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백록읽기 제3권]
(경향잡지 2017년 4월)
“아! 진리여,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저는 카르타고로 왔고 거기서는 죄스러운 애욕의 냄비가 사방에서 저를 달구고 튀겼습니다. 아직 사랑하지 못하던 터여서 그냥 사랑하기를 사랑할 뿐이었으며 영문 모를 허전함 때문에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면서 사랑할 만한 꺼리를 찾아 헤맸습니다.”(고백록 3.1.1)
철학사에서 누구보다 ‘마음의 논리’를 따라서 살았고, 그래서 현대의 실존철학의 원조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 그가 카르타고 극장의 연극에 몰입하고 특히나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심취하던 대목에서 「고백록」의 독자들은 알아본다, 호머의 주인공 율리시즈처럼, 베르길리우스의 주인공 아이네아스처럼, ‘운명이 지워준 소명’을 향해, 부단히 아른거리는 ‘절대지평’을 향해 부단히 방황하고 난파하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한 지성인의 눈길을!
궁극적인 것, 불변하는 진리,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는’ 안식(13.36.51)을 찾아가는
여로에서 그는 머물던 땅(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도, 사랑하던 여인들도, 수사학 대가와 황실 교수직이라는 출세가도도, 자기가 섭렵한 당대의 온갖 사상(마니교와 점성술, 아카데미아 회의론과 플라톤철학)도 뒤로 하고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방랑자였다.
「고백록」: 진리에 바치는 연가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제국을 이룬 두 민족 아테네인과 로마인은 취향이 퍽 달랐다. 예를 하나 들자면 두 도시 다 흥행을 좋아하여 해마다 5월이면 예선을 거친 작품으로 연극제를 열었는데 수상작가의 작품들을 4부연작으로 상연했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은 비극 작품 셋과 맛보기로 희극 하나를 공연했고 로마인들은 비극을 감당 못해 비극 한 편과 희극 세 편을 상연했다.
워낙 실용적이고 구상적이던 로마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난해한 형식논리와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을 아예 이해 못했고 ‘인생철학’에 해당하는 스토아에 겨우 호감을 보였다. 그들에게 언어란 ‘웅변’, 철학이란 ‘삶의 예술’(키케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열아홉 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혼자서 독해하던 로마인이 ‘철학하며 살자!’는 요지로 쓴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읽고서 야심찬 삶의 진로를 ‘진리 탐구’로 아예 바꿔버렸으니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다. 철학사는 후대에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일컫는 ‘헬레니즘’과 유다 그리스도교의 ‘헤브라이즘’을 서구문명으로 한데 합류시킨 양수리(兩水里)로 그를 평가한다.
“키케로라는 사람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이 제 성정을 아주 바꾸어 놓았고 제 소원과 열망을 딴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때까지 품어왔던 저의 헛된 희망은 어느덧 모조리 시들해졌고 저의 마음은 이제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는 욕구로 믿기지 않을 만큼 헐떡이기 시작했습니다.”(3.4.7)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삼위일체론 15.8)고 단정했다.
성경을 제외하고 「고백록」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 오는 까닭은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이 이 책에 담겨 있어서다. 「참된 종교」(성염 역주, 분도 1988)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인답게 강변한다, 철학은 자기 삶을 전부 내거는 무엇, 곧 ‘참된 종교’여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철학은 지성의 유희요 호기심에 불과하다고! 우리말로 처음 소개된 아우구스티누스 전기 소설이 「구원(久遠)에의 불꽃」(조철웅 역, 가톨릭출판사, 1965)이었듯이 그의 철학함은 시뻘건 혓바닥을 넘실거리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보는 형광등의 밝고도 차가운 빛이 아니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저 사람들이 당신을 외칠 적에, 그렇게도 흔하게 그렇게도 다채롭게 당신을 소리 내어 드러낼 때에 제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당신을 속으로 사무치게 그리워했습니까!”(3.6.10)라면서 진리를 애당초 자기가 섬길 ‘하느님’으로 명명한다. “오, 영원한 진리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7.10.16)
그리고 오랜 사상적 방랑 후 서른 나이에 자기가 찾던 진리를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인격신에게서 발견하고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독백 1.1.5) 과연 이후 44년간 수도자, 성직자, 영성가,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는 남김없이 이 언약을 실천한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탄식이 있다. ‘진리의 연인’다운 철학적 유언이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10.27.38)
호리고 호리면서 속고 속이던 마니교도 시절
저토록 결연하게 진리를 찾아 일평생 헌신하겠다던 젊은이가 마니교에 빠지다니! “9년간의 세월, 곧 내 나이 열아홉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우리는 호리고 호리면서 갖가지 욕정에서 속고 속였습니다. 노골적으로는 자유학예라고 일컫는 학문들을 내세워, 남모르게는 종교라는 거짓 이름을 내세워, 저기서는 오만하고 여기서는 미신을 숭상하면서, 그리고 어디서든 허황하게 쏘다녔습니다.”(4.1.1)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토문학에서만 흔적을 남겼던 마니교는 20세기에 투르키스탄의 투르판과 이집트의 파윰에서 마니교 고문서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초대 그리스도교에 영지주의(靈知主義) 운동을 일으킨 ‘빛의 종교’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니교의 요체는 이원론(二元論)이다. 우주는 빛과 어둠, 선과 악 두 원리가 겨루는 투쟁의 대서사시로 묘사된다. 역사는 어쩌다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간 빛의 분자들을 해방시키는 구세사란다, 태초와 투쟁과 해방의 3막으로 된. 빛과 선의 세계에는 ‘위대한 아버지’와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영’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어둠의 세력과 싸움을 벌인단다. 빛의 원리는 ‘원초 인간’, ‘생명의 영’, ‘제3사절’을 차례로 우주에 파견하여 물질에 사로잡힌 빛의 분자들을 구출하고 해방한다니 신구약 성경에 익숙한 크리스도인들 귀에도 솔깃하였다.
일평생 자기가 저지르는 악의 탓을 누구에게 씌울까 고민하는 청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무릎을 치게 한 교리는 바로 이 선악이원론이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본성이며 그래서 탓이 나에게 없다.”(5.10.18)는 속임수였다!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폐쇄적 밀교의식이라는 의혹을 사 로마 제국에서 걸핏하면 추방령을 받는 집단이 교도들끼리 서로 돕던 끈끈한 유대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 들었다. 사실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학원을 옮길 적에 손을 써주었고, 로마에 가자마자 숙식을 마련하고 중병에 걸린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살핀 사람도 부유한 마니교도 콘스탄티우스였다. 더구나 로마 시장 심마쿠스에게 줄을 대 밀라노 황실 교수직을 얻을 때도 그들의 후원을 입었다. 그의 특출한 언변을 밑천으로 황실에 뛰어난 마니교도 한 명을 심어놓으려는 계책이었으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이 종교사상의 허구를 깨닫는 날, 유럽에서 마니교를 결정적으로 타파할 인물을 후원하고 있었던 셈이다.
카르타고에서였다. 아들이 마니교에 빠져들었을 뿐더러 명석한 두뇌와 지도력을 이용해서 많은 지인들까지 마니교로 끌어들이는 짓을 보고 그의 어머니가 어느 주교를 찾아가 애걸했다, 제발 아들을 설득해 달라고. 그러자 “나도 한때 그랬소. 댁의 아들도 잔뜩 들떠 상당수 풋내기들을 흔들어 놓고 있는 참이어서 아직 무엇을 배울 만한 사람이 아니오.”라더란다. 그래도 울며불며 매달리는 모니카에게 그 주교가 짜증을 내면서 던진 한 마디. “그만 가보시오. 그렇게나 많은 눈물바람을 받은 자식이 망할 리 없소!”(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