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마산 2013.9.8]


엄지공주 하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하느님이 만드신 하와는 키가 얼마쯤 되었을까? 이것은 필자의 요설이 아니고 위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제기한 질문이다(De peccatorum meritis 1,38,68). 길어야 10 몇 센티 넘을 갈비뼈로는 기껏 엄지공주가 나왔을 법한데, 하느님이 대체 얼마나 잘 빚으셨기에 아담이 좋아서 부르짖게만드셨을까? 똑같은 여체를 두고 쇼펜하우어는 키가 작고, 어깨가 좁고,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이 여자라는 족속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오직 성욕으로 말미암아 눈에 아지랑이가 낀 사나이들의 몰지각 때문이다.”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남자한테서 이야말로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환호를 받을 적의 하와의 키와, 같은 남자한테 “(저는 맘이 전혀 없었는데)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주기에 먹었습니다.” 라고 손가락질 당할 적의 하와의 키는 사뭇 달랐을 성 싶다. 사람(특히 젊은 여성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경탄 받거나 경멸받는 만큼 자라거나 쫄아든다. 사람의 진짜(혹은 영성적) 키는 얼마큼 사랑받느냐?” 그리고 얼마큼 사랑하느냐?”에서 정해진다.


그리고 우리를 낳고 가르치고 아끼는 사람들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없어질 수가 없다! 더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께 사랑의 시선을 받고 있으므로, 인간은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 다만 이승에서의 짧은 삶이 끝날 적에 하느님 앞에서 내 키가 엄지공주 만큼일지 거인처럼 자랐을지는 내가 얼마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처자식 건사하고 본당교우들이며 이웃사촌과 잘 지내는 것도 아름다운 에로스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나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널따란 에로스는 그들을 하느님의 거인들로 돋보여주지 않던가? 교회의 사회교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눈길을 가족 본당 경상도 한반도 남북 인도와 수단, 시리아와 이집트로 넓혀주려는 복음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폭넓어져가는 사랑을 사회적 사랑이라고 불렀고 선교황은 구체적으로 정치라고 이름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