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교리]

                                                    (가톨릭마산 2015.10.18)

부처님의 미소와 예수님의 십자가 [병자의 성사 ]

 

모든 종교는 인생고(人生苦) 앞에서 던지는 ?”라는 물음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사찰의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와 가톨릭 성당 제단에 내 걸린, 피투성이로 숨진 그리스도의 일그러진 얼굴, 두 얼굴은 고통과 악에 맞서는 인류의 두 가지 표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둘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답을 얻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마따나, 하느님의 외아드님이면서도 인간 체험을 해보시려고 하느님 탈출을 감행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정작 당신이 가야파가 보내는 군졸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히고 밤새 매를 맞고 단죄를 받고, 먼동이 트고 단 하루에 빌라도의 사형판결, 십자가 처형과 매장을 당하실 비극을 앞두고서는 겟세마니에서 두려움에 떨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는 게 고작인데...


그리고 당신의 수난을 가리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라며 나서던 분도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지던 순간에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34)라며 비명을 지르셨다. 다만 성서학자들의 풀이로는 어찌하여?(ut quid? eis ti? 마태: hina ti?)”라는 낱말이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는 원망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디다 쓰시려고?”라는 물음이란다.


우리 인생에는 체면도 돈도 권세도 아무 힘이 못되는, 고통의 순간이 온다. 의사도 일류병원도 새로 개발된 명약도 소용없는, 죽음이 온다. 바로 그 무렵, 어머니이신 교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을 축성하러성유를 들려서 사제를 파견한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라는 물음에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2-3)라시던 주님 답변이 사제의 도유에서 드러난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타인들과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라며 교회가 병자의 고통을 축성한다.


골고타에서 양편에 강도를 두고 매달린 그리스도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던 애원을 들으시고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시던 위로가, 사제가 염하는 사죄경에서 드러난다. (다른 강도에게 골고타는 영원한 어둠으로 그쳤다.) “예수님이 죽으셨으므로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도 따라 죽는다!” 교회가 죽음을 축성함은 아마도 죽음이 우리가 하느님과 타인들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리라.