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교리]

                                                    (가톨릭마산 2015.11.1)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이 계절에 (병자성사 )



11월 위령성월은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이다. 많은 이가 가슴에 사랑하던 이의 봉분을 안고 살아간다. 내게 그토록 소중하던 사람이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숨져가던 파리한 얼굴, 영원을 응시하던 눈을 우리 손으로 감겨주던 순간이 아른거리는 절기다. 그이가 퇴근하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던 놀라움! 딱 한 번만 아가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싶던 간절함! 중학교 때 어머니 임종을 홀로 지킨 필자는 일흔이 넘어서도 엄마 치마의 햇볕 냄새가 그립다.


유럽에는 어느 마을이든 묘지가 동구 밖에 있어 가족이 늘 방문하므로 무덤마다 생화가 꽂혀 있고 밤이면 촛불이 환하게 타오른다. 묘지입구에는 흔히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병자성사는 우리의 사랑하던 사람들이 어제걸어간 그 어둠을 우리가 내일따라서 걷는 평화와 용기를 나눠주는 성사이리라. 죽음은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주님이 저편에서 오셔서 그 누구보다 비극적인 죽음을 당해보셨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용한 의사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는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단말마의 고통을 나누시는 주님의 손길이 다름 아닌 병자의 성사이리라.


구원자께서 곁에 함께 계셔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보지 못한 밝은 빛과 평생 지녀보지 못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은총을 알아보고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 역사를 사랑하는 최종결단을 내릴 것이다. 예컨대, 산부인과 병원에서 낙태된 어린 생명이 그 순간 어른으로 불쑥 자라서 비참한 자기 처지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죽인 의사와 부모를 용서한다면 태아의 그 결단은 본인과 부모의 구원을 얻어내지 않겠는가?


각자의 영혼이 여태 입고 있던 왜소한 육체를 옷벗어버리고 한반도를, 지구를, 온 우주를 옷입는다면, 죽음이야말로 병고로 숨지거나 살해당하는 한 인간이 한반도와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나 위대한 설교나 고매한 인품으로보다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믿음처럼, 병자성사로 축성되는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가 건너가는 널뛰기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