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마산 2013.5.5]


세상이 주는 평화, 주님이 주는 평화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하시던 말씀이 반가우면서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28)고 덧붙이신 말씀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입교한 신자들에게 사회조사를 하면서 성당 나오는 이유를 물으면 압도적인 숫자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세파에 시달리는 인생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하시는 예수님은 매력이 넘친다.


젊어서는 진학과 과외와 취직, 나이 들어서는 임신과 육아, 가족부양과 직장생활, 부부갈등과 사업체 운영 등으로, 또 늙으면 퇴직과 노후대책과 질병으로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네온사인 없는 질박한 건물, 고요하고 성스러운 제단, 성모상의 잔잔한 미소, 엄숙하고 경건한 미사, 사제의 조용조용한 강론, 고백실의 등불... 평안한 마음을 주는 분위기다.


그러다 주님의 입에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섬직한 말씀을 들으면 누군 폭력혁명을 떠올릴지 모른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던행동이나(마태 21,12), 이에 항의하는 수석사제(성직자), 바리사이파(평협임원), 율법학자(교수 및 언론인 교우)들에게 감히 눈먼 인도자”, “위선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으시던 언행(마태 23)을 보건데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불러야 하나, 폭도라 불러야 하나?


그러니 "교회의 교도권은, 개인의 기본권과 공동선을 심대하게 손상시키는 명백하고도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수단으로서 무력투쟁을 용인한다."(1986년 교령 자유와 해방79)는 교황청의 선언이나, 4대강 공사에 대한 주교단의 입장에 반발하여 중앙알간지에 성당 가기 무섭습니다.”라는 대형광고를 낸 일부 교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교회의 사회교리만 이런 의문에 해답을 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