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Talk 4회 공개강좌 자료] 2019.11. 9./아트선재센터

 

두 개의 사랑 두 개의 정치

-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펼쳐진 역사의 새로운 지평

 

성염(전 서강대 교수,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공개강좌_04_01_20191109_성염 교수님.mp3 53MB


0.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0.1. 집필 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집필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기 410알라릭이 거느린 고트족의 침략으로 로마가 파괴되었다.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자 거짓 신들을 다수 섬겨오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가 항용 외교인(外敎人)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봉기하여 그 재앙의 탓을 그리스도교에 씌우려고 하면서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혹독하고 신랄하게 참 하느님을 모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성에 불타 나는 그자들의 모독과 오류에 맞서 신국론을 집필하기로 작정하였다."(재론고 Retractationes 2.43.1) 로마의 침탈이라는 엄청난 정치군사적 비극에 당면하여 외교인 친우 볼루시아누스(Volusianus)와 독실한 그리스도인 행정관료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로부터 이 역사적 위기를 정신적으로 감당해내도록 당대의 지성인들을 설득할만한 대작을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교부는 받는다.

영원한 도성 로마(Roma aeterna)에 알라릭의 군대가 입성한 다음 거국적으로 정신적 이념적 혼란이 발생하였다. 당시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로 봉직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사건을 사변적으로 해명하면서 혼겁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피해자들을 위로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인간사(res humanae)에 대한 그리스도교 관점을 집대성하고 이론화하였다.

 

0.2. 집필 목적

 

그리스도교 최초의 역사철학서 내지 역사신학서로 간주되는 이 대저는 300년 박해에 소멸하지 않고 새로이 유럽 문화의 축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에 여전히 적대감을 품고 있던 외교인들과 이미 그리스도교 문화를 수용한 그리스도교인들을 상대로 아울러 쓰인 책으로 이중 목적을 띤다. 외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제국의 쇠퇴와 로마의 굴욕을 그리스도교의 잘못으로 씌우는 고발이 근거 없고 불의함을 반증한다. 무너져가는 이교세계의 마지막 저항 속에서 교부는 논적들에게 제국의 이 엄청난 비극이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이유가 있지 않으니 그리스도교 예배가 성행하기 훨씬 전부터 로마에는 끊임없이 재앙과 비극이 있었고 이교 숭배가 그 재난을 막아주지 못했음을 사가들의 문전에서 입증해낸다. 그리고 외교 문화가 해결하지 못하거나 잘못 해결해온 사회문제와 종교문제,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행복을 그리스도교야말로 해결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외교인들이 자행하는 부당한 공격과 이론에 응수하는 이론적 무기들을 제공함과 동시에 역사적 비극을 겪으면서도 구원의 역사라는 시선으로 인류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0.3. 작품의 구도

 

아우구스티누스는 게르만족의 로마 침탈을 계기로 인류 역사 전체를 자신의 철학적 종교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하나의 단일한 역사철학 내지 역사신학으로 해석하고 정리하기로 작정하였다. 신국론에 구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망라하는 삼차원적 사관이다. 그는 역사의 시원을 과거로 거술러 올라가 인류의 기원을 창조설로 해결하고, 선한 하느님의 선의에서 온 창조에 따라 만물이 선하다는 성선설과 아울러 당초부터 인류에게 정의로운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자연(對自然)가 주어져 있었고 인간에게는 불사불멸성이라는 은총의 선물이 주어져 있었다는 그리스도교 계시에 공감한다. 그것이 원초부터 인류에게 평화와 자유 그리고 지복(至福)을 담보하고 있었다는 낙관론에 이른다.

그러나 현금의 인류가 거쳐가는 역사의 현장은 수고롭고 고통스럽기 이를데없고 인간과 인간의 투쟁, 민족과 민족의 전쟁들로 점철되어 있는 고해(苦海)이다. 일면으로 덕성을 연마하지만 일면으로는 개인과 집단이 악과 죽음으로 파괴되어가는 역사이다. 그러나 미래는 초역사(超歷史), 즉 마지막(novissima) 혹은 종말(終末)이라는, 직선적 시간관의 종점을 향하여 나간다. 존재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인간실존(esse, gnoscere, amare)이 충만하고 결정적인 완성을 볼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더 이상 죽음을 모르고 우리의 인식은 더 이상 오류에 떨어지지 않으며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11.28) 상태를 향유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놓여있다. 인류에게도 분열과 증오와 악을 극복하는 최후의 승리와 완전한 평화”(1. 서문)가 약속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교부가 바라보는 인류사는 창조, 타락, 약속, 구원, 그리고 최후 종장으로 엮어진 5막의 대서사시에 해당한다. 그리고 각각의 막()은 인류의 역사와 지성을 부단히 번뇌케 한 철학적 주제를 안고 있는데, 시원(始原)의 문제, 암울하고 고민스러운 ()의 문제, 극적이고도 유혈이 낭자한 선과 악의 투쟁의 문제, 그리고 역사의 도정에서 온갖 염세론과 숙명론을 이기게 격려하는, 악에 대한 선의 승리, 그리고 그토록 아름답고도 그토록 두려운 역사의 종말 문제가 그것이다. 인류의 인생철학과 역사철학을 주도해온 사상가들이 사유를 기울여온 이 난제들에 대해서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답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이라는 두 기둥을 세워 해답을 시도한다.

 

그의 답변에 의하면, 우주와 인류의 시원에는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며 그분은 인류가 인생과 역사를 무난하게 이끌어갈만큼의 은총을 베풀고 있다. 인류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악의 기원에는 피조물(반역한 천사와 범죄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남용이 자리잡고 있다. 개인과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는 두 주역, 곧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구체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두 가지 사랑, 이기적 자기사랑과 이타적 하느님 사랑으로 실현된다. 선악의 투쟁에서는 신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를 붙들어주면서 구원의 섭리가 역사를 이끌어가는데 인류는 신 앞에 그리스도라는 중개자를 두고 있으며 그의 중개로 역사와 인생이 조명을 받는다. 시간의 종점에서 이루어질 종말은 선인과 악인, 혹은 하느님 도성과 지성 도성의 최종적이고 외적인 분리를 초래할 것이며, 선인들에게 충만하고 상실할 수 없는 영원한 행복이 도래하고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비참이 도래하게 만든다.

역사의 종말에 완결된 하느님 도성은 "진리를 군주로, 사랑을 법도로, 영원을 척도로 두는 완전 사회이다."(Epistula 3.17 ad Marcellinum: cuius rex veritas, cuius lex caritas, cuius modus aeternitas.) "천상 도성에서는 진리가 승리자요 거룩함이 품위가 되고 평화가 행복이요 생명은 곧 영원"(ubi victoria veritas, ubi dignitas sanctitas, ubi pax felicitas, ubi vita aeternitas: (2.29.2)이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의 이 목표를 향해서 하느님 도성은 지상의 순례를 하고 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서에서 바로 그 도성을 묘사하고자 한다.

 

 

1. 인류사(人類史)는 곧 구세사(救世史)

 

단선적(單線的)이든 순환적(循環的)이든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인생도 불가해한 것이 되는 까닭에, 인류사의 주도적 지성들은 역사가 논리적 구조와 존재론적 일관성을 갖는다고, 역사라는 것이 개별적 집단적 인간 운명과 그 존엄성에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 역사를 인생과 인류의 스승”(키케로)으로 정의해 왔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통합한 그리스도교는 연대기를 새로 시작하였을 뿐더러(우리도 사용하는 서기(西紀)그리스도 이전”(B.C. =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후"(A.D. = Anno Domini)로 연대를 표기하고 있다.), 인류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을 조성하였다. 유일한 하느님에게서 기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최후의 결말을 맺을 단선적이고 보편적인 인류사(人類史)가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부각시킴으로서 인간은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하느님과 더불어 자기와 소속집단의 운명을 건설하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작업은, 역사를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면서) 인간이 건설하는 자유의 산물로 의식하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역사의 유한성과 퇴락성도 강조하기에 이른다. 구세사(救世史)”라고 불리게 될 이 역사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창조와 진화, 시험과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역사가 되었다.

 

1.1. 하느님과 인간의 의지가 엮어가는 합목적적 역사

 

서기 410년에 있었던 비시고트족 알라릭의 로마 점령과 약탈은 로마 제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이 사건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해명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당대 그리스도교 최고지성이던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신국론을 써서, 그리스도인들이 조상전래의 신들을 저버린 데 대한 천벌로 그 재앙과 파국이 닥쳤다고 우기던 이교도들의 공격을 반박하는 동시에, 서기 410년에 이탈리아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인류사(人類史)라는 거대한 지평에서 바라보도록 당대의 지성인들을 초대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우선 세계는 저절로 존재하는 영원한 무엇이 아니고 하느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피조물(esse creatum)이었으며, 따라서 역사는 부족한 데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창조이자 구원이요,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부여하는 사명(使命)이 되었다.

 

그 책에서 그가 역사를 여섯 시대로 구분하는 일은 그냥 흥미의 대상이지만, 인류사를 두 개의 도성(도시국가)이 이루는 역사로 구분한 일이라든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을, 운명과 우연한 세력 대신에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과 개인적 집단적 이타심이라는 "두 가지 사랑", 또는 사사로운 사랑사회적 사랑으로 제시함으로써 윤리와 역사를 연관시킨 것은 독자적인 역사철학이었다.

 

교부의 다른 설명은 인류의 교육(敎育)으로서의 역사. 역사는 인류에 대한 구세사이기에 하느님의 예정과 은총을 통하여 인간의 개선과 구원을 이끌어내는 계도(啓導) 과정이며, 하느님의 주역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어떻게 개인과 민족들의 운명을 좌우하는지 보여주면서 역사의 전 과정을 거쳐 하느님의 도성이 건설되는 양상을 또한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본서의 스물 두 권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서 인류에게 해명하는 바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이 교육학이다.

 

1.2. 시간의 연속성과 우유성이 역사를 구성한다

 

역사는 인간으로부터(본서에서는 천사들의 등장으로부터), 창조설화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한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공간에 존재하는 구체 인간과 그 집단이 행하는 구체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 시간에 대한 의식(意識) 내지 연속의 시간을 착안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이며(그의고백록후편), 그가 강조한 대로, 역사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꼽는다면 시간의 연속성(連續性)과 우유성(偶有性)이라고 하겠다.

 

인간 각자가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한 인간의 개인사(個人史)가 대두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 이를 술회하고 있다. 인류가 자기 과거의 현존과 자기 미래에 대한 예기 속에서 전체 인류의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인류사(人類史)가 대두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신국론에 담았다.

 

1.3. 범죄(犯罪)와 구속(救贖)의 드라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류를 마치 한 사람처럼 세웠다. 개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사랑의 변증법이 인류 사회의 역사도 지배한다. 결국 인류는 집단적 이기심(利己心)과 위타심(爲他心)으로 해서 둘로 갈라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철학이 끼친 영향을 꼽는다면, 그가 인간 실존의 역사적 차원을 부각시킨 점을 첫째로 꼽을 수 있겠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면서도 자신의 오만에 끌려가는 처절한 어떤 중력(重力)이 있다. 결코 반복되지 않는 인간, 결코 두 번 나타나지 않는 인생의 유일회성, 즉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실존적 차원에서 본다면, 각각의 순간, 각각의 행위, 각각의 오류는 한 인간의 역사(개인 구원)에는 물론이려니와 서로 유대하고 있는 한 민족 전체,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 결정적이다! 그래서 개인과 집단의 모든 결단은, 특히 그것이 그릇된 결단일 때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용서받지 않는 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전 인류에게 원죄를 물려주고, 나자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전 인류에게 구원을 준다는 해설이 대표적인 해설이다.

 

그래서 시간의 문제와 함께 자유(自由)의 문제는 역사의 불가분한 요소.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투쟁, 범죄(犯罪)와 구속(救贖)의 드라마, 범죄할 능력을 갖춘 의지와 은총 사이의 드라마가 이 자유를 축으로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해법은 윤리적 집단적 악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죄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철학이 고심한 악의 발원을 인간의 의지에 설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설로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악(개인의 윤리악,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사회악)의 청산이 이론상으로 가능해졌다. 세계가 선악이원론으로 설명되거나 물질이 악이라고 단정된다면 악의 청산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2. 신국론에 묘사되는 하느님의 도성지상의 도성

 

고중세 서구사상에서 정치와 국가존립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에서 유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인류에게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이라는 점보다 철저한 특성이 또 없다."(12.28).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타인들과 더불어 사회(社會)와 평화(平和)를 맺으려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얻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19.12) 오로지 이기적인 적자생존의 본능에서 인간들이 사회와 국가를 협약하는 것으로 개념되던 국가관에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얻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는 새로운 개념이 첨가된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이 사회성은 원죄로도 말소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려니와 가정, 국가, 그리고 세계라는 세 차원에서 엄연하게 실존하는 현상이다(19.7).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류의 단일한 역사를 상정하는 토대로 인간 사회의 보편적 차원을 제공한 것은 서구의 스토아 철학과 성서였다. 성서에 의하면, 인류가 한 창조주에게서 기원한 한 조상에서 유래하는데 그 점이 교부에게는 하느님이 인류가 "자연본성의 유사성에 의해서만 아니라 혈연에 의해서"(12.22) 하나 되기 바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혈연의 애정이 "평화의 사슬로 묶이는 합심하는 일치"(14.1)에로 모든 인간들을 이끌어 가정과 부족, 국가와 국제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교리는 하느님의 통치가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들 가운데미친다는 의식으로, 만인이 하느님의 자녀요 평화로이 공존할 형제들임을 대중에게 설득할 만한 토대가 된다.

 

2.1. "국가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이고 국민의 것(res populi)"

 

신국론에 나오는 국가의 개념은 제19(21-24)에서 하느님 도성과 공화국(res publica)의 관계를 논하면서 제기되는데 우리가 유념할 만한 점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정의에 따라서 국가 또는 공화국(res publica)을 어원 그대로 "공공의 사물"(그 반대 되는 res privata는 가문(家門)과 씨족(氏族) 영역을 가리켰다.)이라고 정의하면서 공공의 사물”(res publica)은 곧 국민의 사물”(res populi)이라고 단언한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사상은 로마인들에게 일찌감치 친숙하였다. 그리고 키케로에게 있어서 정의(正義)는 단순히 정치 생활의 규범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의 구성적 요소였듯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악을 해소하는 처방도 정의요 최고의 정의(正義) 없이는 공화국이 통치될 수 없다.”(2.21)고 단언하였다.

 

국민이라는 것은 키케로에 의해서 "온갖 종류의 모임이나 군중이 아니라, [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연합된 결사체"(2.21)라고 정의된다. 또 음악의 화음처럼 사회 정치 생활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일치와 합심을 도모하며 공화국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정의다. 정의의 약화는 그러한 일치단결이 사라지게 하고 그러한 국가는 더 이상 공화국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2.21). 정치는 정의(正義)에 본질이 있다. "정의를 결여한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문구(4.4), 키케로의 정의에 들어가는 국민의 개념, 곧 법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가 강도 집단에서도 통한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눈에는 당대에 알려진 세계를 전부를 지배하고 정복한 로마의 제국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2.2. "국민이란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합의하여 뭉친 사람들"

 

교부의 국가 개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고전적인 개념대로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줌”(suum cuique tribuere)이 정의라면, 인류가 자기 창조주 하느님에게 맞갖은 몫을 돌려드리고 하느님에게 순종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본 정의가 인간 세계에서 수립되어 있지 않다면 지상에 정의로운 공화국도 정의로운 국민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그는 정의를 일컬어 "인류의 진정한 공동선인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랑, 그리하여 인간에게 복속되는 다른 모든 것을 잘 통치하는 일"이라고 하였고,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정의."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참다운 정의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결국 하느님 도성 뿐, "그리스도가 창건자요 통치자가 되는 그 공화국에서뿐”(2.21)이며 국가의 정치는 그 본연의 사명을 결코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정의의 개념을 사랑의 개념으로 전환함으로써 그가 내리는 국민의 개념도 그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새로 보완한 정의(定義)에 의하면 국민이란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한데 뭉친 이성적 존재들"(19.24)이다. 법정의(法正義)에 대한 공통된 인식(iuris consensus) 대신에 사랑할 대상에 대한 합의(concors dilectio)가 국기(國基)를 이룬다. "두 사랑이 있어 두 도성을 이룬다."(14.28)는 핵심 주제가 여기서 나온다.

 

 

3. “지상의 평화가 천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

 

이처럼 국가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신국론에서 두 도성의 기원을 논하면서 보이는 그의 국가관은 퍽 비관적이다. 최초의 지상 도성 또는 지상 국가는 형제살인자 카인에 의해서였고 아벨은 "뜨네기 마냥 도성을 세우지 않았고 세상에서는 순례자요 하느님 도성에 속하는 사람"(15.1)이고 카인은 "인간 도성에 속하는 사람"(15.1)이라면서 암울한 정치의 시원이 카인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치와 국가는 정상적인 인간 생활이면서도 인류가 누적해 온 개인적 집단적 죄악의 상처와 흉계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므로 국가는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이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과 본성의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역사의 도정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은 한데 섞여있고 혼합되어 있으며 실제로는 단일한 인류가 지상의 나라에서 하느님의 나라로(아마도 역사의 도정 전체를 거쳐서만) 서서히 옮겨가는 도정처럼 해설한다.

또 현세에서 인간의 자연생활을 보장하는 그 나름의 평화라도 보장하는데 국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고 따라서 국가는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공통된 사회조직(19.26)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국가와 평화를 멸시하지 말고, "천상 도성도 순례 중에 있는 동안에는 지상 평화를 이용하며 지상 평화가 천상 평화에 이바지하게 한다"(19.17). 그리고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정치가 완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지만 신앙인은 정치가들과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빌론의 지상 평화라도 보전되도록 힘써야만 한다(19.26).

 

3.1. “은총에 의한 정치의 구원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를 예찬하거나 정치철학을 수립한 사람도 아니었으나 그의 주저인 신국론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 국가의 개념, 그리고 국민의 정의로운 공존을 논하는 평화 사상 등이 두드러진다.

 

신국론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사상을 간추린다면 은총에 의한 정치의 구원을 그가 일관되게 암시하고 있으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국가 사회라는 것을 떠나서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으나 인간의 초역사적 여정으로 미루어, 정치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결핍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비록 현세적이고 지상적이지만 공동선에 대한 사랑이 국가를 이루고, 그 성원들 간의 정의롭고 질서 잡힌 평화와 제도적인 통일이 정치가 존재하는 조건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지상적 공동선의 추구가 국가를 존재케 하는 조건인데 그 공동선이 유한하므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내부로든 대외적으로든 불화와 투쟁을 내포한다.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에서 정치에 몸소 깊이 간여해 본 경험에 비추어 정치만으로는 또 자율적으로는 개인과 인류가 희구하는 최고선을 실현하는 환경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나 역사를 초월하는 하느님 도성을 바라보고 거기에 비추어 국가의 존재의의와 정의구현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인류의 시선을 열어주려고 신국론을 집필하였다.

 

3.2. “평화는 정의의 열매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논제 가운데 하나인 평화가 신국론에서는 제 19권 거의 전권이 할당되어 논의되고 있다. 그의 평화 사상은 정치라는 배경을 초월하는 주제이며 평화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도성에서다. 그곳에서야말로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을 향유하며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19.17) 경지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과 모순이 전혀 없는 이 완전한 평화,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의미의 평화를 위시해서 지상에서 가능한 모든 평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 실존은 우애와 가정, 사회생활과 국제관계를 막론하고 부단히 불안정과 대결, 충돌과 갈등에 휩싸이고 있다(19.5-9). 그런데 이 절박한 인간조건이 일깨우는 근본 이념이 하나 있으니 그 모든 갈등이 실상은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미로운 평화는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다"(dulcedo pacis... omnibus cara est: 19.11). 가장 치열한 갈등 속에서도 인간이 은밀히 동경하는 바는 다름 아닌 평화이다.

만민이 평화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것 말고도 존재론적 토대에서 평화를 논구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존재론적 구조 속에 새겨진 평화를 지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는 존재의 구성요소요 생명의 필수적 조건이다(19.13-14). 영과 육, 인간, 가족, 사회와 국가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 사이의 평화와 조화에 의해서 존재하고 그 자체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만유의 평화는 평온한 질서에 있다"(pax omnium rerum est tranquilitas ordinis: 19.13). 각 사물이 그 구조면에서 평온한 질서가 이루어질 때, 구성된 부분들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거기 평화가 있다. 그리고 "질서는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는 것들을 각각 그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다"(19.13). .

국민과 평화의 개념을 종합한다면 공동선에 관한 합심된 사랑이 부분적이고 상대적이나마 지상에 내부적 평화를 생성하고 그것 없이는 정치가 생겨나지도 지속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평화는 결코 총체적(절대적이고 보편적) 평화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평화가 시간적(잠시적)일 뿐더러 합의하는 공동선이 지상적인 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여하한 정치 공동체도 참다운 평화를 구현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더없이 심원한 존재론적 갈망을 온전히 채워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인간을 단결시키는 바로 그 대상이 자체의 본질로 말미암아 인간을 내외적으로 분열시키게 마련이다. 권력은 그 속성상 분배될 수 없다. 따라서 경쟁과 갈등을 본질로 한다!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공동선에 대한 합의된 사랑으로 한데 단결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로 인해서 지구를 덮고 있는 인류 보편 사회(societas mortalium)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있는 형태를 띠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신에게 창조된 단일한 조상으로 유래하는 집단으로 보고, 단일한 본성의 유대로 한데 묶인 무리(18.2)로 간주하여 신의 부성으로부터 인류의 사해동포애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보편성이 그만큼 많은 정치적 위험을 안고 있다. 영토의 통일된 지배를 염원하는, 인간들의 타고난 열망에 곧 분열의 원천이 자리잡고 있다. 전쟁치고 당사자들의 단결을 초래하지 않는 전쟁, 평화를 명분으로 삼거나 희구하지 않는 전쟁이 없듯이, 지상의 평화치고 전쟁의 씨앗을 배태하지 않은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국론에 개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는 정치가 그 자체만으로는 정치가 본래 지향하는 평화로운 일치를 도모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치인의 도덕적 성향에 관한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결론이라기보다는 정치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는 단죄받은 자들의 신비로운 도성을 특징짓는 무엇이자 경험상으로도 죄악의 신비(mysterium iniquitais)를 확인시키는 무엇으로 등장한다. 바빌론도 로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눈에는 그것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바 없고 지상 도성에 관한 고찰이 자꾸만 정치 국가에 대한 언급으로 옮겨가는 것도 생소한 바가 아니다.

그래도 원칙에서는 분명하다. 첫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국가가 곧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은 아니다. 국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사회성의 발로이기 때문이고 가족 사회의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이기 때문이다. "도회에 시민들의 여러 집안들이 있듯이, 전세계에 국민들의 여러 왕국들이 존재함"(4.15)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둘째, 현세에도 하느님의 배려로 나름대로의 선익이 존재하므로 인간의 자연생활을 보장하는 그나마의 상대적 평화라도 보장하는 국가는 결코 없어서는 안되고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국가는 공통된 사회조직(19.26)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정치와 그 평화를 멸시하지 말고, 본인은 비록 천상도성을 지향하며 이 세상에 나그네 또는 순례자로서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지상의 평화를 향유해야 마땅하다. "천상 도성도 순례 중에 있는 동안 지상 평화를 이용하며... 지상 평화가 천상 평화에 이바지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정치가 완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므로 제거될 수는 없으나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 정치의 고유한 수단 방법만을 갖고서는 완전한 치유책이 또한 없다. 정치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들의 부단한 정화와 회심에 의해서만 정치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들이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회심은 "우리의 모든 정의가 향하여 유지되는 목표"(19.27)를 염두에 두고서 행동하게 만들며, 그렇게 되려면 이미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 변모되는 전환을 거쳐서, 천상 도성에서나 만끽할 수 있는 평화로운 행복을 희구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인 시민이든 그리스도인 황제든 하느님 도성을 향하는 순례 중에 이처럼 온전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내심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요 은총이 역사에 미치고 있다는 표시이다.

 

3.3. 두 도성의 판가름: “사회적 사랑사사로운 사랑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과 지상국의 소속 여부를 가리는 저 유명한 사랑의 구분을 제시한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14.28). 이 도식은 다음과 같이 한결 더 구체화한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De Genesi ad litteram 11.15.20)

 

[결어]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새 천년을 맞아 인류와 민족의 미래를 담보하는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는 우리와 매우 흡사한 시대를 살았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몰락은 지금 서구 문명의 몰락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위기감, 한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시들어 가는 백합에서 나는, 구역질나는 냄새를 그도 맡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붕괴되어 가는 한 제국과 문화의 폐허에서, 나자렛 사람의 영감으로부터 퍼져가는 새로운 문명, ‘사랑의 문명'(civilitas amoris)의 도래를 내다보고 있었으며, 인간과 그 존엄성이 제도와 종교와 정치를 평가하는 궁극 척도로 부상하는 21세기의 우리 사회에도 그는 여전히 강렬한 사상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