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복음]

                                                          (가톨릭마산 2015.8.23)

성체성사의 핵심(성체)


그래함 그린의 사물의 핵심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스코비는 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어느 항구도시의 경찰서장이다. 아내가 남아프리카연방으로 장기 휴가를 간 사이에 바람을 피운다. 상대방이 흑인여자여서 소문이 먼저 간다. 아내가 돌아와서 하는 말. “당신 소문 난 안 믿어요. 내일 아침 미사에 당신이 영성체 하면 난 모든 의심을 풀겠어요.” 부인을 안심시키려고 스코비는 영성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권총으로 자살한다(“그는 혓바닥에 그의 영원한 처벌을 선고하는 성체의 희미하고 종잇장과 같은 맛을 의식하였다”).


소설가는 가톨릭신자들이 성체성사의 핵심을 얼마나 놓치고 있는지 풍자하고 있다. 이런 얘기가 의아스럽거든 혼인미사 등에서 영성체 시간입니다.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분들만 나오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나, 남편이 어젯밤 거래처의 술자리에서 수상한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의심스러워 그의 영성체 여부를 지켜보는 여교우들의 도끼눈을 상상해 보시라!


가톨릭작가 그래함 그린이 교우들에게 암시하는 바는 이것: 영원하신 성자께서 마리아의 자궁을 거쳐 육화(肉化)하실 수 있었다면, 신앙인들의 공동체 전체가 사제와 더불어 기도하는 염력으로 왜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로 물화(物化)하실 수 없다는 말인가? 또 나자렛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로 거두어지셨다면, 인간이 땅을 가꾸어 얻고 서로 나누어먹는 빵과 포도주가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승화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한 문학가의 주제넘은 상상이 아니고 지난 618일 발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환경문제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신학이기도 하다(236). “사람이 되신 하느님 친히 당신 피조물에게 먹히시기에 이른다. 육화 신비의 절정에서 주님은 물질의 조각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이르고자 하셨다.” “성체성사는 우주적 사랑의 행위이다. 시골 성당의 작은 제대에서 거행될 적에도 성찬은 세계의 제단에서도 거행된다. 성찬의 빵에서 창조계는 신화(神化)를 향해서, 거룩한 혼인잔치를 향해서, 창조주와의 일치를 향해서 뻗어나간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인류만 아니라 온 우주를 하느님의 신비로 받아들이는 위대한 성사다. 따라서 지구상의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면, 우주만물의 공동주택인 환경세계를 망치면 인류, 특히 신앙인들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함께 멸망하리라는 엄중한 경고가 우리 교황님이 이번에 전 인류에게 펴신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