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읽기 제5권]
(경향잡지 2017년 6월)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오리라"
'엄지공주' 하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하느님이 만드신 하와는 키가 얼마쯤 되었을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제기한 우스개다(De peccatorum meritis... 1.38.68). 길어야 십 몇 센티였을 갈비뼈로는 기껏 '엄지공주'나 나왔을 법한데, 하느님이 얼마나 솜씨를 부리셨기에 아담이 "아, 드디어 나타났다!"고 하와를 얼싸안으면서 하느님께 '엄지척!'을 했을까?
비슷한 우스개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천상에 자문회의가 열렸단다. 진흙으로 손수 빚으신 사람에게 콧김을 불어넣으시면서 당신들에게 있는 자유의지를 나눠줄 것인가 물으시자 천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더란다. "그놈들은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써먹을 것입니다."(괴테, 「파우스트」, 서곡) 천사들의 극구만류에도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은 자신만만하셨는지 아우구스티노에게도,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오리라. 내가 데려오리라. 거기서 내가 안고 오리라!"(고백록 6.16.26) 하시더란다.
그래선지 그가 하느님께 드리는 말투는 좀 외람되게까지 들린다. "도망쳤습니다. 지켜보시는 당신을 안 보겠다고 도망쳤고, 스스로 눈멀어 당신께 거역하겠다고 도망쳤습니다.... 악인들이 불안하면 떠나가고 당신께로부터 도망치게 놓아두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피해 달아났을 적에 과연 어디로 달아났습니까?"(5.2.2)
"당신의 열기 앞에서 숨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5권은 "내 하느님 면전에서 내 나이 스물아홉 살이던 그 해를 두고" 아뢰는 말씀이다. '모든 만남은 모험'이라지만, 아우구스티노의 두 만남, 카르타고에서 마니교 성직자 파우스투스 주교와의 만남(383년)과 이태 후 밀라노에서 가톨릭 주교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이 전후반에 그려져 있다. 그 만남을 거쳐서 주님 앞으로 끌려오던 행로를 더듬으면서 은총 앞에서 사람이 저항해 본들 소용없다던 자포자기가 퍽 솔직하기까지 하다."닫힌 마음이라고 당신 눈이 꿰뚫어 보지 못할 리 없고, 인간들의 완고함도 당신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불쌍히 여기시든 벌을 내리시든 반드시 그 완고함을 풀어버리시며, 당신의 열기 앞에서 숨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5.1.1)
두뇌가 명석한데다 많은 지식인들을 손쉽게 끌어들이던 아우구스티노더러 제발 마니교 '간선자' 반열로 오르라고 거듭 요청하는데도 마니가 남겼다는 몇몇 교리의 떨떠름한 구석들 때문에 망설이던 그에게, 신도들은 고명하신 파우스투스 주교님만 오면 모든 의혹이 구름처럼 걷히리라 며 소매를 붙들었다. 과연 그가 카르타고에 왔다.
첫눈에는 "토론을 벌이는 그자의 동작과 열정에 맛을 들이고, 기막히게 어울리고 유창한 어휘에 반했지만"(5.6.11) "악마의 커다란 올가미로서 많은 사람들이 감언이설로 인해서 그 올가미에 걸려들고 있음"(5.3.3)을 간파했다.
파우스투스의 호탕한 성격, 자기 무식을 솔직히 인정하고서 도리어 아우구스티노에게 자유학예를 배우는 겸허함에는 끌렸지만,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과일이나 배추 속을 먹어주면 식물에 갇힌 '빛의 조각' 혹은 '신의 조각'들이 해방된다는 믿음 따위로 음식이나 가려먹고 온갖 금기를 내세우며 개인의 해탈이나 찾는 '사사로운' 종교심이 환멸감을 주었다.
아무튼 "어떻든 마니의 서한들을 연구하던 공부도 꺾였고 그 종파에 정진하겠다고 마음먹어 왔던 내 모든 노력이, 그 사람을 알고 나서부터는, 모조리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다수 인간들에게 죽음의 올가미가 되어 왔던 파우스투스라는 인물이, 내가 그 동안 사로잡혀 있던 내 올가미를 점차 느슨하게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5.7.13) 그로부터 10여년 뒤(391년) 가톨릭 사제가 된 교부는 「파우스투스 반박」을 비롯 무려 아홉 권의 마니교 반박서를 집필하여 서로마제국에 퍼지던 이 영지주의를 아예 뿌리 뽑다 시피 한다.
'아카데미아학파가 풍랑 한가운데서 내 배의 키를 붙들어 주었다'
파우스투스에게 절망하고서도 마니교에서 아주 떨어져 나가겠다는 마음은 못 먹었다."이미 몸담은 곳보다 더 나은 곳을 찾아내지 못하는 마당에, 정말 더 낫다고 택할 만한 무엇이 밝히 드러나지 않는 한, 그냥 그대로 눌러앉는 것으로 만족하겠다"(5.7.13)는 '양다리 걸치기'였다. 로마에 학원을 차리라면서 카르타고를 탈출하게 돕고, 희망의 땅 로마에서 중병이 들어 저승 문턱까지 간 그를 병간해주고 거둬주고, 급기야는 밀라노 황실교수직까지 알선해 준 마니교와 굳이 손을 끊을 필요가 없었다. 교부는 훗날에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8.7.17)라는 문구로 당시의 심경을 자백한다.
그러한 지적 기만은 자기 인간성에도 회의를 품게 만들고, 사상적으로도 '인간이 과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뜨린다. "그 무렵 아카데미아 학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나머지 철학자들보다 더 현명한 철학자였다는 생각이 내게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두고 의심해야 한다고 간주하였고 인간에 의해서 여하한 진리도 파악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5.10.19) 당시의 정신적 고뇌는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명제로 정리되었고, 개심 직후 집필한 여덟 편의 '철학적 대화편'에서도 첫 작품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성염 역주, 분도 2016)으로 간행된다.
당대 제국 최고의 웅변가요 정치가이던 로마시장 심마쿠스(340-402)가 마니교도이자 회의론자인 아우구스티노를 황실에 수사학교수로 추천한 데는(384년) 저의가 있었다. 자기 정적 암브로시우스(340-397)가 가톨릭 주교로서 장악하고 있던 밀라노에서 조상전래의 종교를 복원하려던 운동에 젊은 웅변가의 머리와 언변이 쓸모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여하튼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아프리카 출신의 수사학자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아우구스티노는 호기심에 틈틈이 주교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 "그의 언변이 과연 자기 명성에 걸맞은 것인지 아니면 세평에 오르던 것보다 더하거나 덜 유창한지 한번 가늠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내용에는 흥미를 두지 않고 되레 경멸하는 태도로 임하였으며, 연설의 맛만 즐기고 있었습니다."(5.13.23)
그러다 심경에 변화가 온다.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서 참이 아니고, 입술에서 나오는 신호가 다듬어지지 않고 소리 난다고 해서 거짓이 아님을 배워갔고"(5.6.10) "그가 유창하게 말하던 것을 받아들이기로 내가 마음을 열기에 이르자 그가 진실하게 말하던 내용도 똑같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5.14.24) "당신께서는 당신 섭리의 은근한 비밀로 나를 움직이고 계셨고 정직하지 못한 내 오류를 내 눈 앞으로 벌써 돌려놓으심으로써 내가 보고서 미워하게 만드셨습니다."(5.6.11)
당초엔 "내게는 가톨릭이 패했다고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직 승자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5.14.24)던 유보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방식을 따라, 만사를 의심하고 만사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마니교도들을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마침내 "당분간 부모가 나에게 당부했던 가톨릭교회에서 예비신자로 있기로 작정하는"(5.14.25) 지경에 이른다. 그런 결심에 이르기까지 자식을 위해 낮이고 밤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하느님의 자비를 마치 하느님이 발부하신 채무증서나 되듯이 늘 하느님께 꺼내보이는' 어머니의 '몰염치한'(?) 기도 덕분임을 모르지 않는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4)는 말씀대로, 개인이든 전 인류든 구원의 역사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되만드시는 당신의 손길"(5.7.13) 곧 '생산자 책임'을 절감하시는 창조주의 '리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은총의 박사'다운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