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토론하고(3.4-32.69)과 영혼 활동을 여러 등급으로 약술하면서 영혼의 '위대한 능력'을 소개하는 말미(33.70-38.80) 두 부분으로 나뉜다. 결국 영혼이 물체적 크기’(quantitas corporea)를 가졌다는 주장이 배척되고, 물리적 연장延長으로서의 크기를 정신적 능력能力으로서의 크기로 대체한 착안이었다. 영혼이 지니는 모종의 크기’(magnum aliquid) 위대함이 후일의 저술에서 신까지 포괄하는 위대함’(capax dei)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든다.

 

영혼의 크기는 삼차원이 아니다

크기로 말하자면 영혼에는 삼차원적 크기가 없다(3.4)는 명제를 내세우면서 영혼이 물리적 차원을 안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3.4-4.5)는 소극적 논증이 있고, 뒤이어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데스 이론에 따른 기하학 도형들을 언급하면서 기하학 도형을 상상하고 판단하는 영혼의 고차원적 사유로 미루어 영혼의 크기를 삼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영혼은 비물체적이어야 한다. 그 기능인 기억이 다양한 사물들의 표상을 간직하고 추상적 차원을 간직하기 때문이다.”(4.6-15.25)라는 적극적 논증도 따른다.

물체의 크기라는 점에서 영혼이 크다.”는 말이 아님을 에보디우스에게 설득시키는 다양한 논지들이 나온다.

연장延長 없는 실재가 존재함을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정의正義(iustitia)’ 개념을 예거한다. 정의가 공간적 연장을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곧 허무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못하므로 물체보다 상위면서 연장延長을 지니지 않은 사물이 존재할 만하다(4.5).

또 영혼이 만일 자기가 깃드는 신체처럼 연장체라면, 신체보다 더 큰 표상表象은 영혼이 내포도 못하고 따라서 파악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세계 전체만 아니고 무수한 세계도 표상으로 상정한다(5.7-9).

거대한 연장체를 상상력과 기억에 내포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영혼 역시 연장체라는 증거는 아니다. 물체에는 세 차원들이 불가분하게 존재하는데, 영혼은 이것들을 물체로부터 분리해낼 추상력抽象力이 있다.(6.10-12.21).

영혼이 신체 전체를 살리고 있는 만큼 신체 전체에 영혼이 연장되어 있다.”는 반론에 감각에 관한 장황한 분석(23.31-30.58)을 통해서 감각이란 신체적 감응感應(passio, affectus)이다. 영혼은 신체의 그 감응을 통해서 감각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전신에서 발생하는 감각이 영혼의 연장성(= 신체와 외연이 같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30.61)

 

다른 더 중요한 문제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은 직전의 영혼 불멸과는 달리 이 영혼의 크기에 대한 서평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큰가에 관해서 아주 열심히 또 아주 치밀하게 토론했고, 영혼은 물체적 크기를 갖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재론고 1.8.1.)는 언급을 남겼다. 처음에 내세운 영혼의 기원문제는 후대에 그리스도교의 원죄설原罪說을 배경으로 빈번하게 토론에 붙여진다. 유일신에 의한 창조를 믿는 사람이므로 영혼을 신성神性에서 유출流出한 무엇, 따라서 신성의 일부라거나 자체로 신성한 무엇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본서에서는 영혼의 기원起源보다 영혼이 궁극적으로 회귀回歸하는 향방向方이라는 관점에서 답변을 찾는다. 영혼이 어디서 유래하느냐고 질문할 적에 자네는 이 중의 어느 것을 알고 싶은가? 영혼의 어떤 처소處所 또는 고향故鄕을 묻는다면 나는 영혼이 창조 받은 하느님이시라고 믿네.”(1.2) 그래서 창조와 유출을 혼동하지 않게 하느님이 영혼을 만드셨지만 그것이 나름의 실체를 갖는다고 알아들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12.22).

실제로 본서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 사상을 도입한 사건은 그리스도교 철학에만 아니고 중세 이후 서구철학사의 향방에 의의가 크다고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본서를 통해 영혼이 영적 실체라는 신플라톤 사상을 그리스도교 철학에 정식 도입한 결과를 빚는다.

 

 

II. 영혼의 위대함: ‘인간, 신을 내포하는 존재(homo capax dei)

 

1. 영혼의 크기에 나타나는 단초

 

본고에서 본격적으로 논하려는 바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영혼이 무한자 하느님을 내포하는 수용력’(homo capax dei)에서 영혼의 크기혹은 위대함을 간파하는 착안이다. 그리고 그 기조사상의 단초가 영혼의 위대함에서 이미 착상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영혼이 신체의 형상으로서 신체의 외연外延만큼 신체 전체에 퍼져 있다는 지적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포착하는(comprehendere) 사물의 영상 또는 그 영상의 기억이 물리적 사물의 삼차원적 분량과 상관없이, 그 대상이 제아무리 크게 확대되더라도 그 대상이 영혼에 내포되고(contineri) 따라서 영혼이 무한한 것(im-mensum)을 그 품에 포괄한다(capere in sinu)는 사실에서 영혼의 크기가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착안한다.

 

사유의 모든 대상이 영혼에 내포內包된다

영혼이 신체만큼 작은 공간에 있을 뿐이라고 하는데, 도회지나 넓은 땅이나 영상화될 수 있는 다른 거창한 물체들까지 그 안에다 커다란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바는, 우리 기억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함하는지를 자네가 조금만 더 치밀하게 숙고해 보라는 말일세. 물론 그 모든 대상이 영혼에 내포되어 있네(quanta et quam multa memoria nostra contineat). 그러니 도대체 어느 토지와 어느 해만(海灣)과 어느 무량함이 있어 이 모든 것을 품을 만하겠는가!(qui ergo fundus est, qui sinus, quae immensitas quae possit haec capere) 앞에 나온 이치는 영혼은 신체의 크기만큼 클 따름이라고 가르친 것으로 보이는데도 말일세.”(영혼의 위대함 5.9)

 

정의正義 같은 추상적 이념들의 내포

삼차원을 띠지 않고 공간적 사물 아닌, ‘정의正義(iustitia)’ 같은 추상적 개념(이념)들이 영혼에 얼마든지 궐기蹶起하고 잔멸殘滅하는 현상 역시 그것들을 수용하는 영혼이 공간적 연장체가 아님을 입증한다.

정의같은 추상 개념을 파악하고 연상하는 사실에서 영혼은 길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것이... 저 거대한 공간들의 무수한 영상들을 [영혼이] 자기 나름의 길이도 넓이도 깊이도 없이 어떻게 내포할 수 있느냐는 의문(quo rursum pacto tantorum spatiorum imagines innumerabiles nulla sua et longitudine, et latitudine, et altitudine capere possit)이 나를 괴롭힙니다.”(영혼의 위대함 5.9)

 

멀리 떨어진 사물에 감응하는 시각視覺의 경우

영혼이 현존하지 않아야만 감응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봄으로써 감응하는 것은... 영혼은 어느 공간에도 내포되지 않는다는 contineri 사실(nullo loco animam contineri)을 누가 모르겠나? 그러니 눈 곧 신체인 눈이 자기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감응하는 것은 오직 이것, 즉 영혼 없이는 결코 감응하지 못하는 이것뿐일세.”(영혼의 위대함30.60)

 

영혼은 공간에 내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혼이 공간에 내포되지 않는다고, 또 그런 점에서 일반 물체에서 우리가 감지하는 크기를 일체 갖지 않는다(non loco animam contineri),atque ob hoc nullius talis esse quantitatis, qualem in corporibus cernimus)고 자네에게 분명해진 이상... 신체와 더불어 영혼이 분할될 수는 있으리라는 말은 아니다(영혼의 위대함 31.64)

 

2. Homo capax dei

 

카시키아쿰 대화편에서 착안한 영혼의 포용력(capere)’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인간학종합서라고 할 삼위일체론과 다른 저술에서 대단한 확장을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헤브라이즘의 인간상이 최고의 자연본성을 내포할 역량이 있고 최고의 자연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summae naturae capax est, et esse particeps potest) 위대함에서 영혼의 위대함을 본다. 비록 위대한 자연본성이지만 타락할 수 있었으니 최고의 자연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최고의 자연본성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었지만, 최고의 자연본성을 받아들일 역량이 있고 최고의 자연본성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여전히 위대한 자연본성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서는 실제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창조받은 모상’(capax dei)과 성화될 은총의 가용성可用性(capax gratiae)'의 선후관계가 없다. 그가 궁극자를 향한 실존적 견인력牽引力의 이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을 하게(고백록 1.1.1: 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만드는 근원적 결핍缺乏의 갈증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그 부족함을 채우기에 충분하지 못하다.”(신국론 12.1.3) 저 수용능력에 뿌리가 있었다.

 

신성神聖을 향한 존재론적 향수鄕愁(homines plerique divinitatis avidi)

인간의 타고난, 상승하는 움직임, 궁극자인 신성神聖을 향한 존재론적 향수鄕愁(divinitatis avidi)가 진리를 향하고 그 진리도 인간을 찾아나선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에 입교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로고스의 육화肉化였다. 그 향수와 동경 때문에 인간은 실존적 비참과 결핍을 절감하면서 단념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타오르고 달려가게 만든다.

영원한 로고스는 당신의 육화肉化라는 본보기로 인류에게 설득하신 바가 있다. 인간들은 흔히 신성을 향한 향수가 있어서(homines plerique divinitatis avidi)... 인간들에 대한 연민으로 하느님이 극히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더불어 또 그만큼 여러 사연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놓였다는 것을 절감하고(tam proximum esse Deum pietati hominum, ad quem velut longe positum), 그래서 전인적 노력으로 그분과 합일하는 경지를 찾아 안달한다.”

타락한 인간성을 체험하는 현세에서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존엄성은 상실하지 않았다는 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낙관론이 있다. “그 모상이 하느님께 대한 참여를 상실한 다음에도, 비록 실추되고 변형된 양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존속하고 있다. 물론 하느님을 수용할만하다는 점과 하느님께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이기는 하다(Eo quippe ipso imago eius est, quo eius capax est, eiusque particeps esse potest). 그렇지만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이 아니면 이처럼 위대한 선익이 가능할 수 없다(quod tam magnum bonum, nisi per hoc quod imago eius est, non potest.”(삼위일체론 14.8.11)

 

인간의 염원은 마음의 품!”(desiderium, sinus cordis)

인간 지성의 천성적 욕망은 절대지평絶對地平을 향해 열려 있다. 유신론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것을 갈구하는 그 열망과 함께 던져진’(iactum) 존재가 아니고 선한 창조주에게서 선한 사물로 만들어져 섭리의 손길로 놓여진’(positum) 존재이므로, 그 타고난 열망은 제아무리 거창한 것일지라도 성취가 언약된 선물이지 결코 헛된 착각이어서는 안된다. 타고난 열망, 진리 향유, 영원 생명, 완전한 행복 등의 열망은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

유한자인간이 진리 향유를 희구하고 불사불멸을 동경하고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근거는 욕망은 마음의 품!. 우리가 욕망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확장한다면 [그 모든 것을] 포괄하기에 이르리라.” (요한 복음서 강해 40.10: Desiderium, sinus cordis est; capiemus, si desiderium quantum possumusextendamus)는 신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위대함은 그 포괄량에 한도가 없다는 점에 있으므로 철학적 사색으로, 사랑의 발휘로, 신앙인다운 기도로 인간이 추구하는 바는 이렇게 타고난 그 용량(capacitas)을 확대함으로써 천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에 있다.

열망은 마음의 품. 우리가 욕망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확장하는 그만큼 포괄하기에 이를 것이다(capiemus, si desiderium quantum possumus extendamus).리의 토론이, 욕망이 그저 씨뿌려지고 싹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엄청난 용량을 보이면서 성장해야 한다(tantae capacitatis augeatur). 그래서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영혼의 확장’(cogitatio extensio animae)

무엇보다도 철학적 사유는 영혼의 확장이요 지혜와 지식(영원한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온 것까지 포함해서)을 포괄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우리 스스로를 연장하게 만든다. 그러한 연장은 우리를 확장하고, 확장은 우리를 포괄적인 존재로 만든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에 참여할 만큼 포괄적이 되게(capaces fiant) 한다.”

그러니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을 하므로(quia fecisti nos ad t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고백록 1.1.1) 영원한 안식, 해넘이 없는 저녁이 오기가지 인간 영혼의 탐구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을 더욱 포괄적으로 만든다’(invenientem capaciorem facit)

발견하기로 탐구하자. 발견한 바를 더욱 탐구하자. 발견하기로 탐구하는 대상은 감추어져 있다. 발견되어도 탐구하는 대상은 무량하다. 그래서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는 구절이 있다. 포용하는 그만큼 찾는 사람을 만족시켜 준다. 그리고 발견한 사람을 더욱 포괄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더욱 더 포괄하기 시작할수록 더욱 더 충족시키려고 찾게 만든다.”(Satiat enim quaerentem in quantum capit; et invenientem capaciorem facit ut rursus quaerat impleri, ubi plus capere coeperit).

신학적 연구에 침잠하여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키워가는 지성의 이해도 확대된다. 먼저 소박한 신앙으로 양성받은 바를 가톨릭 학문은 그리스도교 지성을 가르쳐 초월적이고 영원한 사물들을 이해할만큼 포괄적으로 만든다(ut eam capacem faciat ad intellegenda superna et aeterna).

심지어 인간 영혼의 확장은 하느님의 신비의 궁극에 해당하는 삼위일체에도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인간이 육적이고 동물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가 될 때에는 더욱 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포괄하기에 이르리라.(et Patrem et Filium et Spiritum sanctum capacius fuerant habituri).”

 

욕망은 채워야... 품은 확장해야’(desiderium implendi... extendendum sinum)

철학자들의 동경은 물론 신앙인들의 기도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일이 영혼의 크기를 확장함으로써 그대를 더 포괄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낙관적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확장함으로써 그대는 더 포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미루심으로써 욕망을 확장하신다. 확장하심으로써 욕망을 포괄적으로 만드신다.(extendendo facis capaciorem: sic Deus differendo extendit desiderium, desiderando extendit animum, extendendo facit capacem.) 그러니 형제들이여, 욕망을 품읍시다. 욕망을 채워야 하는 까닭입니다.(desideremus ergo, fratres, quia implendi sumus.)보시라, 바울로는 장차 올 것을 포괄할 수 있을만큼 품을 확장하고 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열망이요 더구나 종교인들의 삶은 성스러운 열망으로 점철된 것이므로 그것이 허무하게 종결될 수는 없다. 현생은 오로지 요망要望으로 그치는 것이 삶이려니 하더라도,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욕망은 창조주가 결국 채워주신다는 기대가 있다.

우리가 열망하는 것을 아직은 보지 못하지만 열망하면서 보는 능력을 펼치게 되고, 보아야 할 것이 올 때에 비로소 충만해질 것이다.”라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지無智와 고해苦海를 건너가는 생자필멸의 인생에서 진정 철학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연인’(verus philosophus amator dei)라는 경지를 지성에 상정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릇 같은 데에 뭔가를 넣고 싶은데 그 안에 놓을 것이 너무 많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릇이나 자루나 그 비슷한 것의 용량을 늘릴 일입니다.”라는 격려를 서슴지 않는다.

좋은 그리스도인의 온 생활은 거룩한 열망입니다.(tota vita christiani boni, sanctum desiderium est). 그대는 열망하는 것을 아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열망하면서 보는 능력을 펼치게 되고, 보아야 할 것이 올 때에 비로소 그대는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릇 같은 데에 뭔가를 넣고 싶은데 그 안에 놓을 것이 너무 많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릇이나 자루나 그 비슷한 것의 용량을 늘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기다리게 하시면서 열망을 키워주시고, 열망으로써 영혼을 넓히시며, 영혼을 넓히시면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주십니다(extendendo facit capacem).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열망합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채워질 것입니다(desideremus ergo, fratres, quia implendi sumus).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앞으로 다가올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그릇을 늘렸습니다.”

 

그대의 열망이 그대의 기도’(desiderium tuum, oratio tuat)

열망하면서 단련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입니다(Haec est vita nostra, ut desiderando exerceamur). 거룩한 열망은 우리의 열망을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떼어놓기까지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채울 수 있도록 비우십시오.”

종교인으로서 아니고 철학자로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론적 심연에서 올라오는 인간의 모든 열망이 절대자에게 올려지는 모종의 기도祈禱(oratio: 영혼의 발설發說)’로 보였다.

내 모든 열망이 당신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대의 열망 자체가 그대의 기도이다.(Ipsum enim desiderium tuum, oratio tua est) 열망이 지석하면 기도도 지속한다. 사도가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한 말도 헛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지향은 우리 마음을 평정하고 정화하고 신적 선물을 수용하는데 더 포괄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quia ipsa orationis intentio cor nostrum serenat et purgat, capaciusque efficit ad excipienda divina munera)“

그렇다면 기도하는 소망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는 철학하는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위안해야 할까?

미루시지만 소원을 앗아가지는 않으신다. 미루시면서 뭘 하시는 것입니까? 열망으로 영혼의 그릇을 넓히신다(Desiderio dilatat sinum animae). 그러니까 선들을 향하는 열망의 확장으로 그대의 용량이 단련되는 것이다(Exercetur ergo capacitas tua dilatione bonorum); 열망이 증가함으로써 그대는 언약하신 바를, 그대가 열망하는 바를 포괄하기에 적합한 인간이 된다(ut aucta desiderio, sis idoneus capere quod promittit, et quod desideras).”

Differt, non aufert. Et in differendo quid agit? Desiderio dilatat sinum animae....Exercetur ergo capacitas tua dilatione bonorum; ut aucta desiderio, sis idoneus capere quod promittit, et quod desideras.

 

결론 대신에

 

절대지평상의 인간 영혼이 진선미眞善美와 확실성確實性의 이름으로 지향하고 추구해온 모든 욕망은 사실상 최고선(summum bonum)이요 존재자체(ego sum qui sum)인 분에게로 수렴되어 왔음을 각성하기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열망하는 일이 남아 있다. 더는 땅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을 사랑한다. 그분과 함께 있지 않지만 [모시고 있지 않지만] 사랑한다. 그들의 열망은 미뤄지지만 이는 키워지기 위함이다. 키워지는 것은 포괄하기에 이르기 위함이다.(Desiderium eorum differtur, ut crescat; crescit, ut capiat.) 하느님께서는 열망을 품은 사람에게 무슨 사소한 것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위대한 선을 포괄하는 능력을 받으려면 소소한 훈련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무엇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당신 자신을 주시려는 것이다. 하느님을 포괄하라는 단련이다. 그러니 그것을 언제나 간직하기까지 두고두고 열망하라!(ad capiendum Deum exercere; quod semper habiturus es diu desidera).”

영혼이 그대의 욕망을 확장해 나가기를! 그리고 용량이 보다 큰 품으로 파악하도록 탐색하기를(Extendat anima cupiditatem suam; et sinu capaciore quaerat comprehendere)!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파악하도록!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지만) 열망을 품을 수도 있다. 욕망을 품을 수도 있다. 갈망할 수도 있다. 온당하게 생각에 떠올리는 일은 가능한데 말로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그의 철학함은 실존적이었으므로 어느 시인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느니, 우리도 사랑엔 항복하자꾸나!”(omnia vincit amor, et nos cedamus amori!)라는 훈유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저런 식으로 소유당하다니, 저토록 위대한 분에게 소유당하다니 우리는 행복하여라! 그분이 우리를 차지하심으로써 우리 또한 그분을 차지하는 법이니!”(설교집 47.30: o beatos nos tali possessione, et tali possessore! nam et possidet nos, et possidemus illum) 라는 고백처럼, 하느님을 내포할 만큼 커다란 자기 영혼의 품은 그 하느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인간 편에서는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고백록 1.1.1)는 실존적 공허를, 진리 자체로부터는 사냥개처럼 자기 뒷덜미를 바싹 쫓으며 저는 어디로나 당신께 포위되어 있었습니다.”(undique circumvallabar abs te: 고백록 8.1.1)라고 실토하며 항복하게 몰아세우는 추격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인간 영혼은 해넘이 없는 안식일을 맞아야만 안돈에 이를 숙명이었다. 주 하느님, 저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저희에게 모든 것을 베푸셨으니 정묵靜黙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 저녁 없는 평화를 주십시오. 일곱 째 날은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습니다(고백록 13.3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