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복음]

                                                                                       (가톨릭마산 2015.7.12)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사람(견진)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는 예수님 말씀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견진을 받는 것도 가지가지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을 들었고 성령강림날 성령으로 가득 찼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다가 사도들이 안수하자 성령을 받은”(사도 8,16-17) 일이 있고,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성령께서 내리셔서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일화처럼 견진과 세례가 뒤바뀌기도 했다(사도 10,44-48).

 

(유아사망율이 엄청나게 높던 초대교회에서 어린이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관습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서처럼 어른이 세례를 받고 한참 지나서 견진을 받는 이상한 관습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 곧 하느님의 얼을 받으면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날인해 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1코린 2,21-22). 우선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사람으로 도장이 찍히면 하나같이 예언자곧 하느님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거룩한 사제들과 착실한 신자들을 손가락질하여 돈돈돈하는 우상숭배자들이라고 규탄하였고, 사회에 정의와 인권과 평화를 세우라는 엄포를 내렸다. 성전에서 듣기에도 거북하고 국왕과 세도가들 비위에 거슬리는 소리여서 대예언자예수님을 비롯해 제 명에 죽은 예언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견진성사의 깊은 뜻을 알리는 대목이다.


예수님은 세례 때에 성령을 받으셨다. 과연 주님의 영이 그분 위에 내리시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루카 4,18-19) 파견 받으셨음을 깨달으셨고 그 깨들음을 실천에 옮기시다 보니 십자가의 죽음을 면치 못하셨다.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사회적 사랑을 외면하고 성령운동을 방언과 치유의 은사, 철야와 안수기도로 국한시키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웰빙종교라고, ‘무늬만 신자라고 손가락질 당한다. 미국이 남미의 해방신학을 분쇄하려고 개신교 성령운동을 보급하여 남미 가톨릭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정치적 음모를 교황청은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