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 읽기 제11,12,13권]
(경향잡지 2017년 12월)
아우구스티노의 우주찬가
‘인간은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많이 읽혀온 「고백록」의 전반부(제1~10권)는 자기 생애 전반을 회상하면서 “고백실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2,9,17)였다면, 이 책의 후반부(11~13권)는 스티븐 호킹스 박사가 20세기에 계산해낸, 지름 150억 광년의 크기를 가진 우주 한 곳에다 “당신께서는 저를 지으셨고” 그 광활한 공간에서도 “저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음”(13,1,1)을 두고, “주님은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시다”(11,1,1)라고 외치는 ‘우주찬가(宇宙讚歌)’다.
그래서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1,1,1) 「고백록」 제11권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1)는 구절의 절반 곧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놓고, “어떻게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는지 듣고 싶고 또 알아듣고 싶습니다. 모세에게 이것을 말로 하라고 시키신 만큼 내게도 이 말을 알아들으라고 해 주십시오."(11,3,5)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제12권에서는 저 구절의 나머지 절반,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성찰한다. 제13권은 「창세기」 첫 대목(1,1-2,4)을 주교가 신자들과 함께 읽어 내려가는 ‘영적 독서’라고 하겠다.
철학적 성찰에 가까운 제11권에서는 ‘태초에(in principio)’가 시간의 시초라기보다 존재의 시원을 가리킨다고, ‘하느님의 말씀 곧 성자 안에서(in Verbo tuo)’라는 뜻으로 알아듣자고 제안한다.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한 실체로 계시는 말씀이 “태초이시니 우리가 방랑하다가 돌아갈 적에는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태초이시고 이 태초에서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11,8,10-9,11)
제12권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caelum et terra)’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느냐 묻고서 ‘하늘’은 천사라는 영적 피조물을 의미하고, ‘땅’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제일질료(第一質料)’라고 부르던 것이며 이것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역설한다. 또 제13권에서 표명하듯이, 교부의 창조신학은 응당 삼위일체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보십시오, 저의 하느님, 여기서 삼위일체이신 당신께서 어렴풋이 제게 나타나십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희 지혜이신 분의 ‘태초’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께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13,5,6)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뭘 하고 계셨다더냐?’
「창세기」에 따라 인간을 '피조물'(esse creatum)로 규정하고 그리스도교 ‘창조신학’을 완성한 교부가 아우구스티노다. 이 책 말고도 「마니교 반박 창세기 해설」(388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 미완성작품」(393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401년)을 집필하였다. “보십시오, 하늘과 땅이 있고, 자기들은 만들어졌다고 외칩니다. 하늘과 땅은 자기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음도 외칩니다. ‘우리가 존재함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는 우리가 없었으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된다.’”(11.4.6) 이교도들이 주장하듯, 세상은 일자(一者)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된 무엇도 아니고, 타락한 물질이 응결(凝結)되어 던져진 우연도 아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는 합의하에 당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만들어 하나뿐인 지구에 고이 갖다놓으신 조물이다.
하지만 창조론에는 갖가지 시비가 따라붙게 마련. “어떻게 창조하셨느냐?”는 물음에는 “말씀으로!” 라고 답한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떻게 만드십니까? 하느님, 하늘과 땅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고 당신 말씀으로 그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11,5,7) “뭘 갖고 만드셨느냐?”고 힐문하면 ‘그냥 말씀만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당신께서 생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 생겨납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말씀을 하시면서 만드십니다.”(11,7,9)
“그래도 뭔가 재료가 있었을 게 아니냐?”고 따지면 “아무것도 없이, 다시 말해서 무(無)로부터(ex nihilo)”라고 대답한다. 창조주만큼 영원히 존재하던 재료(물질)로 세상을 빚어 만들었으리라는 이원론을 배척한다. “당신께서는 무엇을 만드셨는데 무로부터 만드셨습니다. 당신 외에 무엇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저것들을 만드실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셨고, 다른 것은 무였으니, 그 무로부터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12,7,7)
그럼 “뭣 땜에 만드셨느냐?”는 장난기에는, 뭔가 아쉬워서 아니라 하느님이 착하셔서 만드셨다는 답이 나온다. “당신에게는 당신께서 선(善)이신데, 저런 것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든, 또는 무형한 것으로 남아 있든, 당신의 선에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여 그것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신 충만한 선하심에서 만드신 터에 말입니다.”(13,4,5)
“세상을 언제 만드셨느냐?”는 물음에는 못된 저변이 깔려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더냐? 피조물을 조성할 의지, 전에는 한 번도 조성한 일이 없는 것을 조성할 새로운 의지라는 것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하느님이 영원하시다는 말인가? 하느님의 의지는 그분의 본체에 속할 테고 그 본체에 전에 없던 무엇이 발생하였다면, 정말로 그 본체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만일 피조물이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의지가 영원하다면 피조물 또한 왜 영원하지 않다는 말인가?”(11,10,12)
여기서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난해한 시간론(時間論)이 나오는데 그런 공부는 철학도들에게 넘길 만하다. 요컨대, 시간은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었고, 피조물이 있기 ‘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뭐하고 계셨더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느님, 당신께서 모든 세기의 제작자요 조물주이신데, 당신께서 모든 시간의 작동자이신데, 시간 그 자체도 당신께서 만드셨고... 따라서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였는데... 당신께서 그때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말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그때는’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12,13,15) 시간 자체가 하느님께 창조되었고 시간은 유한한 사물이 갖는 존재론적 차원(次元)이다, 그것도 인간의 의식(意識)에서만 감지되는!
‘해넘이가 없는 안식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마지막 제13권에서 ‘6일 창조’의 피조물들이 영성생활에 어떻게 해당하는지 풀이하면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도, 천사와 영혼에도, 모든 미물에게도 실존의 중심(重心)은 저 ‘심연의 물 위를 감돌던’ 하느님의 영 곧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선한 의지가 저희를 그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니 그곳에 영원히 머무는 일 외에 저희가 바라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13,9,10)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듯이, 시간도 영원의 한 조각이듯이, “당신을 찬미하여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하기”(1,1,1) 마련이므로, 각자가 올리는 ‘찬미의 고백’은 ‘하느님의 오늘’ 곧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는 안식일’이라야 끝을 본다. “당신께서 지금 저희 안에서 일하시듯, 그때도 당신께서 저희 안에서 쉬실 것입니다. 저 일들이 저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당신의 것이듯이, 저 때는 그 안식이 저희를 통해서 이뤄지는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나 일하시고 언제나 쉬십니다.”(13,37,52)
그러니까 ‘자아’와 ‘하느님’이라는 두 과녁을 두고 일평생 탐구하던 교부, 죽음의 침상에서 “멍청하게도 나는 다 알아듣고 싶었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아우구스티노가 저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깨달았음직한 바가 「고백록」 마지막 장(13,38,53)에 기술되어 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저희가 보는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당신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합니다. 또 저희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밖으로 보고 그것들이 좋기 때문에 안으로 봅니다. 그 대신 당신께서는 그것들이 만들어져야 하리라고 보시자마자 바로 만들어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어느 인간이 이런 깨달음을 인간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천사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인간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